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동제국 마법사가 낸 계획은 이러했다.
“어차피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우리만 알고 있지 않소?”
그러면서 다른 마법사와 기사와 눈을 마주쳤다.
불과 한 층 아래에서 수작 부리던 동료가 한 명 죽었지만, 어차피 그들에게는 동료애도 별로 없었다.
처음부터 팀으로 엮였던 사이도 아니고, 심지어 그 마법사와는 같은 마법학파 소속도 아니었다.
같이 나가 봐야 명예를 나눠 가질 경쟁자일 뿐.
그러니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똑같이 되지 말아야지, 할 뿐이었다. 게다가.
“메이든 부인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되지 않겠소?”
마법사가 눈을 빛냈다.
“어차피 이곳은 저택! 그러니 마탑주는 크게 활약하지 못할 것이오.”
이번 대 서제국의 마탑주 클로나 에이센이 큰 규모의 파괴적 마법에 조예가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다는 건 소규모의 마법에는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뜻.
다시 말해 이 저택을 날려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마탑주가 주로 사용하는 마법의 대부분이 묶여 버린다는 소리였다.
마법으로 저택을 날려 버렸다간 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에 실패할 테니까.
그럼 강력한 몬스터가 산재해 있는 이 게이트의 존재들이 몰려와 동서제국 사람을 막론하고 도륙해 버릴 것이다.
물론 서제국의 교황과 황제, 마탑주가 일반적인 실력을 가진 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게이트에 들어와 괴물로 변한 마부에게서 간신히 도망친 순간.
그리고 그 괴물을 부채질 한 번으로 날려버린 메이든 부인을 본 순간.
그들은 이 게이트의 존재들이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힘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기서 잘못 보이면 뼈도 못 추린다!
3층에서 죽은 그자처럼!
“그렇소이다. 게다가 넷 중 한 명은 보다 쉽게 상대할 수 있지 않겠소?”
다른 마법사가 말을 받았다.
그가 말한 건 수호기사단장이었다.
검 실력이야 기본적으로 있겠지만, 그거야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수호기사단장이라면 제가 막을 수 있소.”
기사가 호언장담했다.
어차피 이 계획에서 빠질 수 없다면 중요한 역할이라도 해서 나중에 좋은 평가를 듣는 게 나았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교황과 황제였다.
“교황은 검을 못 쓴다고 들었소이다.”
처음 입을 열었던 마법사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는 온화한 성정으로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좀 오래된 정보였지만 그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근데 최근에 이단심문관도 풀었다던데…….”
그나마 소식이 밝은 기사가 말했지만 마법사들은 이구동성으로 기각했다.
“그야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
“서제국은 늘 저 셋이 싸우느라 자신을 깎아 먹는 멍청한 이들이 아니오!?”
빠르게 합리화를 마친 마법사들이 결론 내렸다.
“황제만 발을 묶으면 되겠소이다.”
문제는 그 황제도 엄청난 실력자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황제도 검을 제대로 휘두르면서 싸웠다간 저택이 무너지기 십상.
제대로 활약하지 못할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황제는 붉은 대검을 쓴다고 들었소이다. 함부로 휘둘렀다간 벽이 부서질 테니 몸을 사리지 않겠소?”
“그…….”
기사는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보통 대검을 쓰는 자들은 움직임이 투박하다고 오해를 많이 받았지만 기사는 알았다.
오히려 동작을 크게 해야 하는 대검을 다룰 때일수록 자신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조절하는 데에 신경 쓴다는 사실을.
“뭐 할 말 있소?”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미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퉁명스럽게 돌아오는 말에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럼 계획을 세워 봅시다!”
마법사들이 눈을 반짝였다.
기사는 그들을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나씩 제거할 생각이라면 보나마나 잠입 계획일 텐데, 마법사들이 그런 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계획은 기사가 듣기엔 정말 말도 안 되는 길로 가고 있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입니다!”
“옳소!”
옳긴 뭐가 옳아! 기사는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어차피 우린 경고도 2회입니다. 선물을 제대로 준비 못 해서 죽나, 저쪽하고 붙어서 죽나 그게 그거라 이 말이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기사는 경고 1회였다.
“저쪽에서 뭔가를 준비한다는 것 같으니, 재빨리 훔쳐서 서재로 향하는 겁니다. 죽일 필요도 없어요. 발만 묶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마법사들이 결연한 얼굴로 서로의 손을 잡았다.
***
신재헌은 빠르게 그림을 그려 나갔다.
“이거 시간이 언제까지죠?”
물론 마감 시간(?)을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물을 늦게 준비하면 곤란하니까.
“오늘 자정까지예요.”
소예리 헌터가 말을 받았다.
귀족답게 밤에 움직이는 건지 메이든 부인은 자정에 뵙겠다는 말을 전해 온 참이었다.
“시간이 많이 없는데.”
벌써 바깥은 어두워져 있었다.
곤란하다는 표정과는 다르게 그림은 빠르게 디테일을 갖춰가고 있었다.
선 몇 개로 그어진 주이안의 인상이 색이 칠해지면서 점점 입체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펼쳐진 풍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창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흔들리는 나무들에 점점 생동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와아…….”
소예리 헌터가 눈을 반짝였다.
나도 새삼 신기하게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한두 번 본 건 아니지만 매번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사람이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지?
“디테일이 좀 떨어질 것 같은데요. 괜찮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신재헌이 보기에는 제 그림이 어딘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뭐가 이상한데? 뭐가 부족한데? 여기서 더 디테일을 줘야 돼?
“주이안 헌터님, 이제 쉬셔도 돼요.”
신재헌은 주이안 씨에게 손짓했다. 그건 벌써 다섯 번째 손짓이었다.
“정말입니까? 다시 이 자세를 잡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정말입니다. 진짜. 내가 다시 잡으라고 하면 말레티아의 검 넘길게요.”
신재헌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주이안 헌터님은 날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으냐는 듯이.
아니, 움직이지 말라고 그렇게 굳어 있을 일이야? 그쪽도 S급 코어근육 자랑하세요?
“땡!”
난 결국 주이안 헌터에게 다가가 그를 팡 때려주었다.
그제야 주이안 씨가 몸을 바로 세웠다.
S급답게 몇 시간 정도 같은 자세로 서 있는다고 담이 오진 않아서, 그는 자연스럽게 걸어 신재헌 옆으로 다가갔다.
“부인이 선물을 좋아했으면 좋겠군요.”
그의 말에 난 신재헌의 그림을 가리켰다.
“좋아할 만한 그림이에요.”
주이안 씨는 캔버스에 담긴 자신의 모습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하긴, 신재헌 헌터님의 작품이니까요.”
몇 번이고 봐도 신기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우리 셋의 시선은 캔버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캔버스 뚫어지겠어요.”
신재헌이 멈칫할 정도였지만 우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좀 곤란한 얼굴이더니 제대로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도 던전에서 그림을 그리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후.
그림을 완성한 그가 바람이 부는 곳에 그림을 내다 놓았다.
그리고 캔버스가 날아가지 않도록 이젤과 함께 잘 고정했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 거의 다 마르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신재헌이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역시 이쪽도 S급 코어근육답게 기지개를 켜도 우두둑 소리 한번 안 났다.
그니까 나도 저런 코어근육이 있었는데요? 없어졌습니다.
아오!
A급만 돼도 지금과는 몸 상태가 확연히 다를 텐데. 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잠시 쉴까요?”
주이안 헌터님은 언제 옆방으로 들어갔는지 방 안에서 우릴 향해 손짓했다.
안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대체 언제?
“일단 자정까지는 자유시간인 것 같으니까…….”
소예리 헌터가 밝은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섰다.
신재헌과 나도 고맙다는 뜻으로 인사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회의도 하면 좋겠어요. 어쨌든 보스 한 명은 처리해야 할 것 같으니까.”
내 말에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각자 자리를 하나씩 잡고 앉자, 난 호감도 수치를 확인했다.
[리펜 드 메이든 : +55]
이쪽은 이렇게만 유지된다면 보스로 변화할 일은 없다.
호감도창이 처음 떴을 때 나왔던 설명은, 호감도가 –50 이하일 경우 L급 보스로 변화, 호감도가 –49~+49일 경우 SS급 보스로 변화였으니까.
+50 이상부터는 보스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숨 돌린 셈이었다.
“문제는 메이든 부인이네요.”
주이안 헌터가 입을 열었다.
[메이든 부인 : -30]
이쪽은 이대로면 꼼짝없이 SS급 보스로 변할 터였다.
그리고 이 던전이 SS급의 탈을 쓴 L급 난이도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재앙이 터질 것이다.
“어떻게 점수 딸 방법 없나?”
난 턱을 매만졌다.
“이번에 그림으로 딸 수 있지 않을까요~?”
소예리 헌터가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점수 딸 만한 그림이기는 했다.
하지만 신재헌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80점을 줄 것 같진 않아요.”
하긴 그렇게 점수가 후한 부인은 아니었다.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를 80은 높여야 부인의 보스화를 막을 수 있는데.
끄응.
결국 잡을 수밖에 없나.
“L급 보스를 잡아……?”
그것도 한 명은 B급인 상태에서?
보상은…… 기깔나게 주겠네…….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난 이마를 짚었다.
“일단 부인이 사용할 만한 스킬 생각해봤는데요. 아까 보니까…….”
신재헌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을 이었다.
“마법 쓰는 데에 익숙해 보이더라고요. 특히 위치를 이동시키거나 특수공간에 가두는 것.”
부연설명은 필요 없었다. 3층 연회장에서 실컷 봤으니까.
“힘도 장난 아니게 셀걸요?”
소예리 헌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자기 이마를 가리켰다.
“전에 딱콩 맞았던 데가 아직도 아린 것 같아.”
그게 메이든 부인이 직접 때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디버프로 인한 조건부 데미지가 강하게 들어올 정도라면, 이 던전의 보스가 직접 타격할 경우 데미지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일 것이다.
“그것도 그건데.”
난 두 사람의 말을 받았다.
딜러의 느낌이 딱 온다! 본능을 무시하지 마라! 이건!
“몬스터 엄청 소환할 것 같아.”
내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탄식했다.
“아…….”
하지만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집사부터 온갖 아랫사람들을 다 불러들이지 않을까?
여긴 SS급 던전인 데다 난이도가 한 단계 높아지기까지 했으니, 사실상 SS급의 몬스터가 몰려온다는 뜻이었다.
첩첩산중이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이마를 칠 때였다.
“……?”
문득 소예리 헌터가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신재헌과 주이안 헌터가 문을 돌아보았다.
“어?”
그리고 나도 분명히 느꼈다.
우리의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쳐진 소예리 헌터의 방음벽 너머.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막지 않는 스킬인 만큼 바깥의 소리는 그대로 우리 귀에 들어왔다.
―사락.
그리고 그건 옷 스치는 소리…… 인기척이었다.
누구지?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