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독이라고요?”
시한부라며? 시한부 아닌 거에 춤 춰야 돼, 아니면 나한테 독 먹인 놈이 괘씸해서 빡쳐야 돼?
왠지 폐병치고 증상이 좀 이상하다 했다.
“네. 확실해요.”
“설마 해독불가, 뭐 이런 건 아니죠?”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신의’ S급 힐러 주이안 씨가 해독 못 할 독은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이안 헌터는 예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해독].”
[헌터 주이안(S)이 ‘해독(S)’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상태이상 : □□□이(가) 해제됩니다.]
[FULL체력 상승! +20]
독 해제됐는데 20밖에 안 오른다고? 개미눈물만큼 오르네?
하지만 숨쉬기는 한결 편안해졌다.
잠깐, 근데 신의 상점인가 하는 게 시한부 페널티 대가 아니었어?
그럼 상점도 사라지는 거?
[신의 상점]
설마 하는 마음에 열어봤지만 신의 상점은 그대로였다. 계속 쓸 수 있는 듯했다.
내 표정이 펴지는 걸 봤는지 주이안 씨가 웃었다.
“그런데 다시 걸리려면 언제든 다시 걸릴 수 있을 거예요. 어쩌다가 이런 독에 걸리셨는지는…….”
주이안 씨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물었다.
“원래 들어올 때부터 시한부였다고 하셨지요?”
“네. 폐급 일반인이라던데요.”
“제가 포를랭 가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습니다만…….”
주이안 씨의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저도 안 알아본 걸?”
사실 못 알아본 거지만. 내 말에 주이안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유리 헌터님 계신 곳이니 알아봐야죠.”
역시 우리 헌터팀 힐링계 주이안 씨답다. 난 감동받은 시선으로 주이안 씨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는 것도 잠깐,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가 알기로 원래 포를랭 가의 후계자로 지목받은 건 세니아 드 포를랭 영애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병이 생겨 검을 더 이상 잡지 못하게 됐다고 하고요.”
“대충 그래 보이더라고요.”
난 집에서의 일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리고 생각하다 보니 그러데이션 분노가 올라왔다.
“그니까 독 먹인 놈이 세니아한테서 후계자 자리를 뺏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가장 의심스러운 건 당연히 후계자가 된 오빠 놈이다.
범인은 내부에 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놈을 먼저 잡아 족쳐야지.”
“그…….”
주이안 씨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차, 지금 나 F급도 못 되는 스펙이지.
내 말을 들은 게 신재헌이었으면 다짜고짜 “그 꼴로?” 이랬겠지만, 천사 주이안 씨는 달랐다.
대신 안타깝게 날 보다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울게요, 신유리 헌터님.”
“고마워요. 진짜 힐링계다. 빛이 난다.”
광채가 난다. 난 없는 눈물도 닦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럼 주이안 씨,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네, 뭐든 말씀해 보세요.”
그러다가 평생 제 집에서 얼굴마담으로 살아주세요,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난 반짝이는 미남의 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그 주이안 씨 독 감지 스킬 있잖아요. 혹시 걸어줄 수 있어요?”
“아, 물론입니다.”
주이안 씨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 손을 잡았다.
[‘헌터 주이안(S)’이 ‘독 감지(SS)’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독 감지 시간이 48(+24)시간 지속됩니다. (교황 치유 스킬 보너스+50%)]
[S급 이하의 독은 자동치료됩니다.]
“우와, 교황 보너스 장난 아니네요.”
“곧 신유리 헌터님도 보너스 받을 직업으로 전직할 거예요.”
주이안 씨가 위로차 말해주었지만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한부 영애에서 뭘로? 분노에 찬 광전사 신유리로?
“아무튼 고마워요. 그럼 이제 슬슬 범인 놈을 잡으러 가 볼까.”
일단 멀쩡해진 건 드러내야겠다. 난 고해소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마침 고위사제도 만났으니까 운 좋게 치료됐다고 하죠.”
물론 세니아가 포를랭 자작가의 기대주였던 듯하니, 병에 걸렸을 때 의사든 사제든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치료하지 못했겠지. 병이 아니라 중독이란 걸 아무도 몰랐으니까!
“고위사제 이안 이름 날리게 해 줄게요, 내가.”
한데 수많은 사람들도 못 고쳤던 병을 이안이 고쳤다!
신시안 교 고위사제 이안 대단하다! 내가 소문 팍팍 내줄게!
그 말에 주이안 씨가 웃었다.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요. 신유리 헌터님.”
힐링계, 아.
“그럼 몸조심하시고, 무슨 일 생기면 반드시.”
그가 한 손을 휴대폰으로 전화하듯 귀에 대 보였다. 대한민국 사람스러운 제스처다.
난 깔깔 웃었다.
“알았어요. 또 봐요!”
난 개운한 얼굴로 고해소를 나섰다.
집 가면 검이나 잡아 볼까?
풀피 53에 검 들고 설치면 금방 엎어질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원래 체력도 운동해야 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퀘스트가 떴다.
[서브 퀘스트 : 검제의 귀환]
“오, 퀘스트 이름 기깔나고.”
[기사단 훈련장에 가서 검을 잡아 보세요.]
[보상 : FULL체력 +1, 방어 +3]
“오…….”
방어 스탯 좀 붙으면 하이텐션 하녀가 문 세게 닫는다고 피통 깎일 일은 없겠지?
난 즐거운 얼굴로 고해소를 완전히 벗어났다.
“아가씨,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오자마자 B급 귀여운 퓨어딜러 이디스 경이 나를 반겼다. 그녀는 내가 곧 쓰러질까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하긴, 비실비실하던 세니아 영애가 소화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일정이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
아무리 숨 쉬기 편해졌다지만, 그렇다고 몸을 막 굴릴 체력은 아니었다.
그래서 독 먹인 놈이 누굴까?
그 빤딱빤딱한 얼굴을 들이대던 오빠 놈 둘 중 하나일 텐데.
십중팔구 후계자 쪽이겠지?
왠지 직업 마크 뒤쪽에 불길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라니, 퓨어딜러가 아니고 뒤가 구린 놈이란 힌트였나?
―덜컹!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르자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답답하다.”
난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손이 창문에 끼었습니다.]
[–16]
“아,”
……쓰.
욕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RP던전 규칙! 규칙! 세니아는 귀족이다!
귀족이 아저씨 발 냄새 난다고 하면 안 된다! 수박씨 발아한다고 하면 안 된다!
“…….”
난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면서 헌터 채팅을 켰다.
“아가씨…….”
그런데 멀리서 아련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흘끗 시선만 돌려 보니 이디스가 이쪽을 안타깝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안타까운 사정 맞지만 곧 아니게 될 거거든?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와 던전 돌고 싶다]
사냥이나 팍팍 하고 싶다. 검이나 팍팍 휘두르고 싶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전 돌고 있는데~]
어? 놀라서 입 밖으로 소리 낼 뻔했다.
소예리 헌터님, 바쁜지 며칠 동안 말 없더니. 혼자 던전 돌고 있는 중이었나?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근데 여기도 던전이 있어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건 아니고 마물들이 나오는 곳이 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오…… 근데 마탑주면 마법 연구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마음대로 몬스터 후드려잡으면서 다녀도 되는 건가?
내 말에 소예리 헌터는 고민도 없이 되받아쳤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렇다고 사람한테 마법 써볼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난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이디스 경이 애잔한 눈으로 지켜보는 바람에 표정관리하기가 아주 곤란했다.
촌철살인 한마디가 특징인 소예리 헌터는 판타지 뽕짝 세계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잘 들어가요, 신유리 헌터님.]
그때 주이안 씨 채팅이 올라왔다. 뒤이어 신재헌 채팅도 득달같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뭐야, 둘이 만났어요?]
아니 이놈은 또 왜 이렇게 득달같이 물어봐?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네, 엄청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더라고요 ㅋㅋㅋ 주이안 씨 판타지 로컬라이징 장난아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오…… 나도 옷 기깔나게 입었는데]
뜬금없이 자기 어필하는 건 신재헌 특징이다. 난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그래서 황권강화는요?]
잘돼 가시나? 요 이틀 동안 말 없더니. 내 채팅에 신재헌은 곧바로 답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금방 싹 다 정리할 거니까 발닦고 뉴스 기다리세요 ㅋㅋ]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여기 뉴스가 어딨음]
이 사람 아직 판타지뽕짝 로컬라이징이 덜 됐네. 내 말에 신재헌이 조금 텀을 두고 답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 그랬나? 신문은 있던데 그거라도 보세요]
가벼워 보이는 투였다.
그래서 나도, 날 애잔하게 쳐다보는 이디스 경도, 채팅이 보일 주이안 씨도 소예리 헌터도 몰랐다.
곧 제국에 살벌한 피바람이 불 거라는 사실을.
***
다음 날.
[서브 퀘스트, 검제의 귀환]을 깨기 위해 난 이른 아침에 저택에서 걸어 나왔다.
“아가씨, 아직 새벽 공기가 차갑습니다. 카디건이라도…….”
하녀가 졸졸 쫓아오면서 말했지만 거절해야 할 이유는 있었다.
[서브 퀘스트 : 이열치열]
[추위에는 추위로! 운동하면 안 춥다! 추위를 견디고 수련하십시오.]
[보상 : FULL체력 +10]
“괜찮아. 이 정도도 못 버티면 안 되겠지.”
내가 한 말에, 내 눈을 들여다보던 하녀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가씨께서 다시 결연한 의지를 가지시게 된 것 같아, 너무 기뻐요.”
하녀는 정말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뭔 의지? 스펙업에 대한 의지?
“고마워.”
본의 아니게 결연해진 난 나를 걱정하는 하녀를 뒤로하고 기사단 훈련장에 도착했다.
“하아!”
일제히 들려오는 기합 소리. 음, 좋고.
B급 퓨어딜러들이 나란히 간격을 두고 아침 운동을 하는 모습은 끝내주게 귀여웠다.
애들아, 니네는 그렇게 운동하는 것도 좋지만 몬스터를 잡아야 랭크업이 빨라요.
그런 얘기를 해 줄 수는 없으니 아련하게 지켜봐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를 발견했는지,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가씨?”
“세니아 아가씨께서 훈련장에……?”
그들은 놀란 듯했다.
누가 보면 죽은 사람 온 줄 알겠다?
하긴 비슷하긴 했다.
폐병에 걸려 죽어가던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마침내 기사단 훈련장까지 나왔으니까.
“하던 일 해.”
난 손짓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사이로는 기이한 기류도 흘렀다.
이건 단순히 내가 나타나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
난 저택 쪽을 새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나올 때마다 우르르 붙던 하녀들과 하인들이 오늘따라 조용하지 않았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때 눈앞에 서브 퀘스트 창이 다시 떴다.
[서브 퀘스트 : 세간의 소문]
[제국의 분위기에 대한 소문이 포를랭 가와 다른 귀족가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보상 : FULL체력 +1, 신의 상점 Coin+3]
오, 신의 상점 코인이라고? 난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