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19)화 (119/218)

119화

―탁!

멀리 뛰어가려던 신재헌은 숨이 차는 것을 느꼈다.

S급이 이 정도 거리를 뛰고 숨이 찬다고 하면 누구라도 헛소리로 치부할 것이다.

하지만 신재헌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상세불명의 통증(L)의 효과를 받습니다.]

[전신 통증 극대화(L)의 효과를 받습니다.]

“!”

전신을 불로 태우는 듯한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짧게 더운 숨을 터뜨린 그가 큰 나무 그늘 아래에 몸을 감추었다.

―툭.

나무기둥에 몸을 기댄 그가, 결국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은 물론 귀까지 새빨개진 채였다.

“아…….”

그가 재차 숨을 내뱉었다.

신음 같기도, 탄식 같기도 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10초만.’

그래, 딱 10초였다.

그동안 신유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보고 있었다.

‘…….’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처음엔 의아함을 담았다.

그러다가 익숙하면서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친근함을 담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좀 더 먼 곳을 보는 듯 살짝 크게 뜨였다.

잔잔한 호수 위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린 것처럼, 천천히 일렁이며 변하는 그 눈동자에서 신재헌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너를 읽어보려고 했는데.

네가, 10초만 주면.

너와 긴 시간을 함께해 온 나니까, 네 생각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신재헌은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가 열을 세는 동안, 그녀는 시선만으로 그를 옭아맸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도록.

네가 내게 조금이라도 흔들리고 있다면 네게 고백하려고 했는데.

그러니 네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어보려고 했는데.

“…….”

신재헌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붉어진 귓가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가 생각했다.

되레 읽힌 건 나인 것 같아.

큰일이었다.

***

신재헌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 버렸다.

내가 뭔 생각을 했든 착각이라는 듯이.

하지만 그 10초가, 그 길었던 10초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

그 순간 나를 바라보던 그는, 내가 아는 신재헌이었지만 한 겹 낯선 표정을 한 남자였다.

‘10초만,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 봐.’

“친구가 아니라고…….”

난 나지막이 뇌까렸다.

때마침 게이트 홀딩을 풀면서 일거리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계속 신재헌 생각만 했을지도 몰랐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북동쪽 메반 영지, B급 숲 던전 클리어 확인했습니다~ 이 뒤로 쭉 보고 올라올 것 같아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이야 근데 파티가 불속성 마법사 그룹이네 싹 태우고 나왔나?]

……정작 놈은 아무렇지 않게 채팅하고 있는데, 나만!

나만 이상한 것 같았다.

그의 모든 행동이 기묘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신유리 헌터님? 에델바이스도 클리어 소식 있죠?]

이렇게 그의 이름이 보일 때마다 흠칫 놀라게 된다.

평소엔 그러지 않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안 이랬는데.

얼굴 보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신유리 헌터님?]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직 없어요]

덕분에 난 늦게 답해 버렸다.

신재헌이 전엔 내 답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던가?

아니면 이렇게 재촉했었나?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그가 평소 같지 않게 느껴졌다.

‘열.’

불현듯 자꾸 그 얼굴이 생각나서.

[서제국 게이트 장악도 : 11%]

[동제국 게이트 장악도 : 89%]

서서히 게이트 장악도 차이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건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클리어되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가, 정반대가 되어 벌어질 것이다.

우리가 90%대가 되고, 동제국이 한 자릿수가 되겠지.

그 뒤로는 시기에 맞춰서 게이트를 계속 저쪽으로 한 번에 몰아 보내면 된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자꾸 생각나는 신재헌 얼굴 빼고.

***

그 사이 에델바이스 영지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영지에 붙는 타이틀이 점점 화려해지고 있었다.

[전국에서 게이트 및 몬스터 피해가 가장 적은 영지]

“이건 폐하께서 내리라 명하신 선물입니다. 제국을 위하는 에델바이스 백작의 모습은 폐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하께서 보내신 작은 선물입니다. 생명을 위한 노고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황가와 교단에서는 게이트와 몬스터 피해가 가장 적은 영지를 세 개 뽑아 친히 상을 내렸다.

당연히 그중 일등은 나였다.

“에델바이스 백작은 지칠 줄을 모르는군.”

“폐하께서 친서까지 보내셨다지.”

귀족들은 부러워했다. 물론 그 친서의 내용은 나만 볼 수 있는 만큼, 별 거 없었다.

[잠은 자면서 일합시다

- 공익수면위원회]

……이딴 개 쓸데없는 소리만 쓰여 있는 줄 알면 귀족들이 부러움과 시기질투가 담긴 시선으로 나를 보지 않을 텐데.

아무튼 황가와 신전에서 직접 영지의 업적을 치하하기 시작하자, 귀족들 사이에는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전국 게이트 관리도 순위]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불붙었던 경쟁에 더욱 불이 붙었다.

황가와 교단에서 주는 소박하다고 주장하는 선물은 어지간한 귀족가가 받기에도 상당한 금액이었던 데다가, 두 세력이 함께 치하한다는 점에서 명예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타 영지에서 들어온 기사 지원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생겨났다.

헬렌은 내게 지원자들의 목록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불과 얼마 전, 동제국의 황태자가 결국 실종되고 킨나라는 방계 황족이 정권을 잡았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그 직후 바로 일하고 있으니 이쪽도 극한직업이 따로 없었다.

“좀 쉬면서 해.”

공익수면위원회에서도 나왔단다.

그 뒷말은 세니아 입으로 했다간 페널티니까 곱게 다물어 주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헬렌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보면 E급치고는 체력이 좋단 말이야.

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면서 타 영지에서 온 기사 지원자들의 프로필을 살폈다.

“흐음.”

영지가 전보다 가지각색인 것도 재밌지만.

무엇보다 출신지를 속인 자들이 많았다. 우리 영지는 서제국 동쪽인데, 저 멀리 서제국 남서쪽에서 여기까지 온 자도 있을 정도였다.

보통 기사 지원자면 제국을 횡단해서 올 생각은 안 하지.

난 턱을 매만졌다.

“흐음.”

그리고 몸을 일으켜 바로 아래의 기사관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내 손에 들린 프로필의 주인공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D] [E] [C] [D]

그들의 머리 위로 랭크가 보였다. 그리고 당연히 직업 마크도 보였다.

음, 검 뒤에 구린 안개가 있는 놈이 하나, 둘, 셋……. 없는 놈 세는 게 더 빠르잖아?

다 보인다, 얘들아!

마크에 구린 거 달고 오면 앞으로 구르고 봐도 뒤로 굴러서 봐도 타 영지 첩자거든?

“이번 기사지원자들은 직접 만나볼게.”

헬렌에게 말한 난 바로 몸을 일으켰다. 자꾸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 것보단 직접 움직여 일하는 게 나았다.

특히 저들에게는 해줄 이야기도 있고.

“제복을 준비할까요?”

헬렌이 놀라 물었다.

내가 바쁜 중에 직접 움직일 거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난 손을 내저었다.

“아냐, 이대로 나갈게.”

난 가벼운 활동용 드레스 차림이었다. 내가 잠옷 입고 일하는 것도 아닌데, 제복까지야.

***

“여기가 에델바이스의 기사관입니다. 정식으로 기사단의 일원이 된다면 이 주변에 가족의 거처가 마련됨은 물론, 각종 혜택이 주어집니다.”

익숙한 얼굴의 기사가 기사 지원자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다가갔다.

“!”

기사 지원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기사단 제복도 안 입고 기사관에 털레털레 걸어오는 이 여자는 누굴까, 하는 표정의 진짜 지원자들.

아무리 내 영지 사람이라도 내 얼굴을 일일이 알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를 알아보는 놈들은…….

[C] [C] [D]

랭크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높은 편인 건 둘째 치고, 모조리 직업 마크 뒤에 구린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투명하다, 투명해.

“기사단 전체 정렬! 가주님께 경례!”

그때 기사 지원자들을 안내하던 기사가 재빨리 움직였다.

기사관에서 훈련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내게 깍듯이 경례해 보였다.

“훈련하던 것까지 멈추고 올 필요는 없었는데.”

난 그렇게 말하다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온 게 더 좋나?

어차피 할 말도 있었다.

난 정렬한 기사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반은 옆에 서 있는 기사지원자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일부러 기사들을 보고 말했다.

“이번에도 에델바이스가 게이트 관리 순위 1위로 뽑혔어. 경들 덕분이야.”

내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음, 평균 B급 함성 끝내주고.

난 그들이 충분히 신나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그래서 타 영지에서도 우리 영지의 게이트 방어법을 많이 궁금해한다고 해.”

내 말에 기사 지원자들 중에 움찔하는 놈들이 있었다.

그런 나약한 마음가짐으로는 산업스파이…… 아니, 아무튼 첩자 비슷한 걸 할 수 없어요!

좀 더 마음을 굳건하게 가져! 내가 이 동네에서 게이트 관리법을 반드시 뜯어가겠다! 어떻게든 알아내서 본인 영지로 돌아가겠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란 말이야!

난 그들을 속으로 응원하며 말했다.

“숨길 생각은 없어. 오히려 알려주고 싶지만, 알다시피 귀족들 사이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지.”

난 손을 펴 보였다.

“제국민들을 지키는 건 황가의 기사나 다름없는 귀족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지. 난 그런 걸 가르쳐주면서 타 가문에 빚을 지게 하고 싶진 않아.”

말은 좋지만 그냥 얼른 게이트 관리법을 날로 얻어간 자들이 너도나도 게이트를 잘 막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서제국 게이트 장악도 : 93%

동제국 게이트 장악도 : 7%]

그래야 이 기깔나는 게이트 장악도 차이를 유지할 것 아니겠니?

“타 가문도 난감할 거야. 어떻게든 게이트 관리법은 알아야겠는데, 신흥 귀족인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도 없고 접촉하기엔 너무 바빠 보이니까.”

그래서 연회 초대장을 신나게 보냈지만 난 그걸 다 씹고 있었다.

가서 춤추다 체력 깎일 일 있냐?

너희도 나 부르고 싶으면 능력치 주는 달달한 서브 퀘스트 가져와라, 응?

“그러니 만일, 누군가 게이트 방어법에 대해 묻는다면 숨기지 말고 알려주도록 해. 다 서제국을 위한 것이니까.”

내 말에 양심통이 있는 게 분명한 일부 첩자 친구들이 다시 움찔거렸다.

안 잡아먹어! 마음을 강하게 다잡고 뻔뻔해지라고!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그런 나를 감명받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가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바이야 백작이나 헬렌한테 옮은 것 같은 열렬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난 그들의 시선에 타버리기 전에 재빨리 자리에서 튀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내가 ‘흘린’ 게이트 관리법은 다른 귀족들 사이로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도 내가 일부러 정보를 흘렸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물밑으로나마 에델바이스 백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호기사단장께선 진정 제국을 생각하시는 분이신 듯합니다.”

“그러게요. 게다가 실력과 품성까지 갖추셨으니…….”

귀족들이 감탄할 즈음이었다.

칭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칭찬해주니 기쁘게 듣고 있었는데, 그들 사이로 미꾸라지 하나가 끼어들었다.

“주인님.”

오늘도 심각한 표정의 집사 헬렌은 그 미꾸라지의 소식을 전해 왔다.

“주인님께서 검술대회에서 일시적으로 힘이 강해지는 마법약을 드신 채 대회에 응했다고 주장하는 귀족이 있습니다.”

“오.”

그거 키칼 자기소개 아니냐?

아닌 게 아니라, 대부분 내게 호의적인 이 분위기에 찬물을 붓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가문이라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가 어디인지 알아봐.”

이런 특급 눈새가 흔치 않거든?

왜 난 거기가 포로 시작해서 랭으로 끝나는 가문일 것 같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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