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67)화 (167/218)

167화

“그래도 영지민들이 믿고 있는 건 저희 기사단뿐입니다.”

포를랭 선임기사들이 검을 들고 버티는 이유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주군께서도 영지민들의 피해를 좌시하지는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포를랭 기사들에게 마지막으로 충성심이 남아 있는 건, 포를랭 자작이 영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능력은 좀 떨어질지언정.

하지만 그것조차 얼마 안 있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디스 경, 주군께서 영지 외곽의 기사단을 불러들이라고 명하셨답니다.”

“뭐?”

이디스는 올라온 보고를 의아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원래 그 보고를 받았어야 했을 포를랭 기사단장은 벌써 사흘째 포를랭 저택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주군과 영지 경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이디스는 그 둘이 술만 진탕 퍼마시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던 참이었다.

근데 술 마시는 중에 갑자기 외곽 병력은 왜 불러들인단 말인가?

“게이트 빈발 지역은 어떻게 하고?”

그 말에 보고를 전하러 왔던 기사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병력이 산개해 있어 방어 확률이 낮으니, 차라리 병력을 좁은 지역에 집중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일부 지역 영지민들의 생명을 포기하라는 명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무슨…….”

이디스가 보고 받은 종이를 저도 모르게 구겨 버렸다.

일도 안 하는 주제에 권위의식에 찌든 포를랭의 기사단장이 알면 노발대발하겠지만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술 마시느라 보지도 않을 텐데.

그때 그가 있는 방에 조심스럽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저…… 이디스 경……?”

앳된 목소리의 주인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기사였다.

약한 자를 수호하겠다는 사명으로 눈이 반짝였던 이 신입기사 론의 눈에선 점점 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문 쪽을 돌아보니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민 론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면담이 혹시 가능할까요……?”

엄청나게 면담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이디스는 난색을 표했다.

“나한테는 면담 권한이 없는데.”

면담 권한이 있는 건 기사단장뿐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단장은 며칠째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이디스가 슬그머니 말을 바꾸었다.

공식 면담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 들어주는 것이라고 애써 생각하면서.

“감, 감사합니다!”

그제야 신입 기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신입 기사 때는 고민이 많은 법. 경험 많은 선임기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였다.

“무슨 일이지?”

이디스는 보고하던 기사를 손짓으로 내보내며 물었다.

그리고 그 기사가 나가기도 전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주군께서 에델바이스로 가는 물자를 약탈하라고 하셨다고?”

그 말에는 방을 나가던 기사마저 멈추고 이야기를 들었다.

“에델바이스의 것인 줄은 몰랐어요. 저희 가문의 물자를 뺏은 도적들을 잡으라고 하셔서……. 근데 거기에 에델바이스의 문양이 있었어요.”

요컨대 이미 약탈한 후에 알았다는 소리였다.

이디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울먹이는 신입 기사 론을 일단 다독인 이디스가 말했다.

“……일단 그 일은 너만 알고 있어. 알겠지?”

그러면서 보고하던 기사에게도 눈짓했다. 입을 닫으란 뜻이었다.

다행히 같이 있던 기사가 소위 ‘기사단장 줄’을 타지 않은, 입이 무거운 기사라 다행이었다.

“일단 다른 기사들을 만나봐야겠어.”

이디스가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그를 포함한 포를랭 선임기사들의 분위기는 가라앉고 있었다.

없는 충성심마저 사라지는 느낌이다.

이디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믿을 만한 기사에게 이 일을 전하고 이야기해볼 생각이었다.

그가 찾고자 하는 자는, 이제 백작이 된 세니아 영애에게 스쳐가듯 가르침을 받은 것만으로 큰 성장을 이룬 기사 중 하나, 밀리샤였다.

***

수련에 아주 작은 차질이 생겼다.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방어 보조 스킬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받아내는 스킬을 수련하겠다는 생각은 내가 생각해도 굿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B] [C] [B] [C] [C]

“…….”

우리 기사들의 랭크가 너무 아기자기하다는 사실이었다.

무울론! 다른 영지 가서 꿀릴 랭크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공격을 받아내 봐야 제대로 수련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도와달라고 채팅해 볼까?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 S급(힐러)]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일단 주이안 씨는 공격 스킬이 전혀 없으니 제외.

신재헌이나 소예리 헌터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해주기야 하겠지만, 바쁠 텐데.

내가 고민할 때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살려줘!]

별안간 소예리 헌터가 구조요청을 해 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씨)>>> 소예리 헌터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소예리 헌터의 상태창으로 향했다.

아무 변화도 없는데? 무슨 일이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너 무 지 루 해]

이 사람이 ‘히 든 루 트 개 방’ 이후로 맛이 들렸나!

난 발끈할 뻔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놀랐잖아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하지만 들어보세요 얘네 한국에선 칠십오만육천이백삼십구년 전에 끝난 연구에 유레카거리면서 밤샘연구하고있다구요]

75만 뭐? 아무튼 우리 세계에서는 한참 옛날에 끝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안 졸리겠어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연구는 최신판도 졸려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떼잉]

어휴, 이 장난꾸러기를 그냥!

그래도 나름 희소식이었다. 요컨대, 소예리 헌터는 지금 심심할 정도로 할 짓이 없다는 거지?

“헬렌.”

설렁줄을 잡아당긴 난 헬렌에게 손짓했다.

“마력석 광산에 계신 마탑주님께 전서구를 보내. 잠시 긴히 상의드릴 것이 있다고 말이야.”

헌터채팅으로 가겠다고 말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주이안 씨나 신재헌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주이안 씨는 공격스킬이 없어서 못 도와준다며 미안해할 거고, 신재헌 그놈은……!

난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놈의 재앙의 주둥아리 때문에 안 돼! 아무튼 그거 때문에 안 돼!

여하튼 그런 이유로 내 저택에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같은 영지인 만큼 마탑의 불새가 답장을 들고 돌아오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동제국 황성 지하에 대해 알아보던 건 어떻게 됐지?”

신재헌이 물었다.

황제의 질문에 황가의 정보원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위치가 위치인지라 시간이 소요되는 듯합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신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원이 소리 없이 한숨을 돌리는 게 보였다.

아무리 그가 폭군이라는 설정을 해 놨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한 것을 억지로 해 오라고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 제한을 걸어 봐야 결과물이 날림이 될 뿐이라는 걸, 지금껏 학교 수행평가로 시달려본 신재헌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X발, 종이로 이걸 왜 만들어? 요즘 3D프린터도 있다는데 그냥 뽑으면 안 되냐?’

‘단가가 안 맞잖아, 단가가.’

……물론 시달린 건 미술시간에 3D공예를 하던 신유리였고, 신재헌은 그 옆에서 진작 다 과제를 끝내고 노는 쪽이었다.

십여 년 전을 생각하던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신유리.

그녀의 생각을 하니 한층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뭔가 있긴 한가 보지?”

그래도 중요한 걸 넘어갈 순 없었다.

동제국의 마법사들이 죽기 전에 이구동성으로 외친 ‘동제국 황성 지하’.

그는 그곳에 진짜 무언가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들이 이 상황을 봤다면 ‘아니, 거짓말했다간 죽을 마당에 거짓말하겠습니까!?’ 하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따졌겠지만 신재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을 위협을 받으면서도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그는 고민 하나 없이 ‘예’라 답할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살아남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것이 있거든.

‘내가 죽어도 좋으니.’

그 말로 시작하는 간절한 마음을 수도 없이 가져보았기 때문에 알았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살았으면 좋겠어.

마법사들에게 그런 간절함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랬다고 한들 신재헌은 이해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세계는 오래전부터 한 사람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기에.

그녀의 세계 밖의 것들이 어떤 소망을 갖든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알았다.”

신재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움직임 있으면 보고하고, 혹시 지하에 있는 게 몬스터나 게이트에 관련된 거라면…….”

그는 죽은 마법사들이 준 정보를 생각하며 말했다.

“―먼저 처리한 후에 보고해도 상관없다.”

그 말에 정보원이 멈칫했다.

뭔가 있다고 자신하시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속이 보였다.

굳이 답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신재헌은 손짓으로 정보원을 내보냈다.

“…….”

벌써 이 던전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나타나는 게이트의 난이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으니.

이 게이트의 목표는 ‘대륙의 멸망을 막아라’. 기한은 1년.

분명 멸망에 준하는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커다란 게이트의 형태로 닥쳐오겠지.

그 형태가 무엇이든 소예리 헌터의 멸망계시록이 먼저 반응하겠지만, 그는 그것만 믿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어떤 변수가 생기든 막아낼 것이다.

반드시 이 던전을 ‘안전하게’ 탈출해야 했다.

……최대한 전투를 피하면서.

“…….”

그가 주이안을 생각하다가 복잡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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