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SS+급?
하도 L급 던전에 시달렸더니 그나마 괜찮아 보일 지경이었다.
문제는.
“저 사람이 설마…….”
난 서서히 잦아드는 각성의 빛을 보다가 소예리 헌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예리 헌터는 가만히 병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난 눈을 크게 떴다.
그 언니가, 소예리 헌터였다고?
“……던전 클리어하면, 자세히 말해줄게요.”
결국 소예리 헌터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던전에서 감추고 싶었던 것이 저것인 모양인데.
궁금한 건 많았지만 난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과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
소예리 헌터를 제외한 세 명이 각자 실패를 한 덕에 능력치 저하가 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기억-소예리’니까 소예리 헌터…… 아니, 헷갈리니까 지금은 이진아라고 불러야겠다.
아무튼 이진아 헌터님을 지켜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A급 던전으로 발현됐을 곳이라 이진아 헌터님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SS+급 던전이면 잡스러운 몬스터 하나도 엄청난 데미지를 자랑할 테니, 우리가 그녀보다 앞장서서 이 던전을 쓸어 버려야 했다.
[잔상(SS+→L+) 스킬을 사용합니다.]
하도 L급에 시달려 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가 강해진 건지 몰라도 던전의 몬스터들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스릉!
물론 중간에 엄청난 절삭력을 자랑하는 의료용 메스가 떼 지어 몰려오는 바람에 긴장하긴 했지만.
―쿠콰콰쾅!
신재헌이 화염검을 휘둘러 모조리 날려 버리자 조용해졌다.
“…….”
우리는 긴장을 풀기 위해서라도 던전 이동 중에는 잡스러운 대화를 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모두가 조용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각자 다른 사람의 기억을 보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처럼.
모두가 많은 것을 봤지만, 하나같이 말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따지자면, 다른 사람이 숨겨놓은 비밀 일기장을 훔쳐본 꼴이니까.
“일단 과거의 소예리 헌터를 조심해야 하는 거죠?”
그래도 할 건 확실히 해야 했다.
현재의 소예리 헌터가 과거의 소예리 헌터와 마주치면 당연히 사망한다.
정확히는 과거의 소예리 헌터가 현재의 소예리 헌터를 보고 ‘내가 왜 둘이지?’ 하는 순간 망한다는―
“……아.”
난 잠깐 멈칫했다.
이진아는 현재 소예리 헌터와 완전히 다르게 생겼는데?
“아마 못 알아볼 거예요.”
소예리 헌터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래도 마주쳐서 좋을 것은 없을 겁니다.”
주이안 헌터가 말했다. 그건 그랬다. 언제 어떻게 그러는지는 몰라도, 이진아는 소예리 헌터의 모습으로 변할 테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언니가 갈 만한 방향은 다 쓸어야겠네.”
내 ‘언니’라는 호칭에 소예리 헌터가 흘끗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녀에게 시선을 줄 틈은 없었다.
―드르르르륵!
멀리서 환자를 옮길 때 쓰는 간이침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앙!
난 옆에 있는 막대기를 들어 침대 쪽으로 집어 던졌다.
[잔상(SS+→L+) 스킬을 사용합니다.]
[국소 범위 : 막대기(A)]
SS+급 던전이라지만 굴러다니는 막대기가 A급이라니 호화스러움 그 자체였다.
―콰직!
물론 그 덕에 데미지는 잘 들어갔다.
SS+급 던전 몬스터인 주제에 한 방에 뻗어버린 침대는 바닥에 축 늘어져 버렸다.
그렇게 우린 빠르게 전진해 나갔다.
“이 던전, 우리 오기 전에도 클리어해 봤어요?”
내가 주이안 헌터와 신재헌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먼저 들어와 있었으니 던전에 대한 정보는 있을 법했다.
“네. A급일 때 보스는 커다란 주사기였는데.”
그렇게 말하는 신재헌의 앞으로 그가 말한 것이 분명한 거대한 주사기 십수 대가 몰려왔다.
[화염검(SS)]
그의 상태창에서 스킬이 번쩍이더니, 말레티아의 검이 허공에 반원을 그렸다.
―화르르륵!
불꽃으로 만들어진 반원이 주사기를 덮쳤다.
―키이이익!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좀 이글거리는 주사기의 잔해뿐이었다.
그가 주사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잡몹이 된 걸 보면 이번엔 아닌 것 같네요.”
난이도가 높아졌으니 보스몹이 바뀔 법도 하지만…….
이전 랭크의 보스몹이 잡몹으로 변할 정도면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잡몹이 이렇게 시시하면 보스는 얼마나 센 거야?”
일반적으로 잡몹이 시시하면 보스 몬스터가 까다롭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게 내가 미래를 걱정하는 사이, 결국 우리는 던전의 최상층에 다다랐다.
[보스룸 : MRI룸에 진입합니다.]
MRI? 익숙할 정도로 많이 들어봤지만 자세한 의미는 모르는 낯선 단어가 나왔다.
하지만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기계를 보니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시끄러운 통돌이 아니야?”
드라마 같은 데서 본 듯?
저기 들어가려면 목걸이 해도 안 되고, 머리핀도 다 빼야 하고, 그거 아니야?
내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기이이잉!
우리를 발견한 문제의 통돌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BOSS : MRI기기(SS+)]
랭크는 다행히 SS+.
원래 SS급 보스만 돼도 긴장하는 게 보통인데 어쩌다가 SS+급 보스에 안심하게 됐지?
저거 메이든 부인이 L급 싸대기 한 대 갈기면 박살 나는 거 아니냐?
물론 쓸데없는 생각을 길게 할 틈은 없었다.
[걔>>> 풀버프 받고 들어갈게요]
보스 랭크가 높은 만큼 오프닝 데미지를 크게 주는 게 중요했다.
우리 셋이 주는 버프로 신재헌의 버프창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MRI기기는 눈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를 살펴보는 듯했다.
[육참골단(SS)]
그리고 신재헌의 스킬창에 마지막 버프가 생기는 순간.
그가 빠르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쿠콰콰콰쾅!
살벌한 굉음과 함께 보스전이 시작되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스몹은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정확히는 신재헌의 검이 오프닝을 내리꽂는 순간부터 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나도 S급이었기에 평소처럼 탱커와 딜러를 겸하는 자리에 섰고, 그 덕에 신재헌 역시도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잉!
신재헌이 MRI기기의 중심에 검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무언가에 미끄러진 것처럼 그의 검로가 비틀린 것이다.
“!”
신재헌은 검을 내리찍는 와중에도 빠르게 검로를 수정했지만 그래도 소용없었다.
―카가가각!
쿠콰쾅! 하는 굉음 사이로 울린 건 말레티아의 검이 MRI기기의 옆을 긁어내리는 소리였다.
[MRI기기(SS+) 95%]
오프닝 데미지를 맞고 95%라니 암울할 수밖에 없었다.
신재헌에 뒤이어 잔상을 감고 검을 내지른 나는 그가 왜 미끄러졌는지 알아챘다.
[자기장결계(L)]
놈의 주변에 묘하게 반투명한 기운이 어린다 싶더니, 이상한 버프가 뜨면서 내 검을 미끄러뜨렸던 것이다.
“근접해서 공격하기 힘들겠는데.”
신재헌은 잔상을 쓰는 나까지도 미끄러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곤란한 얼굴로 검을 다잡았다.
그때였다.
[MRI기기가 ‘자기장확장(L)’을 가합니다!]
―쿵!
[-220318]
[-102899]
[-190787]
이 보스는 아주 X랄맞은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놈이 자기장확장 스킬을 쓸 때마다 파티창의 체력이 훅훅 깎여나가는 게 보였다.
그것도 수십만씩.
[헌터 주이안(S) ‘야전병원(L)’ 스킬 준비 중]
결국 주이안 헌터의 머리 위로 야전병원이 떴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L급 치유스킬을 쓰면 주이안 헌터의 시력이 어떻게 될지 뻔했으니까.
하지만 힐을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럼 10분도 안 돼서 넷 다 사망한 채로 발견될 테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주이안 헌터가 시력을 잃기 전에 속전속결로 쳐야 한다!
[잔상(SS+→L+) 스킬을 사용합니다.]
[잔상(SS+→L+) 스킬을 사용합니다.]
[잔상(SS+→L+) 스킬을 사용합니다.]
……
나는 잔상이 수십 개 겹친 상태로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MRI기기가 ‘극성부여(L)’를 가합니다!]
“이건 또 뭐야!”
욕이 절로 나왔다.
[디버프 ‘N극(L)’ 효과를 받습니다!]
뭔 극? 눈을 크게 뜨는 사이 파티원의 디버프창에 일제히 스킬이 하나씩 추가되었다.
[주이안씨 – S급(힐러)
- 디버프 : 기억의 무게2(L) N극(L)]
[걔 – S급(딜러)
- 디버프 : 기억의 무게(L) S극(L)]
[예리언님 – S급(보조)
- 디버프 : N극(L)]
신재헌만 S극인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MRI기기가 ‘자성발현(L)’을 가합니다!]
―후욱!
주변으로 무형의 기가 퍼져 나갔다. 바깥에서 철그럭 소리가 났다.
뭔가 이 방으로 끌려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신재헌의 옆으로 아주 살짝 미끄러진 순간, 온몸이 그에게 끌려 들어갔다.
“!”
그건 신재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난 바깥쪽으로 뻗었던 검을 간신히 안쪽으로 꺾었다.
―챙!
내 검과 신재헌의 검이 부딪혔다.
“뭐야, N극하고 S극이라고 붙은 거야, 지금?”
뭐 이딴 스킬이―
따질 틈은 없었다.
[MRI기기가 ‘집중포화(L)’를 가합니다!]
찰싹 붙은 나와 신재헌의 머리 위로 잡스러운 물건이 떨어져 내렸다.
아까 ‘자성발현’ 스킬이 가해질 때 이 방으로 끌려 들어온 물건들이었다.
“!”
순간 시야가 그림자로 덮일 정도로 빼곡하게 많은 물건들이, 자성을 띠고 우리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뭉개버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