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은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1
점점 날이 풀림과 동시에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는 각종 야생동물과 마수는 많은 사람들의 골칫거리였다. 연에 몇 번씩 토벌대가 파견되기는 했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는 유독 그 횟수가 잦은 편이었다. 험준한 산세 때문에 잘 훈련된 기사들도 며칠을 버티지 못하기도 했거니와, 그것들이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많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얼추 정리가 되었다 싶어도 얼마 뒤에 다시 슬그머니 기어 나와 극성을 부리곤 했다.
사냥꾼과 토벌대가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을 다녀간 이튿날, 산 뿔 멧돼지의 형태를 띤 마수 한 마리가 산 아래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토벌로 인해서 먹이가 줄어들어 마을로 내려온 듯했다. 마수는 비쩍 마른 소년을 잡아먹다가 마른가시나무 백작 휘하의 기사에게 사살당했다.
황실 주최의 사냥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술렁이는 민심을 잠재우고, 황실의 건재함을 알리고자 열린 이 사냥 대회에는 많은 귀족과 황족, 또 황실 기사단이 출진했다.
2황자 소속의 ‘하얀밤’ 기사단과 5황자를 호위하는 황실 제2기사단 ‘깊은숲’, 그 외에도 황실 제4기사단 ‘물보라’, ‘마른가시나무’ 기사단, ‘강철발굽’ 기사단까지. 전쟁이라도 치른다고 생각될 정도로 대거의 무력이 이동했다. 짧은 일정 동안 사냥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험준한 산길 때문에 발목이 삔 하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사상자조차 없었다.
사냥 대회 5일차. 사건이 일어났다. 제국 일라베니아와 이웃한 거대한 왕국 발타. 그 발타를 거점으로 하는 암살 부대가 일라베니아의 권력이 응집되어 있는 산을 침범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에 하나둘 횃불이 늘어나며 전투는 시작되었다. 기습을 당해 잠시간 흐트러지긴 했지만, 곧 진열이 가다듬어지며 형세가 역전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수의 차이도 차이거니와, 무력 또한 한낱 암살 부대와 비교할 수 없었다.
새벽이 찾아올 즈음, 소란은 점차 잦아들었다. 습격자들은 모두 소탕되었고, 황자들은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에 취하기에는 아군의 피해 또한 상당했다. 아침 해가 비추어진 땅 위에는 적아를 가리지 않는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수십밖에 되지 않는 암살자들은 독과 암기를 써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피해를 남겼다.
더 이상 사냥 대회는 지속될 수 없었고 황자들은 급히 환궁했다. 각각의 기사단은 호위를 위해 수도 티가드로 향했지만, 일부의 인원이 남아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습했다.
사망한 하얀밤 기사단의 부단장. 그의 부관은 기사단의 명단 위로 하나둘 선을 그었다. 열다섯이 다치고, 일곱 명이 사망했다. 아니 부상자 열넷과 사망자 여덟 명이다. 방금 치료받던 단원 한 명이 사망하였노라 의사가 선고했다. 그는 참담함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사망한 단원의 이름을 찾아 선을 그었다.
반나절 정도 지나자 어느 정도 명단이 분리되었다. 호위를 위해 떠난 자, 다친 자, 죽은 자. 부관은 종이에 적혀 있는 이름 중,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은 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 올 정도의 실력을 갖춘 단원이었다. 무력은 남자 기사들에 비하면 약했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태도를 높이 사 이번에 죽은 부단장이 아끼던 자였다.
부관은 다른 기사단 쪽으로 시체가 잘못 흘러갔나 싶어 사방팔방으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머리는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부터 수색대가 파견되어 숲속 아주 깊은 곳, 절벽 아래 큰 부상을 입은 그녀를 찾아낸 것은 전투가 있던 날로부터 6일이 지난 후였다.
2
하얀 천을 늘어놓았던 저택은 며칠간의 긴 침묵에서 벗어났다. 사냥 대회에서 일어난 전투로 사망했을 거라 추측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장녀가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상을 당했다는 표식의 하얀 천은 치우다 말았는지 반쯤 애매하게 성벽에 걸쳐져 있었다. 천을 거둬들이는 것보다 급한 일이 많았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도 잠시, 백작가의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표정을 잔뜩 굳힌 채로 들어왔다.
“누님은?”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아가씨는 방에 계십니다. 높이 계시는 분이 굽어살폈나 봅니다.”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음에도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크고 작은 상처들 때문에 출혈이 상당했으며 고열에 시달리는 상태였다고.
막 발견했을 당시에는 생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위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붉은수레바퀴 백작가로 돌아오지 못하고 비스타에서 치료받아야만 했다.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갔지만 그녀는 줄곧 눈을 뜨지 못했다.
하다못해 객사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던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그녀를 비스타에서 백작가로 옮기라 명했다. 환자의 몸에 무리가 가는 여정이었지만 놀랍게도 이튿날 아침, 그녀의 의식이 돌아왔다. 아가씨께서는 집에 돌아오고 싶었던 게지요. 집사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칼릭스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하인과 하녀 몇 명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이 층에 올라서니 퉁퉁한 백작가의 주치의가 막 로젤린의 방을 나오고 있었다. 그는 찌푸린 표정으로 급하게 올라오는 칼릭스를 보더니 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누님은 좀 어떠신가.”
“아, 칼릭스 도련님. 아가씨께서는 이제 열도 내리시고…… 무사하신 것 같습니다…….”
말이 길게 늘어지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칼릭스는 가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침묵이 묵직하게 주치의를 압박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어코 한 단어를 더 토해 냈다.
“아마도…….”
말이 왜 저따위야. 무사하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건지. 한층 더 사나워진 칼릭스의 표정에 주치의 바시오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원래도 땀을 많이 흘리는 자였는데, 지금은 무슨 비라도 맞은 양 흠뻑 젖어 있었다.
전조가 좋지 않다. 칼릭스는 제 마음이 요동치려는 것을 겨우 다잡았다.
“누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 그것이.”
칼릭스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남매지간이라 하더라도 허락 없이 드나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칼릭스.’
어릴 적 많이 혼났던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방 주인의 허락을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칼릭스의 시야에 침대에 앉아 있는 누이가 들어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난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고 얼굴엔 작은 생채기가 여럿 있었다. 얼굴이 핼쑥해 보였지마는 며칠간 생사를 오갔던 사람치고는 아주 양호해 보였다. 칼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 바시오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괜히 불안했던 것이다.
칼릭스는 미간에 잡고 있던 주름을 풀고 로젤린에게 다가섰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의자를 끌어 앉는 동안에도 그녀는 말똥말똥 칼릭스의 얼굴만 쳐다봤다. 제 누이의 무덤덤한 성격을 잘 알고 있으나, 그 험한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의 반응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딘가 어색했다. 얼싸 부둥켜안고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이렇게까지 평온할 일도 아닐 텐데…….
“누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시계 침이 똑딱이는 소리가 흘렀다. 칼릭스의 물음에도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일자로 다물린 입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 기류에, 칼릭스는 “누님?” 하며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예쁜 페리도트색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담았다. 로젤린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다가, 올라갔다. 그간의 고생을 입증하는 듯 거칠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몸, 좀 괜찮. 어, 디 불편하…… 아니?”
칼릭스는 그녀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확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위화감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의 행동이 당황스럽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젤린은 여전히 칼릭스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감정 한 톨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는 평소보다 서늘했다. 칼릭스는 제 낯을 몇 번 쓸어내리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누가 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목소리만은 차분하고 상냥했다.
“조금 쉬세요, 누님.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조금. 쉬……세요.”
“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뒤돌아선 칼릭스는 주치의를 째려보았다. 바시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방 밖을 나서는 칼릭스를 뒤따랐다. 문이 닫히고 복도에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릭스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 주변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바시오는 어린 주인의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차마 칼릭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송구스럽다는 듯 그의 발끝만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바시오는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는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고 제 진단을 그에게 전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부딪쳤다. 출혈도 심했다. 심신이 미약하여 잠시간 기억을 잃은 것 같다. 나이 든 노인들이 치매에 걸리면 언어 체계가 무너지기도 하는데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치매?”
칼릭스는 인상을 확 구겼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장녀에게 ‘치매’ 따위의 단어가 붙여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바시오는 급하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뇌는 아주 섬세한 부분이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언어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 드리고 싶었던 것이지 아가씨께서 치매에 걸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