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마력석 광산 근처 저택.
나는 불새에게 답장을 받자마자 이곳으로 왔다.
이 만남은 공식적으로는 에델바이스 백작과 마탑주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공식이 어디 있어?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방음벽(S)]
소예리 헌터가 방음벽을 치자마자 우린 당연히 거칠 것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웬일로 전서구를 보냈어요?”
소예리 헌터가 가장 먼저 물은 건 이거였다.
난 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채팅창 요란하게 하기 싫어서요.”
그 말에 소예리 헌터가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안 해도 요란한데요?”
그건 그랬다. 시도 때도 없이 우스갯소리가 올라오는 것이 채팅창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지!’
그렇게 말했던 과거의 나 때문이었다!
보나마나 내가 방어 스킬 수련한다고 하면 신재헌이 놀려먹을 거라고!
물론 장난으로 놀리는 거겠지만.
……음, 그게 아니라도 그놈하고 단둘이 있는 게 좀…… 그랬다.
그렇다고 공격 스킬도 없는 주이안 헌터에게 부탁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소예리 헌터님한테만 슬쩍 연락했죠.”
내 사정을 들은 소예리 헌터는 배를 잡고 웃었다.
“요컨대 난 안 놀릴 것 같았다는 거죠!?”
그녀의 금안이 장난기로 빛났다.
서서설마!
“믿습니다, 언니!”
내가 대차게 외쳤다.
하지만 예쁘게 웃은 소예리 헌터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면서요~?”
“으아악!”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았다.
주이안 헌터에게 무기를 들려주는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몰라!
난 비명도 잠깐,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래, 어차피 스킬 수련은 해야 하잖아?
게다가 상대는 소예리 헌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예리 헌터라면 좀 더…… 진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도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은요.”
날 공격하려는 놈을 먼저 조져버리면 그게 최선의 방어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재차 머리를 긁적이자 소예리 헌터가 눈을 깜빡였다.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장난치다가도 경청해주는 게 소예리 헌터였다.
“근데 이번에 저택 던전 가보니까 뼈저리게 느껴지더라고요. 공격이 때로는 최선의 방어가 아닐 수도 있다고.”
물론 날 조지려는 놈을 먼저 조지는 선빵필승의 자세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던전처럼 그게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출현한다면?
물론 그런 경우가 잦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단 하나의 가능성에 걸려 다시 같은 위기에 처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는 S급 헌터라고 해도 결국 명줄은 하나다.
난 다시는 위험한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다시는 누군가의 뒤에서 보호받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이번 던전의 나처럼 랭크가 하락되었을 때에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힘을 더 키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공격만 할 수 있어서는 곤란했다.
공격도 방어도 보조도 할 수 있는 전천후 딜러가 되어야 했다.
“흐음.”
소예리 헌터는 내가 진지한 걸 알았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가 특별히!”
그러더니 눈을 찡긋하면서, 제 입술에 예쁜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하고 도와줄게요.”
헌터 채팅엔 말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난 두 손을 들고 외쳤다.
“예리 언니 만세!”
***
우리가 수련을 하러 간 곳은 마력석 광산 근처의 숲이었다.
[몬스터 출현. 출입금지]
그런 낡은 팻말이 붙어 있는 길을 지나온 참이었다.
팻말은 이미 누가 여러 번 치워봤는지 바닥에 대충 박혀 있었다.
게이트 사태가 시작되면서 제국 곳곳의 정찰 병력이 늘어나다 보니, 몬스터의 주요 활동지로 사람이 접근을 꺼렸던 곳도 들어가게 된 탓이 분명했다.
“이틀에 한 번은 사람이 와요.”
소예리 헌터도 내가 표지판을 보는 걸 알았는지 말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왔으니까, 적어도 오늘이랑 내일은 아무도 안 온다는 뜻!”
그녀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공격스킬 받아내다 보면 시끄러워질 텐데, 괜찮겠죠?”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몬스터들이 난리구나 할걸요?”
사실 몬스터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들이 설치는 거지만 원래 진실은 알면 괴로운 법이었다.
“이 정도면 연습할 만해요?”
소예리 헌터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산 중턱에 있는 공터였다.
주변은 숲이 울창한데 이곳만 나무들이 뜯겨 나간 듯 둥치만 남은 걸 보니 누군가 여기서 거하게 싸운 모양이었다.
“이 정도 공터면 괜찮을 것 같아요.”
어차피 땅이 고르길 기대하진 않았다.
발을 디딜 곳이 별로 없어 보였지만 그럴수록 좋았다.
내가 연습하는 스킬은 ‘흘려보내기(A)’와 ‘받아치기(C)’.
두 스킬과 다른 스킬을 이용해서 방어용 매크로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 같은 매크로 말이다…….
……물론 이름은 제대로 지을 것이다. 이번엔 꼭! 버터관자구이나 어쩌구문제냐 같은 괴상한 이름은 짓지 않겠다!
“이제부터 뭘 해주면 돼요?”
소예리 헌터가 물었다. 난 손을 펴 보였다.
“제가 저번에 잔상 스킬을 여러 번 겹쳐 쓰면서 ‘매크로’라는 걸 만들었거든요…….”
내 공격 스킬 매크로 설명에 소예리 헌터는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였다.
“시스템에 그런 기능도 있었구나. 나도 쓸 만한 조합이 있으려나?”
그녀가 스킬창을 뒤적이는 사이 내가 중요한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기능은 좋은데 매크로 이름은 한번 정하면 바꿀 수가 없더라고요.”
“이름?”
소예리 헌터가 눈을 깜빡였다. 난 순간 멈칫했다.
이…… 쪽팔리는 이름을 말해야 한단 말인가?
“이름이 왜요?”
하지만 소예리 헌터는 이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헌터넷 닉네임 ‘그따위로살았어야했냐’로 지은 사람 이야기도 못 들어 봤어!?
헌터넷은 자주 들어가지 않으면 복귀 이벤트를 했는데, 문제는 헌터넷 캐릭터 ‘헌티’가 친근감을 주겠다고 반말을 쓴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저 닉을 지은 사람은…….
[283일만이야, 그따위로살았어야했냐!]
헌티에게 팩트를 맞고 헌터넷 닉네임을 바꿨다고 했다.
이름이 이렇게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내 매크로 이름이 뭐다?
[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
쓸 때마다 현실자각타임 온다니까?
내가 아련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이번엔 이름 제대로 지으려고요.”
매크로 이름 설정창 딱 뜨는 순간 제대로 된 거 생각한다!
이러려면 미리 생각해 둬야 해!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턱을 매만졌다.
“이름 하면 소예리 작명소죠. 그건 나한테 맡겨요.”
“진짜?”
진짠가? 하긴 소예리 헌터가 집에 있는 화분마다 이름을 지어주긴 했다.
역시 작명은 많이 해본 사람한테 맡겨야 한다.
“응!”
소예리 헌터가 자신 있게 말했다.
“좋아요, 믿어 본다아!”
내가 검을 들었다.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었다.
“난 공격 스킬이 많이는 없지만, 공격을 날려 보내줄 수는 있어요.”
소예리 헌터가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끝에서 나오는 건 얼음 감옥 스킬의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었다.
―쓔웅!
“오.”
맨날 몬스터가 얻어맞는 모습이나 김천재 같은 애 길 막는 모습만 보다가 정면에서 보니까 좀 위협적이었다.
생각보다 빠른데?
[흘려보내기(A) 스킬을 사용합니다.]
[받아치기(C) 스킬을 사용합니다.]
―파직! 챙!
스킬을 사용해도 손에 전해져 오는 느낌이 묵직했다.
그래도 A급 돼서 그런가, 못 받아낼 정도는 아닌데?
“할 만해요?”
소예리 헌터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정도면 할 만하다!
그러자 소예리 헌터가 예쁘게 웃었다.
“그럼 진짜로 간다~!”
“봐준 거였냐!”
어쩐지 막기 쉽더라!
―쨍! 쩌저적!
곧 내 주변이 얼음 감옥 스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건 속도 없인 못 따라잡겠어!
[순간가속(SS) 스킬을 사용합니다.]
[잔상(SS+) 스킬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채팅창에 중요한 사실을 말하는 건 잊지 않았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수련중임다 놀라지마십쇼]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무슨 일]
쓰다가 끊긴 걸 보니 스킬창 올라오는 거 보고 바로 반응한 모양이었다.
어이구, 눈도 좋아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수련수련]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ㅇㅋ]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능청스러운 소예리 헌터의 채팅도 올라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맞아용~ 조심조심~]
그렇게 말하면서 내 눈앞으로는 얼음 감옥 스킬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와아악!
스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사이 서브 퀘스트가 떴다.
[서브 퀘스트 : 강해지는 길]
[새로운 기술을 익히세요.]
[보상 : FULL마력 +1%]
% 단위로 능력치를 퍼주는 건 이 던전 특징인가?
L급이라 그런지 인심이 좋네?
아무튼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미소 지은 내가 스킬을 사용했다.
[잔상(SS+) 스킬을 사용합니다.]
[받아치기(C) 스킬을 사용합니다.]
[흘려보내기(A) 스킬을 사용합니다.]
……
스킬 여러 개가 한 번에 중첩되면서 눈앞에 시스템창이 어지러이 떴다.
―쩡!
그리고 얼음 결정과 내 잔상이 부딪히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
“이렇게 까다로운 던전일 줄이야.”
한편, 신유리가 한창 수련하는 사이.
리카스 포를랭은 늪지 던전에서 간신히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와 동행한 에델바이스의 기사들은 비교적 멀쩡한 몰골이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머리에는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옷 역시 성한 데가 없었다.
신발이며 옷 안까지 흙이 안 들어간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에델바이스의 신입 기사들마저 그를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흐흠, 괜찮네.”
그는 애써 품위를 지켜 보려고 했지만, 말할 때마다 머리에서 떨어지는 말라비틀어진 진흙 덩어리 때문에 실패했다.
“프프픕.”
입 안으로 들어오려는 진흙 덩어리를 뱉어내며 그가 표정 관리를 하려 애썼다.
아무런 전조 증상도 없이 발아래가 갑자기 늪으로 변하질 않나, 심지어 자다가 깨 보니 침낭이 통째로 진흙에 잠겨 있질 않나!
정말 이 게이트는 최악 중 최악이었다.
“일단 씻고 세니아에게 보고하고 싶군.”
저택으로 돌아온 리카스가 말했다.
그러자 에델바이스 저택의 집사 헬렌은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자리를 비웠다고?”
리카스가 눈을 크게 떴다. 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동안 리카스 님을 잘 모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명은 사실인 듯 사용인들은 그에게 깍듯했다.
“그래? 멀리로 갔나?”
“아니요, 영지 내입니다. 마력석 광산에 계시는 마탑주님과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리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번에 간 김에 좀 쉬고 돌아왔으면 좋겠어. 세냐는 너무 바쁘게 일하거든.”
그렇게 걱정하는 척하면서 방으로 돌아온 리카스는, 사용인들을 물리고 나서 씩 미소 지었다.
드디어 때가 됐다.
세니아의 방을 뒤질 때가.
게다가 마탑주와 만나고 있다? 그렇다면 마탑주와 이야기를 나눈 기록이나 서류 같은 것이 분명 세니아의 방에 있을 터였다.
“네게 어떤 비밀이 있는지 낱낱이 밝혀주지.”
어떻게 단기간에 마탑은 물론 황가와 신전의 호의까지 얻었는지 말이야!
분명 증거는 문서로 남아있을 테니 이번이 절호의 기회다.
……라고, 헌터채팅의 존재를 알 리가 없는 리카스는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