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158)

#62.

“……뭔가 있어요? 또 멧돼지, 그런 거예요?”

이연은 우뚝 하던 일을 멈추고 목소리까지 낮춘 채 물었다. 그러나 권채우는 누가 봐도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채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 예민한 모습에 그녀도 덩달아 침을 삼켰다. 

길었던 찰나가 지나자 이윽고 권채우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이연을 응시했다.

“글쎄요.”

“네?”

“잘 모르겠어요. 이게 뭔지, 무슨 소린지.”

그녀의 눈동자에 안개 같은 불안이 스미자 권채우가 화제를 돌렸다.

“이연 씨는 화이돔 프로젝트 따내고 싶어요?”

“어…….”

그녀가 뺨을 긁적였다.

“누가 들으면 웃으려나요? 터무니없는 얘기 같아요?”

“아니요. 이연 씨만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요.”

권채우는 나긋하게 말하면서도 뒷짐 진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이상하게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난생처음 들어 보는 소리가 미약하지만 자꾸만 들려오는데 산속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방향을 확정 지을 수 없는 곳에서 때로는 지직, 때로는 쿵, 하며 신경을 긁는다.

온 감각이 바늘처럼 곤두섰지만 낯짝만큼은 여유롭게 꾸몄다. 뒤숭숭한 느낌을 감추고 또 감춰 그녀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이건, 이연의 꿈이 달린 일이었으니까.

“보장된 계약이라든가 돈도 돈이지만…….”

권채우는 또다시 들려온 자그마한 소음 하나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침 근처에서 새가 날아간다.

뭘까, 그냥 날갯짓 소리였을까.

“권채우 씨가 보고 있으니까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별안간 날카롭던 신경이 새털보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음성에 가닿는다.

“그때……. 정말 면목 없었거든요. 내가 황조윤 앞에서 기도 못 펼 때, 권채우 씨가 일일이 반응하는 거 보면서 이렇게 미루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어른스럽게 맞서고 싶었어요. 기왕이면 내가 가진 실력으로요.”

“…….”

권채우는 유별난 청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귀가 먹어 버린 듯 세상이 먹먹했다.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았다. 

감정이 담뿍 배인 눈, 열심히 오물거리는 입술, 그녀의 표정에 따라 조금씩 들썩이는 눈썹이 하나하나 그대로 틀어박혀 숨이 벅찰 지경이었다.

“이런 나를 보고 권채우 씨가 얼른 안정을 찾길 바랐어요.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나 진짜 열심히 할게요. 돈 많이 벌면 좋은 것도 많이 사 줄게요.”

그는 순진하고 성실하게 빛나는 이연의 눈망울을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그리고 아픈 나무를 치료하는 건 언제나 좋아요.”

그녀가 눈가를 반달로 접고 배시시 웃는 순간, 퓨즈가 끊겨 버린 남자는 성급하게 허리부터 숙였다.

“읍……!”

그리고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그녀의 뺨에 잘생긴 콧날이 뭉개졌다.

처음부터 깊숙이 삼킨 입술을 가르고 붉은색 살덩이가 능숙하게 밀고 들어간다. 혀를 포악하게 문대고 뼈대가 불거진 턱을 아끼지 않고 벌렸다. 유두를 탐하듯 입술을 핥고, 도망치는 혀를 휘감아 올려 골반을 애무하듯 천천히 쓸고 눌렀다.

안쪽을 자극할 때마다 넘치도록 흐르는 타액이 달다. 버거워하는 그녀가 뒷걸음을 치자 그 자그마한 얼굴을 힘으로 들어 올리고 더욱 깊숙이 결합했다.

“으읏……!”

저항하려던 목소리가 힘없이 먹혀든다. 고개를 과감하게 비틀 때마다 남아나는 숨이 없었다. 미묘하게 뜨는 입술 틈 사이로 축축하고 붉은 혀가 모습을 보였다가 상대의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진흙이 묻은 손은 끈적거리고 침침한 숲속은 키스를 하기에 최악의 장소였다. 그럼에도 머리가 뜨겁게 끓어올라 해야 할 일도 잠시 제쳐 두고 열렬하게 입을 맞췄다. 남자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이연의 가슴을 와락 움켜쥐었을 때였다.

“읍, 읍……!”

숨이 막히는지 그녀가 권채우의 등을 필사적으로 두드렸다. 그는 이미 단단하게 발기한 좆을 이연의 아랫배에 연신 문지르며 이빨을 세워 혀를 씹었다.

“흐으…….”

그녀가 아프다는 듯 칭얼대자 접착제라도 붙인 것 같던 입술이 가까스로 떨어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진하게 충혈된 권채우의 흰자위, 반듯한 이마 한중간에 불쑥 도드라져 있는 푸릇한 힘줄이었다.

“갑, 갑자기 여기서는 안 돼요. 우린 지금 심사 중이고……”

“알아요.”

그러나 담백한 대답치고 남자의 목울대가 세차게 일렁거린다. 두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가슴팍을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서로의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 와이어……, 저거 와이어 마저 묶어야 해요.”

“그래요.”

잠시 미적거리던 이연이 먼저 그 자리를 피했다. 고작 몇 걸음 빠져나왔는데도 공기부터 달랐다. 저도 모르게 땀이 났는지 이마를 훔쳐 가는 바람이 선선했다.

입술은 벌에 쏘인 것처럼 따갑고, 작살 같은 시선은 계속 꽂혀 있는 채다. 어딘가가 욱신욱신 뜨거워지는 통에 이연은 바쁘게 손을 움직여야만 했다.

“큼큼…….”

일단 긴 와이어를 한쪽 나무에 먼저 단단히 감고, 반대편은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나무에 묶었다. 

그리고는 멀쩡한 나무의 와이어를 팽팽하게 조이는데, 이연의 얼굴도 함께 일그러졌다.

“왜 그래요?”

권채우가 곧장 다가와 그녀의 손바닥을 강제로 떼어 낸다. 맞닿은 손에 찌릿, 전기가 통했다. 이연은 금세 귀가 붉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이연은 똑바로 눈을 맞춰 오는 남자를 보자 조금 멋쩍어졌다.

“이거, 엄청 아플 거라서요. 저 다친 나무가 살아 있는 한, 얘는 여기서 못 벗어나거든요.”

권채우의 무감한 시선이 줄 하나에 목숨을 의지하고 있는 나무에게로 향했다. 

그 아슬아슬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감흥 없던 입매가 점점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연이 멈칫하며 물었다.

“왜 웃어요?”

“저건 나예요.”

“네?”

“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무요.”

그가 손가락으로 위태로운 나무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연 씨는 이 멀쩡한 애가 불쌍한 거죠?”

“……아무래도 그렇죠. 팔자에도 없는 지지대 노릇을 하게 됐잖아요. 이거 와이어 엄청 아프단 말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수피까지 파고 들어가서 흉도 질 거예요.”

“진짜 불쌍하네요.”

미묘하게 웃음기가 배인 말이었다. 그에 이연이 미미하게 인상을 쓰자, 권채우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다친 나무를 턱짓했다.

“나는 저게 웃고 있는 거 같아요. 즐거워하고 있어요. 이 예쁘게 생긴 나무를 이렇게라도 마주 보며 살 수 있다는 게, 저놈은 기쁜 거예요.”

“…….”

이연은 왜인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나의 와이어에 의지해 서로를 묶을 수밖에 없던 두 그루를 유심히 보았지만 권채우 같은 해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괜스레 팔뚝을 쓸어내리며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는 톱, 가위, 끌개, 망치 등의 도구와 희석제, 에폭시, 수액 세트 등의 약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어, 권채우 씨!”

그가 막무가내로 이연의 손목을 잡아끄는 이해 못할 행동을 했다. 균형을 잃은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을 쓸었지만, 권채우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힘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독선적이었다. 그리고 이연이 제대로 섰을 무렵,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꽉 붙잡힌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프고 어깻죽지가 당겼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 달리고는 있지만 애초에 그의 속도에 맞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허벅지가 터질 듯이 화끈거리고 금세 목 끝까지 숨이 찼다. 이연의 이런 상태를 모를 리가 없음에도 냉담한 권채우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으로 이연의 손목만 움켜쥐고 있을 뿐, 피가 통하지 않은 손은 삽시간에 불긋불긋해져 저려왔다.

“왕진 가방이요……! 그거 놓고 가면 안……!”

“죽기 살기로 달려요.”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앞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졌다. 무섭도록 굳어 있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연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권채우는 두 명 몫의 배낭을 앞뒤로 멘 채 이연을 재차 힘으로 끌어당겼다.

쾅―! 땅이 흔들렸다. 

“어…… 어어……!”

우우우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미미한 진동과 함께 밀려 닥치기 시작했다.

뒷덜미를 스치는 섬뜩함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무, 무슨―”

겹겹이 쌓여 있던 산의 지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틀간 내린 폭우 때문일까. 꾸덕꾸덕하게 쌓여 있던 진흙 더미와 암석이 해일처럼 밀려드는 토석류의 힘을 받아 어마어마한 속도로 쓸려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몸을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나무 위도 안전하지 않다. 이미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나무는 무섭게 밀려드는 토석류를 감당할 힘이 없다.

작년, 이미 한 차례 주택가를 덮쳤던 거대한 산사태.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자 이연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순간, 권채우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아 제 어깨에 올려놓았다.

“……!”

그녀의 시야는 이내 시꺼먼 공포로 물이 들었다.

늪이 넘쳐흐른다. 

파도처럼 이 숲속을 빠르게 뒤덮는 짙은 토석류가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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