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56)

* * *

그 결과 내 방의 벽난로에 흑철목이 가득 채워졌다. 나는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벽난로 근처를 기웃거리는 엠마를 쫓아내고 홀로 방 안에 남았다.

‘엠마가 보는 앞에서 마법사를 불러낼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나는 빙의자답게 왕국의 시조 에프론 제레인트가 수족으로 삼았다는 대마법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이 세계’의 사람은 결코 그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걔는 악마거든.’

신성한 왕국의 건국 신화에 악마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게 알려지면 온 왕국이 발칵 뒤집히겠지.’

그것이 역사 속에 대마법사의 이름이 남지 않은 이유였다. 에프론 제레인트는 나라의 건국에 악마의 힘을 빌렸다는 사실을 끝까지 감추려고 했다. 그래서 푸른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 이름조차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와 계약해서 나라를 세운 왕보다는 강력한 대마법사의 충성을 얻어 낸 왕이 더 그럴듯해 보이잖아.’

악마와 계약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악마의 이름을 부르거나, 악마가 흥미로워할 만한 대가를 바치거나.

에프론 제레인트는 후자를 선택했고, 계약의 대가로 첫 아이의 영혼을 악마에게 바쳤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방법은 당연히 전자였다. 악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름만 알면 공짜로 악마를 부릴 수 있다니.

‘이게 치트 키가 아니면 뭐겠어?’

“테오하리스.”

나는 소설에서 보았던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이한 이름도 아니었다.

누군가 우연히 이 이름을 부른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저 이름이 지워진 것처럼 없었다. 마신이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악마들의 이름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계의 어떤 인간도 악마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러니 ‘이름을 부르면 공짜로 일을 해 주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대가를 달라’는 건 악마들 특유의 심술이 담긴 계약 조항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기 인간계야?”

이름이 불리며 내 앞으로 강제 이동된 악마는 꽤 당황한 눈치였다. 당연히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 세상의 법칙에 따르면, 인간이 악마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라고.’

어쩐지 상쾌한 기분이었다. 빙의자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반가워요, 테오하리스 씨.”

나는 웃으며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악마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되나요? 그냥 대마법사님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대마법사님이라니. 그렇게 촌스러운 호칭으로 날 부른 건 몇백 년 전에 아들놈 영혼을 팔면서 왕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머저리뿐이었는데…….”

악마가 물건을 품평하는 것처럼 나를 샅샅이 살폈다.

“너 설마 걔의 후손이냐?”

“후손이라뇨. 이 세상에서 제레인트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게 바로 저일 텐데요.”

캐서린의 다섯 물고기 모두 귀찮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두 명의 제레인트, 왕세자와 리던이 제일 귀찮았다.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악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군. 같은 인간이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완전히 달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악마가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놈의 후손도 아니면서 어떻게 날 불렀지? 아니, 그놈 후손이라도 날 부를 수는 없을 텐데.”

“그렇죠. 인간은 당신들 이름을 모르니까.”

“그런데 넌 어떻게 날 불렀지? 아니, 인간들이 우리 이름을 모르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요. 그쪽이 믿을지도 모르겠고…….”

내 벽난로에 불을 붙여 줄 귀한 손님이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려고 애쓰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꼭 그걸 다 설명해야 하나요? 그냥 제 부탁만 빨리 하나 들어주면 안 될까요?”

하지만 제멋대로인 게 종족 특성인지 악마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야, 인간. 내 이름 어떻게 알았냐니까? 너 평범한 인간이 아닌 거지? 그런 거지?”

“제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면 이렇게 추워서 덜덜 떨고 있겠어요? 빨리 불이나 붙여 주고 돌아가는 게 어때요?”

“불? 너도 불꽃이 필요한가? 그 머저리 놈처럼?”

불이라는 말에 악마의 기세가 조금 달라졌다.

“불이라…… 그래.”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그의 얼굴에 어느새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족들 중에서도 불을 다루는 솜씨는 내가 제일 좋지. 그게 필요하다면 날 부른 건 당연해.”

오히려 그는 아주 흡족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 좋으면 좋을수록 그는 강력한 불을 만들어 줄 테니까.

나는 재빨리 그의 말에 긍정했다.

“그럼요. 불 하면 역시 푸른 불꽃, 그걸 다루는 푸른 마법사가 최고죠.”

“뭘 좀 아는 인간이로군. 그럼 너 역시 그 머저리처럼 왕이 되기를 원하나?”

“아뇨?”

“그렇다면 많은 돈을 원하는군? 그래서 쓸어버려야 할 놈들이 아주 많은가 보지?”

“그것도 아닌데요?”

“뭐? 그럼 왜 내 푸른 불꽃이 필요한데?”

“벽난로를 피워야 해서요.”

나는 차분하게 흑철목으로 가득 찬 벽난로를 가리켰다. 내 손가락을 따라 벽난로를 바라본 악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 벽난로?”

“저게 아무것도 아닌 나무로 보이지만, 평범한 나무가 아니라서 보통 불로는 태울 수가 없대요. 그래서 아주 강한 불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잠깐!”

악마가 재빨리 내 말을 가로챘다.

“고작 벽난로를 피우겠다고 날 불렀다고? 이 푸른 불꽃의 악마 테오하리스를?”

“네.”

“사, 사람은 안 죽여?”

“으. 저보고 살인자가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 살인자 소리 이제는 좀 지겹거든요.”

“그럼 피는?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아?”

“피를 봐서 뭐 하는데요? 그거 뭐, 어디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악마가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보았다. 영혼이 반쯤, 아니 그 이상 나간 얼굴이었다.

“……그렇지. 인간들한테는 피가 필요 없지.”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러면…… 나라, 그래, 나라를 정복해서 왕이 되자! 너희 인간들은 그런 거 좋아하잖아!”

“싫은데요.”

“어째서? 엄청난 권력을 원하지 않아?”

“그다지……. 그런 거 그냥 귀찮기만 하고, 엄청 힘들 것 같아요.”

조선 시대 왕들이 줄줄이 단명한 이유가 뭐였겠나? 그게 다 왕 노릇 하는 게 힘들어서다.

‘내가 그런 피곤한 짓을 왜 하겠어?’

“인생이라는 게 꼭 높은 자리에 있다고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그냥 평범한 귀족으로 호의호식하는 게 최고라니까요.”

특권은 가졌으되 노동할 필요는 없는 꿀 보직. 그게 바로 귀족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악마님.”

나는 다시 한번 벽난로를 가리켰고.

“빨리 벽난로에 불 좀 붙여 줘요.”

동시에 악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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