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화
뒤풀이용 물건은 외형변경물약을 써서 사 왔다.
넷 다 얼굴 팔린 몸들이라, 사람들이 발견하면 금세 뉴스로 나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바탕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테이블을 가장 많이 차지한 건 주이안 헌터를 제외한 우리 셋의 한이 가장 많이 서린 고량주였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량주를 쓸어왔다. 그리고 그걸 주이안 헌터 앞에 늘어놓았다.
“저는 아시다시피 술을―”
안 먹는다는 주이안 헌터를 술독에 빠뜨려 버렸다.
“드십쇼.”
벌이야! 벌이라고!
쌓인 게(?) 많은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래 봐요.”
난 결국 고량주 사발을 앞에 놓은 주이안 헌터 앞에서 으름장을 놓았다.
내 뒤에 서 있는 소예리 헌터와 신재헌도 나와 비슷한 표정일 거라고 확신하면서.
“앞으로 말하면 페널티 붙는 상태이상 아니면 싹 다 부는 거예요. 다 불어버리는 거야. 한 글자 숨길 때마다 한 병 마실 각오 하고. 알았어요?”
내 협박에 주이안 헌터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치만이고!”
이 사람하고 논리 싸움을 하면 안 된다!
왜냐면 내가 지니까!
난 당당하게 생각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예외는 없어요. 알았어???”
결국 우리는 주이안 헌터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잔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커다란 사발에 손을 가져가며 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
소예리 헌터가 분노했다.
물론 이 이상 한풀이(?)를 할 순 없었으므로 답은 하나뿐이었다.
[주이안씨 – SS급(힐러)
- 버프 : 만독불침(SS)]
만독불침 켜질 때까지 술 들이붓기!
술이 이길 것인가, 스킬이 이길 것인가는 학자의 초유의 관심사였다.
S급의 독 내성이야 강한 알코올이 이길 수 있다는 건 이미 판명 났다.
하지만 만독불침 같은 스킬도 그럴 것인가?
그 실험이 가능한 사람은 국내에 주이안 헌터뿐이었다.
하지만 감히 그에게 실험해보자고 까부는 놈들은 내가 자근자근 밟아주었기 때문에 문의가 온 건 3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하고 싶으셨던 실험 오늘 해드립니다!
그렇게 한 시간 후.
“이렇게 많은 술을 한 번에 마시는 건 처음입니다.”
주이안 헌터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채였다.
“SS급이라 괜찮은 건가?”
“멀쩡하신 게 SS급의 독 내성인지 만독불침 때문인지 알 수가 없는데.”
신재헌과 난 그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이안 헌터가 한 시간 동안 헌터용 고량주를 마시고도 안 뻗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물론 딜러 둘이 머리 굴려 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난 소예리 헌터를 흘끗 돌아보았다.
평소였으면 병의 반은 쓸어갔을 소예리 헌터는 오늘따라 조용했다.
“그건 내가 알 거 같은데요.”
눈이 마주치자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그녀가 잔을 흔들어 보였다.
“내 이야기 들어주면 알려주지롱.”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웃는 그녀에게 우리의 시선이 쏠렸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알 것 같아서, 나와 신재헌까지 자리에 착석했다.
“좋아요.”
해보십쇼. 우리는 경청하는 자세로 잔을 하나씩 잡았다.
안주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먼저…….”
소예리 헌터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대다가 말했다.
“이렇게 밝혀지기 전에 내가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그 말에 우리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예리 헌터가 말을 이었다.
“나 지금까지, 여러분 속이고 있었어요.”
이걸 속인 거라고 봐야 하나? 난 잔을 기울이면서 생각했다.
내가 처음부터 알아온 사람은 소예리 헌터였다.
나와 신재헌 앞에 나타나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녀는 분명 자신을 소예리라고 했다.
주이안 헌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가 처음 소개받은 건 이진아가 아니라 소예리였다.
따지자면 속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옛날의 내가 싫었어요. 부끄럽고, 사방팔방 성질내고…… 어차피 곧 죽을 거니까 막 살아야지, 하면서 온갖 곳에 패악을 부렸거든요.”
소예리 헌터가 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헌터로 각성하고 나서 병이 씻은 듯이 사라진 거예요. 그러니까 덜컥 겁이 나는 거야. 그런 사람…… 누가 친해지고 싶어 하겠어요.”
소예리 헌터가 말한 ‘그런 사람’이 누군지는 뻔했다.
난 어린 날, 신재헌의 맞은편 침상에 앉아 있던 그녀를 기억했다.
별로 싫은 느낌은 아니었는데.
난 손을 번쩍 들어 주었다.
소예리 헌터는 날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유리 헌터님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지.”
곧 웃음이 잦아든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자신이 없었어요. 주이안 헌터님도, 신유리 헌터님도, 신재헌 헌터님도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데 나만 빛이 바래 버린 것 같아서. 억지로 반짝이는 껍질을 뒤집어쓴 것 같아서. 새로 살고 싶었어요.”
새로운 이름과 모습으로. 과거를 버린 채.
“……고맙다고 한 마디 못 한 게 후회스러워서 두 헌터님한테 다가왔는데, 그 말은 하지 못하게 된 거야. 난 이진아가 아니라 소예리니까.”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언젠가는 정체를 밝혀야지 했는데 점점 늦어졌어요. 이안 헌터님은 아예 사정을 모르시기도 했고, 두 분한테는 말하자니…….”
그녀가 흘끗 나와 신재헌을 보고는 말했다.
“결국 소예리로서 쌓아온 관계는 거짓이 되어버리잖아요. 신분부터 속여 버렸으니까. 밑바닥이 무너지면 모든 신뢰가 무너질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그녀가 옅게 웃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건데. 말해야 했는데.”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이진아예요. 늦게 말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우리 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미안하고, 고마웠어요. 정말로.”
그 말에 주이안 헌터가 소리없이 웃었다. 나와 신재헌의 눈이 마주쳤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린 어깨를 으쓱했다.
“십 년 지난 얘기 해서 뭐 해요, 어차피 지난 일인데.”
신재헌이 술병을 흔들면서 말했다. 아직 따지도 않은 병이었다.
“미안하면 원샷 콜?”
소예리 헌터는 그 말에 고민 없이 덥석 병을 가져갔다.
주이안 헌터가 당황했다.
“소예리 헌터님께는 만독불침이 없습니다.”
그러자 소예리 헌터는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마시는 거죠. SS급의 알코올 내성은 얼마나 되는가!”
그녀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내가 한번 실험해 볼게!”
“그걸 굳이…….”
실험할 필요가 있을까요?……라는 논리는 더 이상 펼쳐지지 못했다.
―팡!
뚜껑을 따 버린 소예리 헌터가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기 때문이었다.
“와, 라벨만 가리면 물병이라고 해도 믿겠다!”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꺄아아아!”
금세 병을 비운 소예리 헌터가 머리 위에 병을 털어 보였다. 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요? 느낌이 좀 와요?”
신재헌이 물었다. 그도 SS급의 알코올 내성은 좀 궁금했던 듯했다.
“으으음.”
소예리 헌터는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뭔가 올라오는데?”
“뭐가?”
우리가 동시에 물었다.
“설마 무지갯빛 아니죠?”
오로록 토하는 거 아니지?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웃었다.
“에이, 내가 술 먹고 토하는 아마추어처럼 보여요?”
그러면서 그녀가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와장창!
그리고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병은 깨져 나갔다.
“어머.”
놀란 주이안 헌터가 일어났지만 소예리 헌터의 손에는 생채기도 없었다.
SS급 손에 생채기 내는 병이면 그건 무기로 써야지.
난 주이안 헌터의 어깨를 눌러 앉혀 주었다.
그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소예리 헌터님 취한 것 같은데?”
“아냐, 이건 힘 조절 문제야. SS급 되고 나 천하장사 됐어요.”
소예리 헌터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 말을 신재헌이 받았다.
“그럼 전 병 건드리기만 해도 깨져야 하는데.”
그러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여봐라, 한 잔 따라보거라.”
“넌 손모가지가 없으신가요?”
내 말에 신재헌은 뻔뻔하게 대꾸했다.
“힘 조절 안 돼.”
난 그 말에 그의 잔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삭!
그리고 잔을 우그러뜨려버렸다. 내가 웃었다.
“나도 안 되는 듯?”
누굴 부려먹으려고! 신재헌은 졌다는 얼굴로 다른 병을 집었다.
“청소가 힘들 것 같습니다.”
주이안 헌터는 사방팔방 깨진 조각이 있는 테이블을 보면서 난감한 듯 웃었다.
“아니지롱.”
그때 소예리 헌터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마법진이 맺히더니, 유리조각만 떠올라 쓰레기통으로 처박혀 버렸다.
난 눈을 깜빡였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마법!”
뭐야, RP던전 나왔는데 어떻게 쓰는 거야?
“던전 보상으로 받았어요. 마법 사용 가능!”
그녀가 손끝으로 이리저리 불꽃을 움직여 보였다.
“대박인데?”
신스킬을 좋아하는 소예리 헌터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보상이 없을 것이다.
듣자 하니 신재헌은 ‘황가의 피’라는 패시브 스킬을 그대로 들고 나왔다고 했다.
병장기로 가하는 데미지가 무조건 30% 증가하는 개사기 패시브 스킬이었다.
그리고 주이안 헌터는.
“명계간섭이라는 스킬이 나왔습니다.”
이번엔 정말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L급 스킬인데, 죽은 사람에게만 쓸 수 있다고 나오―”
“오.”
“오.”
“오.”
우리 셋은 동시에 감탄했다. 설마?
“죽어도 살릴 수 있는 거예요?”
“페널티는?”
질문이 쏟아지자 주이안 헌터가 답했다.
“페널티는 ‘상황에 따라 다른 대가를 지불’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대가를 지불?
요컨대.
“이거 그거 아니에요? 헌터협회 채용공고에 쓰여 있는 거?”
난 허공에 네모를 그려 보이면서 말했다.
“연봉은 면접 후 결정.”
요컨대 짜게 주겠다! 대가는 X나 세게 받겠다!
“맞네.”
“그거네.”
신재헌과 소예리 헌터가 동시에 답했다. 주이안 헌터가 부정하지 않는 가운데 우린 만장일치로 결론 내렸다.
“그 스킬 봉인해.”
대가 같은 거 주지 마!
***
“소예리 헌터님, 그럼 이제 옛날 얘기 해줄 수 있어요?”
소예리 헌터님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 후에 마음이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다 괜찮다고 하더니, 자기는 십 년 전의 그 작은 한 마디 때문에 이렇게 앓고 있었을 줄이야.
바보다, 바보.
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물었다.
“옛날 얘기~?”
좀 들뜬 것 같은 소예리 헌터에게 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이진아 씨 얘기요.”
이제는 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녀가 과거를 감출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으음, 이진아 얘기란 말이죠.”
소예리 헌터는 목을 가다듬더니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로 학창시절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미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확실해져 버렸다.
“우리 사이에 모범생은 주이안 헌터님밖에 없었네요.”
수업시간 탈주와 수면이 일상이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모범생에게 쏠렸다.
주이안 헌터가 손을 내저었다.
“저도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예.”
주이안 헌터는 의외로 당당했다.
“무슨 일탈을 했는데요?”
주이안 헌터의 일탈? 이보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자 주이안 헌터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비밀입니다.”
그 말에 순순히 비밀로 해줄 사람이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어허, 감추지 말랬죠.”
“사실 교무실 가서 시험지 훔친 거 아니야?”
신재헌의 말에 주이안 헌터가 사레들려 버렸다.
“뭐야, 진짜야?”
나랑 소예리 헌터는 기겁했다. 하지만 주이안 헌터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도덕은 지켰습니다.”
그 말만 들어도 별 일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지?
학교 담장에 기대서 담배 피우기? 텀블러에 물 대신 술 가져오기?
갈군 끝에 나온 학생 주이안의 일탈은 이것이었다.
“친구 대신 자습시간에 대리 출석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우리 셋은 조용해졌다.
일탈? 이게 일탈?
난 머리를 잠시 굴려 보았다.
친구 대신 자습시간에 출석을 해 줬다? 이 말은?
“……원래 주이안 헌터님은 안 해도 될 자습을 대신 해줬다는 소리?”
“그렇죠.”
주이안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공부 더 했다는 뜻이잖아요.”
소예리 헌터가 깔끔하게 결론 내렸다.
“안 되겠네.”
“모범생 맞네.”
나와 신재헌이 말을 받자 주이안 헌터가 진짜 마음먹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까진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했는데?”
드디어 나오나? 우리가 눈을 반짝일 때였다.
주이안 헌터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자습시간에, 친구가 빌려준 소설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난 얼굴을 구겼다.
“일탈은 개뿔.”
그때 소예리 헌터가 날 진정시켰다.
“잠깐, 책 내용이 중요해요.”
내……용? 그러게? 나와 신재헌이 주이안 헌터를 빤히 돌아보았다.
“무슨 책 봤는데요?”
그러자 주이안 헌터가 말했다.
“‘인간에 대한 이타적 해석’이라는―”
난 답을 다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판 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