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우리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미묘한 위치인 황가의 별장에 모인 건 그날 오후였다.
친할 리가 없는 교황-황제-마탑주가 함께 던전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소문날 거리는 충분했으므로 따라붙는 이들은 적당히 돌려보내야 했다.
셋이 뒤풀이를 하러 간다는 소문까지 나면 심히 곤란할 테니.
“세 분께서 부상이 심하셔서요.”
그리고 그건 이 세계의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교황님이 맡았다.
“근데 어떻게 세 분이 이 던전에서 나오시게 된 건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의문을 가진 마법사의 말에는 마탑주 클로나 에이센이 활약했다.
“멀리서 관측했는데 게이트의 마력 수준이 심상치 않았어요. 그래서 몰래 연락을 드렸고요.”
그 말만으로도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역시 마탑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수호기사단장인 나는 본의 아니게 세 사람을 모시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XX…….
물론 그것도 저택에 들어올 때까지만이었다.
―달칵.
우리 넷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쫓아내자, 넓은 저택엔 우리만 남게 되었다.
“사용인들은?”
근데 보통 이런 크기의 저택에는 집사부터 하인까지 줄줄이 달려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말에 저택의 주인 신재헌이 간단히 답했다.
“다 나가라고 했죠.”
대체 언제???
하지만 사람들이 있는 것보단 나았다.
“그럼 일단 결계 설치부터 하고…….”
소예리 헌터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몬스터가 튀어나와서 저택을 박살 낼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마음 놓고 페널티를 피해 놀려면 사람들이 우릴 봐서는 곤란했다.
―촤륵!
그 사이 나와 신재헌은 저택의 커튼을 치려고 했다.
“가만히.”
하지만 주이안 헌터의 엄격한 목소리에 곱게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던전에서 제일 무서운 건 던전 끝난 후에 만나는 힐러가 아닐까?
그러는 사이 우리 대신 커튼을 다 치고 돌아온 주이안 헌터는, 다짜고짜 신재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돌려주세요. 신재헌 헌터님.”
이 갑작스러운 채무관계는 뭔가 했더니 주이안 헌터의 시선은 신재헌의 손에 못 박혀 있었다.
아하, 장갑?
“……아니, 까먹으셨을 줄 알았는데.”
신재헌은 아쉬운 듯 장갑을 빼려고 했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근데 치료받고 드리면 안 됩니까?”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주이안 헌터를 보았다.
어지간하면 줬을 텐데, 저러는 이유가 있을 터다.
안 아픈 척하지만, 아니 지금은 저 장갑이 주는 투쟁의 의지 버프 때문에 통증이 안 느껴지겠지만.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간혹 신재헌의 상태창이 번쩍이면서 체력이 닳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치료가 끝나면 꼭 돌려주셔야 합니다.”
주이안 헌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 주이안(S)’이 ‘진단(S)’ 스킬을 사용합니다…….]
[진단 완료.]
진단 스킬 결과를 봤는지 주이안 헌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헌터 주이안(S)’이 진단 결과를 공유합니다 : 치료 불가]
신재헌의 진단결과였다.
이러면 일반적인 집중치료 스킬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멈칫하는 내게도 진단 스킬이 들어왔다.
[‘헌터 주이안(S)’이 ‘진단(S)’ 스킬을 사용합니다…….]
[진단 완료.]
[‘헌터 주이안(S)’이 진단 결과를 공유합니다 : 치료 불가]
근데 나도 꼬라지는 마찬가지였다.
지켜보던 소예리 헌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딜러들 다진 고기 돼서 왔네.”
“고기가 움직이는 것 봤습니까?”
신재헌이 투덜거렸지만 소예리 헌터는 그의 손에 낀 장갑을 가리켰다.
“다진 고기도 움직이게 하는 마법의 장갑이 있잖아요.”
“그건…….”
신재헌이 뭐라고 하려는 때였다.
“가만히.”
우린 주이안 씨의 매서운(?) 눈길을 따라 그의 특급 침대에 나란히 눕혀졌다.
[헌터 주이안(S) ‘야전병원(L)’ 설치 준비도 : 7%]
“어어?”
메이든 부인하고 싸울 때도 쓰더니 이번에도?
우리가 나란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소예리 헌터가 우리의 이마를 눌러 버렸다.
“안 돼. 아플 땐 치료 받아요.”
“주이안 헌터님 아까도 야전병원 많이 썼어요.”
더 쓰면 스탯이 얼마나 깎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자 주이안 헌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이 다치셨으니 어쩔 수 없죠.”
그 말에 나와 신재헌은 동시에 머리를 싸맸다.
차라리 욕을 해―!
어디서 이렇게 처맞고 왔냐고 욕을 박으라고―!
안타까운 눈으로 자책하지 마―!
“아아알았어요.”
이렇게 된 이상 그가 야전병원 스킬을 최소한으로 쓰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헌터 주이안(S)’의 ‘야전병원(L)’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받는 치유 스킬의 효과가 폭증합니다.]
[헌터 주이안(S) ‘집중치료(SS+→L+)’ 스킬 준비 중]
주이안 헌터의 얼굴이 스킬에서 나오는 새하얀 빛에 창백해진 것 같았다.
욕도 못하는 우리 힐러님 고생시키는 건 죄였다.
***
야전병원 스킬은 과연 대단했다.
대체 어느 동네 야전병원이 도심 한가운데 최고급 헌터병원보다 시설이 좋은지 알 수 없었지만, 효과는 그야말로 확실했던 것이다.
야전병원으로 L+급이 된 집중치료 스킬과 함께 치유 스킬이 쏟아지자 최상의 컨디션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물론 정신적으로 지친 거야 어쩔 수 없었지만, 몸 상태만큼은 그랬다.
“후우.”
그리고 그건 주이안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야전병원 스킬은 스킬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치유 스킬 효과를 공유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주이안 헌터는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뒤풀이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혹시 내상이 있을지도 모르니.”
―탁탁탁.
우리 앞에 공포의 ‘특단의 조치’ 수프 세 그릇이 놓였다.
“저는 왜요?”
소예리 헌터가 억울한 얼굴로 물었다.
주이안 씨는 잠시 소예리 헌터를 보다가 반 박자 늦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요.”
그녀가 죽다 살아났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내기도 싫은 것이 분명했다.
소예리 헌터가 입을 비죽거렸다.
“으으윽.”
야전병원까지 쓴 주이안 헌터 앞에서 그걸 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한 모금만으로 푸른 산천이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 수프를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윽.”
맞을 일 별로 없는 보조계라 특단의 조치 내성이 별로 없는 소예리 헌터는 원샷을 하지 못하고 수프 그릇을 내려놓았다.
쯧쯧, 끊어 먹을수록 더 고통스러운 법이거늘.
내가 혀를 찰 때였다.
소예리 헌터가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외쳤다.
“A급 신유리를 위하여!”
“푸웁.”
축하가 쏟아졌지만 시작부터 S급이었던 내가 A급이 된 걸 축하받는 건 매우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덕분에 수프 원샷에 실패한 난 오만상을 써야 했다.
물론, 고마웠다.
***
저택의 손님(SS) 던전 보상은 과연 끝내줬다.
각자 애장품 보너스와 능력치 보너스를 받은 건 물론이고 개인적으로 보상을 하나씩 더 받았다고 했다.
주이안 헌터는 치유 계열 스킬 보너스를 주는 브로치를, 신재헌은 공격 스킬 보너스를 주는 검 장식을 받았다고 했다.
덕분에 말레티아의 검에는 짤랑짤랑 술 같은 것이 달리게 되었다.
원래도 투박하게 생긴 검은 아니었지만, 붉은 검신에 검은 손잡이를 가진 검에 금빛과 붉은빛이 어우러진 술이 더해지자 한층 더 화려해 보였다.
나야 말할 것도 없이 랭크업이었고, 문제는 소예리 헌터의 보상이었다.
“내가 아까부터 이 얘기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소예리 헌터가 스킬 하나를 공유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회귀(SS) : 특정 범위 내의 시간을 원하는 시점으로 되돌린다. 넓은 범위에 사용할수록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 적어진다. (‘시간의 힘’ 100 소모)]
난 설명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게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에요?”
“맞아요! 클리어 표시 떴다!”
소예리 헌터가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근데 시간의 힘이란 건……?”
주이안 헌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육포를 먹던 신재헌도 씹는 것을 잊은 채 소예리 헌터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펼쳐 보였다.
“이거 생각나요?”
그러면서 보여준 건 내가 언젠가 그녀에게 맡겼던 ‘뒤틀린 나무의 심장’이었다.
미감정으로 떴던 아이템.
“아, 설마?”
“그게 뭔데요?”
물론 그 물건을 처음 보는 신재헌과 주이안 헌터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저번에 숲 던전 갔다가 받은 건데 미감정이라고 떴거든요. 그래서 소예리 헌터님이 감정해봤는데도 아직 감정할 수 없다고 떴어요.”
“‘아직’?”
신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게 지금은 감정이 되더라고요!”
역시 감정을 위해서는 선행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 경우는 회귀(SS) 스킬을 가지는 것이었겠지.
분명 그 던전이 C급이었던 것 같은데, C급 던전 보상치고는 버릇없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의 힘이 뭐냐면, 이런 것처럼 ‘흘러간 시간을 나타내는’ 물건을 부수면 시간의 힘을 모을 수 있대요.”
그녀가 심장을 던졌다 받아 보였다.
“그래서 시간의 힘 얻으면 어떻게 되나 싶어서 이렇게 모이길 기다렸지이.”
들뜬 소예리 헌터가 뒤틀린 나무의 심장을 집게손가락으로 잡았다.
나무의 크기에 비해 작은 심장은 그녀의 손가락에 앙증맞게 잡혔다.
“얍.”
―파삭!
그녀의 손에서 심장이 박살 나는 순간.
―파앗!
심장이 있던 곳에서, 소예리 헌터의 눈동자처럼 밝은 금빛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