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56)

1장. 에렐

-사교계가 조용해질 때까지 에렐에 내려가 있거라.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곳이다. 얌전히 자숙하며 지내기엔 그만한 곳이 없지.

왕도 전체에 내가 캐서린을 죽이려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오베론 공작은 나를 가문에 딸린 영지 중 하나인 에렐로 보냈다. 꽤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지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공작은 똑같은 대사를 하며 이브리아를 에렐로 내려보냈다.

‘따져 보면 시점이 조금 빠르긴 하네.’

원래 이브리아는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왕세자의 파혼 선언과 함께 사교계에서 쫓겨난다. 이브리아가 에렐로 가게 되는 건 그 이후였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떠밀리기 전에 스스로 왕세자와 파혼하고 사교계를 떠났다. 덕분에 시기가 조금 당겨진 것이다.

에렐은 왕국의 북쪽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작은 영지였다. 혹한이 일상인 촌구석인지라 섬세한 귀족 아가씨가 시간을 보내기에는 썩 무료한 동네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진짜 이브리아였다면 에렐에 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브리아의 반성을 바라는 공작의 입장에서는 썩 안타깝게도, 나는 그다지 섬세한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다. 북쪽의 시골 영지면 어떤가? 오히려 게으름을 피우며 느긋한 생활을 보내기에는 그만이었다.

‘게다가 나만 보면 도끼눈을 뜨는 캐서린의 물고기들도 없잖아. 이건 벌이 아니라 상이나 마찬가지라고.’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추, 춥잖아!”

에렐은 추웠다. 정말, 엄청나게 추웠다.

상상 이상의 추위였다. 어찌나 공기가 차가운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실내임에도 두툼한 외투를 입고 담요까지 어깨에 둘렀다. 그러나 이 엄청난 추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쯤 되니 이브리아의 사망 원인이 자살이 아닌 동사가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이건 의심이 아니다. 이브리아는 이 추위에 얼어 죽은 게 분명했다. 정말로.

“다, 다들 이, 이렇게 춥게 지, 지낸단 말이야?”

나는 믿을 수 없어 옆에 선 하녀 엠마에게 물었다. 나는 턱이 덜덜 떨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이곳 에렐 성에서 나를 모시게 된 이 하녀는 가벼운 메이드복만 입고서도 태연하게 차를 따르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드시면 조금 나으실 겁니다.”

“차를 마, 마신다고 해결될 추, 추위가 아닌데? 엠마, 너는 추, 춥지 않은 거야?”

덜덜 떨면서 따뜻한 차를 마셨더니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 여전히 온몸이 으슬으슬해서 이대로 있다가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드러누울 판이었다.

“저 역시 춥습니다. 하지만 저는 에렐에서 나고 자랐지요. 이곳 출신들은 모두 추위를 견뎌내는 데 익숙합니다. 밤이 되면 견디기 힘들어지지만, 아직은 낮이라 따뜻한 편이니까요.”

“이게 따뜻한 편이라고? 지금보다 더 추워지면 난 분명 죽을 거야…… 정말로 동사할 거라고…….”

제대로 호의호식하기도 전에 동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한데.’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다행히 방 한구석에 벽난로가 있었다.

“벽난로는 뒀다가 뭐해? 불이라도 피워야겠어.”

“송구합니다, 아가씨. 지금 영지 내에는 불을 피울 만한 목재가 전혀 없습니다. 그나마 조금 남은 목재는 주방에서 요리를 할 때 쓰고요. 물을 데워 따뜻한 차라도 마실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뭐라고?”

어이없는 소리였다. 아무리 시골이라고는 하나 다른 곳도 아닌 공작가 소유의 영지에서 땔감이 없어 벽난로를 못 피운다니. 황당한 내 표정을 읽은 엠마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에렐에서 나는 목재는 추위를 견뎌내고 자라는 흑철목입니다. 지나치게 단단한 데다 불에 잘 타지도 않아서 땔감으로는 쓸 수 없습니다.”

“그럼 불에 타는 목재를 다른 영지에서 사 오면 되잖아?”

“저희 영지에 목재를 대던 곳은 오칼 상회입니다. 백 년 넘게 관계를 이어 오고 있었는데, 최근 갑작스럽게 거래를 끊어 버려 저택은 물론이고 영지 전체에 땔감이 뚝 끊겼습니다.”

엠마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거래처를 늘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 당장 땔감을 구하기가 힘듭니다. 집사가 급히 새로운 거래처를 물색 중이니 조금만 견뎌 주세요.”

거래의 기본은 신뢰였다. 신뢰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이어진 거래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려면?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철저한 신분 사회였다. 시장의 논리보다 신분의 질서가 더 상위에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라도 일개 상회가 공작령과의 거래를 일방적으로 끊는 건 쉽지 않았다.

“에렐은 공작령이야. 일개 상회가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기는 힘들잖아?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당연한 질문에 엠마가 잠시 내 눈치를 살폈다.

“엠마.”

어서 말해 보라며 재촉하니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오칼 상회는 멜리올 백작가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멜리올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

캐서린의 물고기 중 하나인 1왕자 리던. 그의 외가가 멜리올 백작가였다.

멜리올의 위세는 오베론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왕족의 외가였다. 왕가와 연이 닿아 있는 가문이라면 공작가에서도 함부로 하기는 힘들었다.

‘뒷배는 든든하다는 거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혹시 거래가 끊어진 게 정확히 일주일 전쯤이야?”

“……그렇습니다.”

“1왕자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했겠네.”

이브리아가 캐서린을 죽이려고 했던 게 괘씸해서 거래를 끊어 버린 게 분명했다.

‘과연 리던 제레인트다운 처사라고 할까.’

내가 책을 통해 읽었던 그의 캐릭터와 완전히 똑같아서 놀랍지도 않았다. 리던 제레인트는 1왕자이지만 왕세자의 자리는 동생인 카시안 제레인트가 차지했다. 장자 계승이 대부분인 이 세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지만, 상황을 살펴보면 납득이 된다.

리던의 어머니는 그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왕비가 된 후작가의 여인이 카시안을 낳았다. 살아 있는 권력은 제 아들을 왕세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이브리아와 카시안의 약혼을 추진한 것도 오베론 공작가의 힘을 등에 업기 위한 왕비의 수였다.

자, 이제 생각해 보자. 어머니를 일찍이 잃은 데다, 외가는 힘없는 백작가에,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장남. 사망 플래그가 너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던은 똑똑한 편이었다. 그래서 제가 처한 위험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이 상황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유들유들하고 힘없는 척 설설 기었지만, 속으로는 악과 깡을 채웠다.

‘흔히 말하는 흑막 캐릭터지.’

이런 상황 속에서 리던 제레인트와 왕세자의 약혼녀인 이브리아는 필연적으로 적이 됐다. 애초에 사이가 좋지도 않았는데, 이브리아가 리던이 좋아하게 된 캐서린까지 매일 괴롭혀 대니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캐서린의 어장 속 다섯 물고기 중 이브리아와 제일 사이가 나쁜 사람을 꼽으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리던이었다.

‘그렇다고 거래를 끊으면 어떡해!’

왕족은 정말 이해 못 할 족속들이었다.

‘왜 이렇게 스케일이 큰 거야?’

화가 났으면 당사자인 나에게 화를 내면 될 일인데, 고작 내가 머무른다는 이유로 에렐 전체가 곤란하도록 거래를 끊어 버렸다.

사실 에렐과 오칼 상회의 거래가 끊어진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 줄 목재가 사라졌다는 건 몹시도 중요했다. 끊어진 거래를 복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건 정말 귀찮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얼어 죽을 판이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 시골 영지랬는데…… 그래서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면 될 거랬는데…….’

머릿속에서 내가 상상했던 고요하고 안락한 에렐 생활이 아득히 멀어졌다.

사교계를 떠나며 나는 정말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원작의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선량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수습하고 싶은 마음도, 책 속의 세상에 불과한 이곳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울 의지도 없었다. 팔자 좋은 귀족 아가씨로 빙의했는데 굳이 피곤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뿐이다.

‘열심히 사는 건 너무 귀찮잖아.’

하지만 지금 이건,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우선 살아야 호의호식도 할 거 아닌가?

나는 담요를 꼭 두른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쩔 수 없군. 치트 키를 써야겠어.”

“……치트 키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생소한 단어에 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트 키란,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복잡한 게임을 단숨에 지뢰 찾기 같은 단순한 게임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치였다. 아무리 어려운 게임이라도 치트 키만 있다면 문제없었다.

“엠마, 내가 이 추운 날씨에 벽난로도 못 피우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유가 뭘까?”

“그건 당연히 오칼 상회에서 거래를 끊어 땔감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냐. 틀렸어.”

“예?”

“에렐엔 땔감이 남아돌잖아. 흑철목. 그건 아주 많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그건 불에 잘 타지 않아서 땔감으로 쓸 수가 없습니다.”

“보통 불로는 그렇겠지. 그런데 아주, 아주, 아주 강한 불이 있다면 어떨까?”

엠마는 이제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갈수록 이상해지는 대화의 방향에 아가씨가 드디어 추워서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엠마도 알지? 푸른 불의 전설. 너무 강력해서 모든 적을 태워 버렸다는 대마법사 이야기 말이야.”

“물론이지요. 왕국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인걸요.”

제레인트의 건국 신화는 푸른 마법사와 함께 시작된다. 시조인 에프론 제레인트를 도와 적들을 쓸어버린 불세출의 대마법사. 그는 왕의 곁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아군이었지만, 에프론 제레인트의 죽음과 함께 왕국의 역사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연기처럼 홀연히.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서에는 대마법사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거라곤 대마법사가 사라지기 전 남겼다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푸른 불꽃을 쓸 것이다.’

건국왕을 도와 열심히 나라를 세웠는데 역사에 남은 게 저 한마디뿐이라니. 하지만 누구도 애써 푸른 마법사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건국 ‘신화’ 아닌가? 원래 ‘신화’에는 시조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의 과장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왕국 사람들은 신화 속 대마법사의 존재를 일종의 과장으로 여겼다.

“그 대마법사의 푸른 불꽃만큼 강한 불이라면 흑철목도 태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는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겠지.”

“하지만 푸른 마법사님은 신화 속의 존재인걸요. 푸른 불꽃도 마찬가지고요.”

엠마도 어쩔 수 없는 왕국 사람인지라 푸른 마법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책으로 이 세계를 읽은 나는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의 존재가 진짜라는 것은 물론이오, 그의 숨겨진 사연까지도 속속들이.

그게 지금 나의 치트 키가 되어 줄 터였다.

“엠마. 벽난로에 흑철목을 채워 줘.”

“아가씨, 하지만 흑철목은 정말로 불에 안 탑니다. 가져와도 소용없을 겁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여기에 흑철목이나 채워 줘. 어서.”

단호한 내 태도에 엠마도 말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기운 빠진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예. 분부하신 대로 흑철목을 가져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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