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메이든 부인은 리펜이 그림 연습하길 원했거든요.”
물론 리펜이 크레파스로 그리던 그림을 원하진 않을 터였다.
고오급지게 그린 것이겠지.
그리고 그 고오급진 그림 실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귀족가에서 벽을 장식하기 위해 그림을 걸어놓는 건 흔한 일이 아닌가?
흔하다는 건 그만큼 귀족가의 일원들이 그림 보는 안목이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림과 가까운 삶을 산다는 뜻이다.
물론 벽에 다는 건 전문 화가를 불러서 그렸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림 그리는 취미를 가진 귀족들은 많았다.
우리가 빠진 RP던전만 해도 그랬다.
서제국이 아무리 검에 미쳐 있다지만 예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며 의견을 나누는 살롱도 심심찮게 열렸다.
거기에서 그리는 그림이 모두 ‘화려한 검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기사들의 모습’이라는 건 잠시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이런 검에 미치고 팔짝 뛰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아무튼 이 동네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든 부인이 리펜에게 그림 그리기를 종용했던 걸 보면 십중팔구는 그런 문화가 있을 법했다.
“저보고 그리라고요?”
의견을 다 들은 신재헌이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준비할 만한 다른 선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주이안 씨가 의견을 얹었다.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맞아, 고급 아이템 같은 걸 원하는 것도 아닐 테고요.”
고급 아이템이야 세 S급의 인벤토리에 널렸을 테니, 차라리 그쪽이었으면 던전이 쉽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놈의 교오오오양을 그냥!
“아무래도 도구가 없어서 제대로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신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장인은 도구를 안 가린다잖아요.”
내 말에 신재헌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저는 장인 쪽은 아니라서. 차라리 몬스터를 별 모양으로 깎아 오라면 도구는 안 따지겠는데.”
그럼 그건 장인이냐?
S급 딜러면 장인…… 맞지…….
신재헌은 헛소리를 하면서도 설렁줄을 잡아당겨 하녀를 불렀다.
“그림 그릴 때 쓸 도구가 준비된 게 있나?”
“물론입니다.”
하녀는 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재미없어 보이는’ 주이안 헌터님에 이어, 신재헌은 ‘그림 같은 건 안 그릴 것 같은’ 관상으로 낙인찍힌 모양이었다.
얼마 안 있어 하녀는 몇 가지 그림 도구와 함께 캔버스를 가져다주었다.
“어디서 그리죠?”
신재헌이 연필을 든 채 고민했다.
“방 안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소예리 헌터는 곧바로 의견을 냈다.
“원래 조명이 좋아야 좋은 그림이 나오죠!”
그건 사진 아닌가?
내가 볼을 긁적이는 사이 소예리 헌터가 다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림 좀 그리고 싶은데, 돌아다녀도 되지?”
그 말에 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주인께서 자유롭게 쉬실 수 있도록 배려하라 명하셨습니다.”
자유롭게 쉬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선물을 준비하라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허락은 받았다.
“근데 리펜한테 들은 거 생각해보면 인물화를 원하는 것 같았어요.”
난 방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주이안 씨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 저택의 사람을 그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사용인들을 그릴 수도 없고, 리펜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데다가 메이든 부인이 모델을 서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우리 중 하나가 모델이 되면 되겠네요.”
난 소예리 헌터와 주이안 헌터를 번갈아 보았다. 신재헌은 그림을 그릴 거니까 당연히 제외였다.
자, 여기서 문제.
우리 중 메이든 부인의 취향으로 생겨먹은 얼굴은?
주이안 헌터는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소예리 헌터와 내 시선은 주이안 헌터에게 쏠렸다.
“우리 중엔 주이안 헌터님이지~”
소예리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주이안 씨가 멈칫했다.
“예?”
암만 봐도 활동적으로 보이는 나나 소예리 헌터를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주이안 씨, 믿습니다!
“문제는 메이든에 선물하는 거니까, 주이안 헌터님만 나오면 안 될 거 같거든요?”
신재헌이 의견을 냈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모델의 운명에 당황한 주이안 헌터를 끌고 4층을 돌아다녔다.
경계는 충분히 했지만 4층엔 정말 수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방해 안 할 테니 고오급 선물이나 준비하라는 뜻인지는 메이든 부인만 알 터였다.
“오, 여기 좋다!”
이내 우리가 발견한 곳은 넓은 방이었다.
바깥으로 향하는 외벽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방이었다.
그 문을 밀고 나가면 널찍한 베란다도 있었다.
그 너머로는 잘 관리된 메이든 가의 정원과, 멀리 흐르는 작은 강 같은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괜찮네요.”
신재헌이 자리를 잡는 사이 주이안 헌터도 어색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베란다로 나간 그는 우리 쪽을 본 채 똑바로 섰다.
“……이렇게 서 있으면 될까요?”
신재헌은 연필을 잡은 채 주이안 헌터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증명사진 전문은 아닌데.”
그의 실없는 농담에 주이안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델은 처음이라서요.”
“바깥을 자연스럽게 쳐다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 중 유일하게 모델 경험이 있는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그러자 주이안 헌터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얼굴 하나 안 보이도록, 완벽하게.
소예리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힐러님은 뒷모습도 잘생겼어요!”
이 사람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와 신재헌도 웃음 참기 챌린지에 돌입한 지 오래였다.
소예리 헌터의 웃음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는지 주이안 씨가 다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럼 어떻게…….”
정말 감도 안 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 사람은 사진 찍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필 막 찍어도 잘 나오는 얼굴을 가지는 바람에 미디어에 실리는 사진은 예술이었지만, 그 사진 중에 단 하나도 주이안 씨가 마음먹고 포즈를 잡은 사진은 없었다.
결국 내가 코치로 나섰다.
“봐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난 주이안 헌터에게 뛰어가서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한쪽 팔을 난간에 걸친 채, 살짝 몸을 틀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신재헌한테 얼굴이 보일 정도로만.
“이렇게.”
주이안 씨는 날 보다가 슬그머니 포즈를 잡아 보았다.
“이렇게 서 있으면 됩니까?”
하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이…… 블록 장난감 인간 같은 뻣뻣함은 뭐지?
“봐요. 이렇게 신재헌 헌터님을 보다가.”
난 신재헌을 보다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밖에서 갑자기 소예리 헌터님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돌아보는…… 그그그렇지!”
주이안 헌터님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을 난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얼음!”
바로 그거다!
“……!”
얼음이란 말에 주이안 헌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얼음땡 할 때 표정은 바뀌어도 돼요.”
내가 슬그머니 말하자 주이안 헌터는 재빨리 표정을 풀었다.
“압니다.”
진짜로?
네, 진짜로.
내가 놀리는 사이에도 주이안 헌터는 움직일 수 없었다.
으음, 이거 놀리는 맛 나는데?
***
신유리가 주이안의 자세를 잡아주는 사이.
신재헌은 연필을 든 채 모델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델인 주이안 옆의, 신유리를 보고 있었다. 연필을 든 손이 근질거렸다.
손은 주인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습관적으로 그리는 몇 개의 선만으로도 그는 신유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만들어낸 신유리는 그에게 큰 가치를 주지 못했다.
갈증 나는 입가를 축이는 한두 방울의 물 정도나 될까.
그의 갈증은 오직 진짜 신유리만이 풀어줄 수 있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 때였다.
소예리는 신유리와 주이안이 옥신각신하는 걸 보다가, 신재헌의 뒤에 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주이안 쪽으로 슬쩍 돌려주었다.
“모델은 저쪽입니당.”
“…….”
신재헌은 난감한 듯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봐야 하는 건 주이안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을, 그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귀에 피가 몰렸다.
“어떡해어떡해, 귀 빨개진 거 들키겠어요.”
소예리가 웃으면서 속삭였다. 신재헌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진정하려고 했다.
그 사이, 신유리가 주이안 옆에서 빠져나왔다.
“됐다! 그림이다!!!”
그녀의 말에 돌아보니, 정말 주이안은 모델처럼 베란다에 서 있었다.
신유리가 캔버스의 범위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에, 신재헌은 손끝이 아려오는 듯했다.
짙은 아쉬움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도 잠깐.
그는 제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 중요한 건 신유리고, 신유리가 아끼는 사람들이니까.
“근데 제가 풍경은 별로 자신이 없는데. 인물만 파 가지고.”
그는 연필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그건 진실이었다.
다른 배경보다, 그 어떤 것보다, 그에게는 단 한 사람을 눈에 담는 것이 늘 중요했으므로.
하지만 신유리는 한 마디로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럼 제가 그릴까요?”
신재헌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배경을 인물처럼 그려보겠습니다.”
***
한편 동제국의 마법사 둘과 기사 하나는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셋만 남은 그들은 이미 메이든 부인의 시험 이후부터 줄곧 당황한 상태였다.
간혹 눈앞에 마법 글자로 나타나는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와 리펜 드 메이든의 호감도.
두 가지를 보면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들은 3층에서 나름 최선의 선택을 감행했다.
‘그나마 약해 보이는 아이 쪽에 먼저 마법을 걸어두자!’
약화 마법이나 독 계열 마법을 걸어두려고 했다.
물론 그러려면 아이를 기절시켜야 했다.
3층에서 감시를 피해 어떻게든 아이가 있는 공간에 접근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뭐야?’
아이가 집어 던진 크레파스 몇 개에 만신창이가 되어 쫓겨나야 했다.
“뭔 애가 그렇게 힘이 좋지?”
“나보다 힘이 센 것 같은데.”
시스템창이 안 보이니 리펜은 SS+급이고 자신들은 A급이란 사실을 그들이 알 턱이 없었다.
“근데 선물은 뭘 드리는 것이 좋겠소?”
“손수건이라도 드리는 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뻗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던전은 그들이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두질 않았으니까.
다행히 괴물로 변했던 마부를 제외하면 사용인들은 그들에게 친절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나름 쉽게 올라올 수 있었다.
그놈의 경고만 아니었다면!
‘으, 으아악!’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지하로 이동되어 버린 마법사의 최후를 기억했다.
서로의 생사를 알 수 있도록 각자 지니고 있던 네 개의 마법석 중 하나가 박살 난 건 그때였다.
마법사가 죽은 것이다.
그들은 살벌한 상황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던전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던전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지하로 끌려가는 건 그들 자신이 될 테니까!
“손수건이라니, 무슨 출정 나가십니까?”
하지만 당장 직면한 문제부터 난제인 건 마찬가지였다.
대체 저택의 주인에게 무슨 선물을 주란 말인가?
아니, 선물을 받고 싶으면 저택에 오기 전부터 준비하라고 말을 흘렸어야지!
그들은 귀족 출신답게 당연한 절차를 생각했지만, 게이트에서 그런 상식이 통할 리가 없었다.
“아니, 저쪽은 왜 교황에 황제에 마탑주까지 몰려와서는!”
기사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옳소!”
뭐가 옳은지는 외친 마법사도, 불만을 토로한 기사도 몰랐다.
아무튼 그 세 명이 등장한 건 심각한 문제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던전에 들어온 건 서제국의 평범한 마법사와 기사, 사제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모습이 바뀌었어!
이를 악문 채 고심하는 그들이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게 다 마탑주의 농간이로군!”
수호기사단장에게 신의 상점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 리가 없는 그들은 입을 모아 마탑주를 욕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사람을 속이는 데에 쓰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윤리에 어긋나는 짓이오!”
마법사들이 침을 튀기며 말하는 동안 기사는 조용히 얼굴을 구겼다.
그럼 그 네 명을 지도 구석에 처박아서 죽이려고 했던 건 윤리적인 일이란 말인가?
“불만 있소!?”
하지만 마법사들이 주류인 동제국 출신인 기사는 차마 마법사들에게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잘못 찍혔다간 살아 돌아가더라도 동제국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테니.
“……아니오.”
기사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들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솔솔 새는 가운데, 문득 마법사 중 하나가 외쳤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움직입시다!”
그의 입에서 곧바로 아주 윤리적인 계획이 튀어나왔다.
다른 마법사는 그 계획에 눈을 크게 떴다.
“좋은 생각이오!”
그리고 기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리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런 현실적인 생각을 말해 봐야 욕만 먹을 것이 뻔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