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럼 누님께서 날 기억 못한다는 얘기인가?”
“송구합니다만, 아가씨께서는 현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셨습니다. 하지만 방에 걸려 있는 가문의 문양을 보시더니 ‘붉은수레바퀴’라고 말씀하셨지요.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이긴 하지만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가능성이 높다 이거지.”
“아가씨는 지금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사실 이런 때에는 어떤 말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도련님. 다만 아가씨의 치료가 가장 우선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지금의 증세가 호전되리라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육체와 정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정론이다. 하나 틀림없는 말이었지만, 칼릭스는 답답한 마음에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칼릭스의 굳은 표정을 보는 하인과 하녀들이 초조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는 제 머리를 엉망으로 쓸었다. 아까 방 안에서 보았던 누이의 행동이 머릿속을 떠나지 못했다.
항상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는 산발이고, 총기가 맴돌던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성대에서는 거친 소리가 쉭쉭 새어 나왔다. 기사였기 때문에 항상 작고 큰 상처를 달고 살았던 누이였지만, 이런 경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래 아랫사람들은 주인의 행동 하나, 기분 하나에 큰 영향을 받는 자들이다. 아버지가 국경 수비 임무로 자리를 비운 지금 백작가를 통솔해야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칼릭스는 한숨을 쉬고 표정을 풀었다.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누이가 돌아온 기쁜 날에 할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성벽의 천을 마저 거둬들여라.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무사하다. 아버지께는 알렸나?”
“예. 도련님.”
“치료를 도와준 마른가시나무 백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군. 선물을 준비해 둬라. 서신은 내가 쓰도록 하지.”
“네, 도련님.”
“누님 방에는 전담 하녀를 정해 두고 소수만 드나들게 해라. 이상한 말이 붉은수레바퀴령에 나돌지 않도록.”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도련님.”
칼릭스의 명에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십 개의 하얀 천으로 뒤덮여 있던 커다란 성이 그 고고한 자태를 드러낼 즈음엔, 칼릭스 또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돌아오시라. 살아 돌아오기만 하시라. 그렇게 수백 번을 빌지 않았던가. 다른 기사단에 비해 로젤린이 속해 있던 2황자의 하얀밤 기사단은 유독 피해가 컸다.
2황자는 1황자와 함께 황태자 후보로 꼽히는 유명 인사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위명이 자자한 만큼 적 또한 많았다. 그 탓인지 이번 사냥 대회의 사건에서도 2황자를 집요하게 쫓더라는 얘기가 왕왕 들렸다. 다른 기사단의 배가 되는 피해가 발생한 것은 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로젤린이라는,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단원이 죽었으리라 하는 추측이 기정사실화되어 나돌았던 것이고.
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팔다리 어디 하나 못 쓰는 곳 없이 그 격전에서 살아남았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 또한 높다. 천운이었다.
“누님께서는 뭔가를 좀 드셨나?”
“점심에 환자식을 드셨습니다. 오래 굶으셔서 얼마 못 드실 줄 알았는데, 세 그릇 드시고도 탈이 나지 않는걸 보니 후에 저녁을 드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 식사도 누님 방으로 올려라. 같이 먹겠다.”
“네, 도련님. 곧 준비하겠습니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성벽을 물들이고 마지막 남은 하얀 천을 하인들이 거둬들이고 있었다. 천이 흩날렸다. 칼릭스는 멍하니 제 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깜박 깜박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는 행위를 어색하게 반복했다. 얕은 위화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칼릭스는 제 마음속의 그것을 차곡차곡 접어 한구석에 두었다. 하인이 식사 준비가 끝났노라 알려 왔다.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잘 돌아오셨다, 무사하셔서 기쁘다고.
저녁을 먹기 전에 얘기해야겠다.
* * *
결과적으로 칼릭스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제 누이가 맨손으로 스테이크를 쥐고서 우악스럽게 뜯어 먹고 있는 지금의 이 장면 때문에.
볼은 다람쥐처럼 양쪽 다 불룩해져 있고, 손과 입에선 스테이크의 육즙과 적갈색의 소스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스테이크의 피가 흐르며 미묘하게 공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가에 우뚝 섰다. 눈앞의 광경을 현실이라고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에서 이십 년 이상 근무한 노련한 하녀조차 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상태였다. 예법을 개한테 줘 버리고 살아 돌아온 아가씨. 맨손으로 스테이크를 잡으면 뜨거우실 텐데, 라는 걱정은 그녀가 고깃덩어리를 씹어 먹는 당찬 모습에 쑥 들어갔다.
문제는 마침 방에 들어서 그 모습을 목격한 칼릭스 도련님의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다물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녀는 아가씨의 거친 식사를 도와야할지, 아련히 흩어지는 도련님의 정신을 보살펴야할지 정하지 못해 멀뚱히 서 있었다. 쩝쩝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칼릭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
“…음…… 벌써 고기를 드셔도 되는 건가? 부담이 되지는 않고?”
그는 눈앞의 광경을 애써 무시했다. 하녀 또한 아가씨 어깨의 실밥을 떼어줄지언정 그녀의 손에 들린 고기는 보이지 않는 양,
“의식이 없으실 때에도 수프와 환자식을 조금씩 흘려 넣긴 했다더군요. 아침에 드신 수프에도 고기를 잘게 다져서 넣었는데 별 탈이 안 나신 걸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
칼릭스는 그녀 몫으로 나온 수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제 몫으로 나와야 했을 스테이크의 행방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식사를 내오겠습니다.”
“그래.”
칼릭스는 간이 안 되어 있는 묽은 수프를 입에 넣었다. 밍밍해서 아무 맛이 없었지만, 그 맛을 음미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로젤린은 삼분의 일쯤 남은 스테이크를 입에 욱여넣었다. 칼릭스는 두 볼 빵빵해진 제 누이의 모습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면 어쩌시려고요.”
로젤린은 한번 끄덕이고는 꼭꼭 씹었다. 두 살 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항상 어른스럽던 누이였다. 이런 아이 같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유년기의 누이와 식사를 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살짝 미소 짓고 있던 칼릭스는 도로 표정을 일그러트려야 했다. 로젤린이 손에 묻은 소스를 핥기 위해 혀를 날름 내밀고 있었다.
탁.
다행히 칼릭스가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잡은 덕에 미수로 그쳤다. 칼릭스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제가 아직 거기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누님.”
전과 후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과 기사도가 담겨있던 누이의 소스 핥는 모습은 너무 파괴력이 컸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제지에 인상을 썼다. 줄곧 무표정이던 얼굴에 나타난 첫 감정이었다. 짜증.
칼릭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로젤린의 짜증이라니, 정말 희귀한 것이었다. 본디 그녀는 천성이 순하고 선했으며,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계기로 자신을 더 돌아보고 수련했다.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대대로 내려오는 쭉 째진 날카로운 눈이 한층 더 예리해져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불만 가득 찬 표정을 보고 황급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누님이 좋아하시던 아보카드 샐러드입니다. 이걸…….”
‘이걸 드세요’라고 말하려던 칼릭스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샐러드를 보는 로젤린의 표정이 한층 흉흉해진 탓이었다. 뭐야 이 풀떼기는.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드시지 말고…… 조금 있으면 스테이크를 가지고 올 테니 그걸 조금만 더 드세요. 조금만입니다.”
로젤린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끄덕였다. 칼릭스는 핑거볼에 담겨 있는 물로 그녀의 손을 대충 씻어 내었다. 그녀는 쩝 하며 아쉬운 소리를 내긴 했지만, 얌전히 그에게 손을 맡겼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리고 그녀는 참으로 담백한 남동생이었으며 누나였다. 그 흔한 포옹도 볼에 하는 입맞춤도 해 본 적 없었다. 손을 핥기에 더럭 붙잡았지만 이 짧은 접촉마저도 참 어색했다. 어릴 때에도 잡아 본 적 없던 누님의 손을 스물 하나 먹고 잡아 보는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곧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핑거볼의 레몬을 집어 먹고 웩웩거려서 그의 감성을 다 깨 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그런 낯선 기분에 잠시간 싱숭생숭 했다.
“누님.”
로젤린의 눈동자가 굴러 칼릭스를 향했다. 웃지 않으면 째려보는 것 같다거나, 화가 난 것 같다던 평을 받는 날카로운 눈이었다. 똑같은 얼굴인데도 오늘의 여러 사건 때문인지 맹하게 보였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누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증조할아버지께 똑같은 질문을 했던 것이 기억나, 칼릭스는 큭 하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누님의 두 살 아래 동생 칼릭스입니다. 누님이 기사단 일로 바쁘셔서 최근에는 자주 뵙지 못했지요. 물론 편지로 안부를 전해 주시기는 했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내시더군요. 아, 누님은 황실 기사단 소속입니다. 정확히는 2황자 전하의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의 하급 기사이시죠.”
로젤린은 칼릭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듯 보였다. “응.”이라고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느껴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