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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192)

22화

저택 안으로 들어온 그레이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며 급히 어디론가 가 버렸기 때문에 솔레아는 앤과 아직 바지를 못 입은 돈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이 넓은 저택에, 이렇게 많은 사용인들이 있고, 오늘은 아무도 집 밖으로 안 나갔다는데 왜…….”

솔레아는 급격히 골이 아파 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노예한테 무슨 일을 시켜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바빴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노예와 입씨름을 하고 있는 이 와중에도 당첨금은 차분히 수령인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솔레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노예 돈을 바라봤다.

어디서 사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솔레아의 명의로 되어 있으니 무슨 일이든 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인들은 노예를 본체만체하며 힐긋거리다 가 버리니.

염병할 노예 제도.

대체 무슨 일을 시키란 말이야?

귀족들은 노예를 사면 무슨 일을 시키는 거지?

여긴 농장도 아니라서 맡길 만한 일도 없는데.

솔레아는 빨간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계속 고민했다.

아랫도리에 담요를 두른 돈이 눈치를 보며 방구석으로 가 섰다.

“왜 그래?”

“저는…… 힘도 웬만큼 쓰고, 잡일도 이것저것 다 할 줄 아니 괜찮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돈은 뭔가 할 말이 남은 것처럼 우물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리고?”

“옷을 좀…….”

돈은 말을 꺼내면서도 솔레아와 그녀 옆에 서 있는 앤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폈다.

노예 주제에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게 건방져 보일까 봐 걱정인 듯 모아 쥔 두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었지만 이런 꼴로는…….

솔레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제 이마를 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미안! 미안해요! 내가 지금 그쪽 손 잘릴 뻔한 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앤, 가서 이 사람이 입을 만한 옷 좀 가져와 줘.”

방으로 올라오는 동안 책 좀 그만 읽으라고 달달 볶인 앤은 별다른 말 없이 공손히 절을 하고 방을 나섰다.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돈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그는 지금 굉장히 뻘쭘했다.

노예 주제에 귀족과 한방에 있다니.

돈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더욱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그 소심한 움직임을 눈치챈 솔레아가 돈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왜 그러고 있어? 오래 서 있어서 다리 아플 텐데 의자에 앉아. 아, 바지가 없어서 앉기가 좀 불편한가? 다리를 모으고 앉으면 되잖아.”

솔레아는 마주 보는 자리에 놓여 있던 의자 하나를 들어다가 돈을 향해 돌려 줬다.

“주! 주인님! 저 때문에 무거운 걸 드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당황한 돈이 허둥거렸지만 그의 자유로워진 두 손은 지금 허리춤에 두르고 있는 담요를 잡고 있느라 바빴다.

저를 위해 의자를 옮겨 준 주인의 인상이 약간 구겨졌다.

“솔레아 몸이 약하다는 게 거기까지 소문이 났나. 그래도 이제 의자 하나 정도는 옮길 수 있는데.”

왜 본인 이름을 남처럼 말하지?

잠깐 궁금했지만 노예는 주인에게 질문해선 안 된다.

돈은 질문은 속으로 삼키고 죄송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죄, 죄송합니다.”

“됐어요. 자. 앉아요. 아니, 앉아.”

“저는…….”

“저는?”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돈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주인님의 깨끗한 의자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돈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자 솔레아는 팔짱을 끼고 돈의 굽은 등과 어깨를 내려다봤다.

목욕을 몇 달 넘게 못 한 것 같긴 했다.

근데 사람이 이래저래 고생 좀 하다 보면 목욕 못 할 때도 있지 않나.

솔레아는 과거를 떠올렸다.

나도 처음 집 나왔을 때 공용 건물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빈집에서 몰래 자곤 했는데.

외지 생활 하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저 사람은 남한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가 보다.

대충 결론을 내린 솔레아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래, 의자는 통째로 빨 수가 없으니까 눈치가 보일 수도 있지. ……그럼 씻을래?”

솔레아는 엄지로 제 방 한쪽에 마련된 문을 가리켰다.

‘씻을래?’라고 말한 걸로 봐선 아마 욕실인 듯했다.

돈의 눈동자가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제, 제가 어떻게 감히 주인님의 욕실에서 몸을 씻, 씻……. 그냥 공용 수돗가나, 아니면 근처 냇가에만 보내 주셔도 됩니다. 아! 도망은 안 갑니다.”

솔레아의 미간 폭이 다시 좁아졌다.

몸이 찝찝하면 빨리 씻고 싶지 않나?

의자에 앉으래도 싫대.

씻으라니까 그것도 싫대.

이 저택이 얼마나 넓은데 공용 수돗가까지 갔다 온대.

“아니, 그냥 씻으면 되잖아! 이것도 싫다. 저것도 못 하겠다.”

“죄송합니다! 제, 제가 더러워서!”

“그냥 들어가!”

돈의 등을 덮고 있던 제 가운을 낚아채듯 벗긴 솔레아가 맨 등짝을 손바닥으로 찰지게 때렸다.

“빨리 씻어!”

“아! 주, 주인님?”

돈의 눈에 당혹이 서렸다.

‘제가 왜 주인님의 방에서 씻나요?’

씻지 않는 제게 화난 새로운 주인을 보며 돈은 고민에 빠졌다.

며칠 전, 새로운 주인에게 팔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돈은 심드렁했다.

뭐, 어차피 또 어딘가로 가서 쓰러질 때까지 일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돈을 산 주인의 이름은 솔레아 폰 베르고.

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유명한 귀족가의,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막내 아가씨였다.

‘그런 분이 왜 노예를?’

베르고 공작가는 노예를 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노예들은 돈이 떠나기 전 심각한 얼굴로 조언했다.

‘약을 만들기 위해 노예들을 몰래 사다가 임상 실험을 하는 귀족들도 있대.’

담요를 붙잡고 욕실로 발자국을 옮기는 돈의 손에 땀이 들어찼다.

실험을 위해 나보고 씻으라고 하시는 건가.

다른 하인들은 모르게 하려고 일부러 방까지 데려오시고?

이런 삶이 너무 당연해서 여태껏 한 번도 두렵다 느낀 적이 없었는데 왜인지 이번엔 두려웠다.

아까 주인님의 하녀가 한 말이 귓가에 웅웅 맴돌았다.

‘그럼 앞으로도 바지를 안 입히시면 어떨까요?’

제대로 걷지 못하게 만든 다음에 실험을 하시려는 거구나.

돈은 덜덜 떨며 욕실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또 무슨 소리야.”

피곤한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주인의 뒤로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역광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짜증이 난 것 같은 말투였다.

아까 처음 대화했을 때처럼 상냥하셔도 용서해 주실까 말까인데.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욕실 안에 들어가면 도망도 못 치고 꼼짝없이 실험체가 되어야 한다.

아니, 이게 꼭 욕실이란 법도 없잖아. 문을 열었는데 밀실이면 어떡하지.

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귀족들에 대한 괴담까지 더해져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돈은 큰 소리로 빌었다.

“말 잘 듣는 노예가 되겠습니다! 절대 도망가지 않을게요! 하라는 거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상한 옷은 입히지 말아 주세요.”

주인님은 말이 없었다.

중간에 목소리를 작게 해서 안 들리셨던 걸까.

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열린 방문 앞에 서 있는 앤이 보였다. 그녀는 들고 온 옷 무더기를 바닥에 모두 떨군 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돈과 솔레아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가린 입이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돈은 다시 솔레아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주인은 화나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돈을 내려다보던 솔레아는 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앤, 이리 줘.”

“……자리를 비켜 드릴, 아. 그 전에 아까 말씀드린 그 사슬을 준비해 드릴까요?”

“옷.”

“아, 네.”

앤은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재빠르게 집어 들고 솔레아에게 건넸다.

“문 닫아.”

“네.”

문을 닫으며 나가려던 앤을 솔레아가 불러 세웠다.

“있어. 괜히 오해하지 말고.”

왠지 얼어붙은 분위기에 돈은 입을 꾹 다물었고, 앤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솔레아는 옷을 손에 들고 뚜벅뚜벅 걸어와 돈의 앞에 섰다.

“일어서서 이 옷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깨끗하게 씻은 뒤에 옷 입고 나와. 그리고 이상한 오해 좀 하지 마. 여기 수맥이 흐르나. 왜 이 방에만 들어오면 오해를 해, 사람들이.”

“……예?”

“나 누구 묶고, 때리고,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그런 취향 아니야. 나는 굉장히 노멀한 사람이라고.”

“아, 예? 에, 예…….”

“뜨거운 물 필요해? 날은 더운데.”

“아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손사래를 친 돈이 사냥개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뒷걸음질하며 솔레아와 조금씩 멀어졌다.

돈이 엉거주춤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솔레아가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그에게 물었다.

“돈. 숫자 셀 수 있어?”

“예. 빠르게만 아니면…….”

“그럼 됐어.”

더 이상은 거부할 수가 없어 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진짜 욕실이었다.

돈은 주인의 말대로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욕실에서 나가자 앤이 눈물 젖은 얼굴로 침대 밑에서 두꺼운 양장본 여러 권을 꺼내고 있었다. 그녀는 곧 그것들을 커다란 자루에 담았다.

“저, 앤 님?”

“1층 작은 거실로 가 봐. 아가씨는 거기 계셔.”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향하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도 때리지 않는다니.

그럼 어떤 일을 시키시는 거지?

입으라고 준 옷도 모두 깔끔히 세탁되어 있었다.

찢어지거나, 어딘가에 구멍이 났거나, 오물이 묻어 있지도 않았다.

진짜 입을 만한 옷이었다.

그러고 보니 ‘돈’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도 오랜만이었다.

1층의 작은 거실로 가자 주인은 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팔뚝의 아랫부분과 양발의 끝부분으로 몸을 지탱하던 주인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닥으로 철퍽 쓰러졌다.

……왜 저러시는 거지.

“으억! 잘 왔다.”

“예, 예! 뭐, 뭘 할까요. 주인님!”

씻는 걸 허락하시고, 깨끗한 옷도 주셨다.

괜히 기강을 잡겠답시고 저택에 오자마자 때리지도 않았다. 비록 도끼는 휘둘렀지만.

이상한 자세에 당황하긴 했지만 돈은 기쁜 마음으로 엎드려 있는 솔레아 옆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 플랭크 다시 할 거니까 1부터 30까지 세.”

“플, 예?”

“준비, 시작!”

주인은 금세 자세를 바로잡으며 다시 몸을 일직선으로 일으켰다.

바닥에 닿은 아래팔이 양쪽 모두 벌벌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주, 주인님. 이걸 왜 하시는 건지……. 감히 누가 주인님께 벌이라도…….”

“악, 힘들어! 돈! 숫자!”

“아, 네, 네! 1! 2! 3!”

“아니지! 네가 말하는 동안 3초 지났잖아!! 네가 헬스장 트레이너야?! 으아악!”

“예! ……6! 7! 8!”

“나 지금 몸 일직선이야? 봐 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돈은 무릎걸음으로 찔끔찔끔 물러서서 솔레아의 몸이 일직선으로 곧게 펴져 있는지 확인했다.

그 와중에도 입으로는 계속 숫자를 세고 있었다.

“11! 12! 네, 일직선이십니다. 13! 14!”

솔레아는 겨우 30초를 다 채우고 일어섰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은 꽤나 뿌듯해 보였다.

“와, 진짜 편하네. 숫자 세면서 하려고 해도 힘들어서 중간에 자꾸 까먹거든. 앤은 바빠서 이런 자잘한 일 못 시켰는데.”

탐스러운 붉은 머리의 제 주인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공에 앉았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건 스쿼트라는 건데, 열다섯 개씩 세 번 할 거야. 잘 세야 돼.”

“예, 예.”

돈은 이제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나, 둘, 셋, 넷.”

“중간중간에 칭찬도 좀 섞어 줘.”

“예, 여섯, 일곱, 완벽하십니다. 여덟, 아홉,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으십니다. 열, 열하나, 열둘.”

두 번째 운동까지 마친 솔레아는 뿌듯함에 활짝 웃으며 돈의 손목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려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맞부딪쳤다.

“이게 뭔가요……?”

“하이파이브! 너무 잘했어! 네가 오니까 훨씬 좋다.”

돈은 주인의 손바닥이 닿았던 손바닥을 괜히 꾹 말아 쥐었다.

처음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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