23화
이후로도 몇 개의 운동을 더 하고 녹초가 된 솔레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겨우 일어났다.
“내일 근육통 안 오면 찢어 버려야지.”
“……예?”
“말이 그렇단 거지. 내가 누굴 찢겠어.”
솔레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돈의 입장에선 귀족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을 찢고자 하면 정말로 찢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제 운동을 끝내려는 듯 수건으로 땀을 닦은 솔레아가 방향을 틀고 거실 밖으로 향했다.
‘근육통 안 오면 사람을 찢어 버려야지.’
‘근육통 안 오면 사람 짼다.’
‘근육통이 없으면 널 찢어 죽이겠다.’
주인의 말은 돈의 머릿속에서 잔인하게 변질되어 갔다.
돈은 울며 겨자 먹기로 큰 용기를 냈다.
“주인님!”
“응?”
“……부족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온몸이 후들후들 떨릴 때까지는 하셔야…….”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귀족에게 감히 이런 말을 꺼내다니.
돈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쿵쿵 울렸다.
하지만 주인에게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하긴. 맞는 말이야. 겨우 이 정도로 근육통이 오진 않겠지. 그레이가 근육이 찢어진 자리에 영양소를 채워 넣어야 근육이 커진댔어.”
알 수 없는 운동 상식을 중얼거린 솔레아가 다시 바닥에 누워 두 다리를 90도로 높이 올렸다.
“이건 힘드니까 열 개씩 세 번 할게.”
“……열다섯 개씩 세 번 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주인님은 가능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솔레아의 얼굴이 잠깐 구겨졌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 이런 트레이너 선생님도 있어야지.”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인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돈은 솔레아가 운동을 끝내려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붙잡고 몇 번 더 하기를 권유했다.
솔레아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돈은 입을 다물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 땀을 닦고 있는 솔레아에게 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주인님.”
“으, 죽겠네. 돈. 그 호칭 말이야.”
“아! 네! 예.”
“그냥 남들처럼 공녀님이나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될까? 주인님은 뭔가…… 뭔가 듣기에 좀 그래.”
돈은 잠깐 멍한 얼굴로 솔레아를 바라봤다.
역시 이 주인은 좋은 사람이다.
비록 운동 효과가 보이지 않으면 찢어 죽이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체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돈은 감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아가씨!”
“그래. 무슨 말 하려고 했어?”
“혹시 저를 왜 사신 건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운동하실 때 옆에서 숫자를 세 드리는 용도인가요?”
“흐음……. 뭔가 오해가 있어서 헤이먼이 널 샀는데……. 아무튼 신경 쓸 필요 없어. 넌 잘하고 있으니까. 오늘처럼만 해.”
솔레아는 격려 차원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제 방으로 향했다.
혼자 거실에 남은 돈은 두 손을 꾹 말아 쥐고 수줍게 미소 지었다.
* * *
하, 위험했다.
자칫하면 노예 제도에 찬성할 뻔했네.
옆에서 응원하고, 몇 개 더 하라고 권유하고, 개수도 세 주고, 또 그 외에는 조용하고.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안 돼. 21세기의 지성인이 돼 가지고 이러면 안 되지.
앤이 따듯하게 데워 놓은 물이 가득 찬 욕조 속에 몸을 담그자 피로가 물씬 느껴졌다.
어째, 몸이 좀 단단해진 것 같은 느낌인데.
조바심이 생겨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몸을 헹구고 나와서 옷을 후다닥 갈아입고 서랍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너 이 새끼, 오늘은 딱 작살을 낸다.”
만년필을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이제 안다.
단순히 손목과 팔 근육만으로는 이 염병할 일기장을 조질 수 없다는 걸.
나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복근과 아랫배 안쪽 어딘가 코어라고 불리는 부분까지 힘을 줬다.
광배근에 힘을 주고, 견갑골부터 어깨, 팔까지 온 힘을 써서 만년필을 내리눌렀다.
“……으으.”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거 같은데.
헐, 진짜 닿을 거 같아!
엄청 가깝잖아!
전에도 몇 번 힘으로 글씨를 쓰려 했지만 이렇게 종이에 가까이 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진짜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위에서 누가 눌러 주면 더 나으려나.
그러면 또 만년필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종이와 펜촉의 거리가 1cm도 채 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한국에서 이미 젖 먹던 힘을 쓰면서 살아와서 설마 지금 힘을 못 쓰는 건 아니겠지.
저한테 남은 거라곤 악과 깡뿐인데 그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힘이 빠지려는 순간, 로또 종이가 들어 있는 펜던트가 턱에 툭, 부딪쳤다.
알겠어, 우리 예쁜 17억이. 엄마가 힘낼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만년필을 내리눌렀다.
내 정성에 감복했는지 만년필촉이 일기장에 닿았다.
“와!”
감탄을 내지른 순간 만년필이 그대로 종이 위를 쭉 미끄러져 내려왔다.
“됐어! 진짜 됐어!”
가설은 진짜였어.
정말로 근육왕이 되면 이 일기장에 글씨를 쓰고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마법사가 존재하는 이 이상한 판타지 세상에서 왜 하필 근육을 키워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답은 근육에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엔 숫자 ‘1’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미끄러졌는데도 1이라니. 다음엔 여러 번 미끄러져서 17억까지 써야지.”
흥이 절로 나네.
오늘은 이걸로 됐다.
아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맨몸 트레이닝을 했을 때만큼 숨이 찼다.
일기장을 덮은 뒤 다시 서랍에 넣고 나니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오예. 중세 판타지 놈들아. 나는 17억 들고 집에 갈 거지롱.
빚도 갚고, 지방에 집도 사고, 휴대폰도 현금빵으로 사야지. 나도 남들처럼 살아야지.
아, 그리고 운전면허도 따 봐야지.
차 사면 세금 내야 되니까 차는 사지 말고, 렌트해서 어디 놀러 가면 좋겠다.
누구랑 같이 가지?
헤이먼은 너무 까탈스러우니까 그레이랑 가야지. 재밌겠다.
근데 걔 은근히 잔소리 심해서 속도 낮춰라, 커브는 천천히 돌아라, 하면서 분명히 옆에서 한참 떠들겠지?
그렇게 혼자 킥킥거리다 문득 깨달았다.
돌아가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아……. 깜빡했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왜 이럴까.
여긴 솔레아의 집이고 걔들은 내 가족이 아닌데.
“미안해, 솔레아. 내가…… 잠깐 헷갈렸어.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 봐.”
아무도 없는 허공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오랫동안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돌아가면 또 혼자네.
무슨 소리야. 난 늘 혼자였잖아. 이젠 그게 편하잖아. 그러려고 돌아가는 건데,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렇게 당해 놓고도 또 ‘가족’을 믿고 싶어지다니.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꿈이었잖아. 이제 진짜 그럴 수 있는데.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목걸이를 꾹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짜인 거 티 내지 말고 적당히 지내다 돌아가면 돼. ……괜찮아, 난 그거면 돼.”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서자 넓은 식탁에 그레이 혼자뿐이었다.
“공작님은 또 안 드셔? 헤이먼은?”
“아버지는 업무가 쌓여서 방에서 간단하게 드신다고 했고, 헤이먼은 이따 파티에 가야 해서 준비한다더라.”
“파티?”
그레이가 말을 얼버무렸다.
“음……. 뭐, 그런 게 있어.”
귀족들이 가는 파티인데 남한테 숨길 이유가 뭐가 있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빛이 음흉해졌다.
요놈들∼ 으른의 파티를 즐기나 보네.
하긴, 중세 시대 귀족들이면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어릴 때 만화방에서 베르사유의 어쩌구랑 만화책 많이 읽었어.
19금 달린 중세 시대 만화책도 주인아줌마 몰래 구석에서 열심히 읽었다고.
흐뭇하게 미소 짓는 내 얼굴을 본 그레이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너 또 무슨 생각 중이길래 얼굴이 그래?”
“넌 왜 맨날 내 얼굴 갖고 난리야. 그러는 네 얼굴은 고와?”
“내 얼굴이 뭐, 어때서.”
“너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너 쳐다도 안 보지?”
“그건 내가 귀족이고, 평판도 별로 좋지 않고…….”
“아니야, 그레이. 너 못생겨서 그런 거야.”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하녀들의 눈이 잠깐 커지는 게 보였다.
안다, 나도.
그레이 잘생긴 거.
아주 뒤집어지게 잘생긴 거 안다.
그런데 어떡해.
얘랑 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약 올리고 싶다고.
그리고 진짜 잘생긴 사람들은 이런 걸로 타격 안 받아.
하지만 그레이는 이제껏 한 번도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못생겼다는 말을 들은 그레이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 그 정도야?”
“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내가 입양아라서 남들이 피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라. 내 말 들려? 그레이?”
그레이는 스푼을 뒤집어 제 얼굴을 확인했다.
지금 본다고 뭐가 달라지냐.
잘생겼겠지, 인마.
하지만 그레이의 표정은 심각했다.
손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코와 입술도 쿡쿡 찔러 보던 그레이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실비아. 솔직하게 말해 봐. 내 얼굴이 피하고 싶을 정도야?”
그레이의 잔에 물을 채워 주던 하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실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빠르게 도리도리 저은 뒤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레이는 허망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야, 나 진짜 못생겼나 봐.”
아니요, 선생님.
제가 보기에 실비아는 심장이 멈출까 봐 도망간 것 같아요.
그렇게 간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묻는데, 대체 누가 멀쩡하겠냐고요.
날카로워 보이는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레이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졌다.
“오늘 파티 나도 가려고 했는데……. 안 가야겠다.”
“그레이. 미안해. 농담한 거야. 너 잘생겼어.”
뒤늦게 그레이를 달래 보려 했지만 그레이는 애처롭게 웃으며 오히려 나를 달랬다.
“괜찮아, 나 파티 안 가도 돼. 어차피 헤이먼 혼자 보내기 좀 그래서 가려고 했던 거였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진짜 잘생겼다니까. 정말이야. 진짜로. 내 근육을 걸고.”
“……너 근육 얼마 없잖아.”
“야! 너 이게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근육인 줄 알아?!”
울컥해서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가 다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일단 지금은 그레이부터 달래야 했다.
“오빠.”
“응?”
“나 기억을 잃고 눈 떴을 때 오빠 얼굴 보고 너무 잘생겨서 속으로 소리 질렀잖아.”
“야, 무슨 그런 말을 해.”
입은 아니라지만 몸은 솔직하구나.
그레이의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정말이야. 너무 잘생겼어. 아부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진짜 잘생겼어. 크고 긴 눈인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서 대박 섹시해. 입술도 붉고 도톰해서 완전 사람 홀려. 남매끼리 이런 말 하는 거 버거운데 나 진짜 마음 크게 먹고 말하는 거야.”
“남매?”
지금 잘생겼다고 팔만대장경 수준으로 칭찬하고 있는데 왜 거기서 제동이 걸려.
하지만 그레이는 남매 소리가 더 듣기 좋은 것 같았다.
뻣뻣하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무표정으로 있으면 사람 손목 발목 다 자를 것같이 생겼는데 웃으니까 세상 햇살이 다 네 얼굴에 있네.
“넌 진짜 아이돌 해야 돼.”
“그게 뭔데?”
“그, 모두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 줘.”
그레이의 입꼬리가 삐죽거리며 점점 더 위로 어색하게 올라갔다.
“넌 나 좋다는 말을 뭐, 그렇게 하냐……. 알았어. 오늘 파티에 너도 데려가 줄게.”
아니, 난 파티가 아니라……. 아유, 그래 기분 풀렸다면 됐다.
저거 아주 인간 겉바속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