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158)

#30.

“폭력적인 발정기가 시작되면 코끼리는 관자놀이가 부풀어 오르고, 피부 사이로 끈적한 액이 흐릅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참 괴기스러운 말이었다.

“성질도 걷잡을 수 없이 흉포해집니다. 감정 조절에 실패한 코끼리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들이받고 달려듭니다.”

“…….”

“원장 선생님은 수놈을 조심해야 합니다.”

과연 발정기의 뜻을 알고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연은 드물게 학구적으로 열변을 토해 내는 규백이의 감정이 반가웠다.

규백이는 나름의 경고를 해 주면서도, 창문 밖의 권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곤충과 백과사전 말고도 아이가 어떤 대상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게 권채우라니.

“코끼리는 사랑할 준비를 마치면―”

마침 권채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이연은 동글동글한 쿠키를 다시 규백의 입에 푹 넣어 주었다.

우웁,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 * *

“규백이 말에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에요.”

이연은 <가문비 나무 병원>의 스티커가 붙은 낡은 트럭을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애가 버릇이 없어서 수놈이라고 부르는 건―”

“알아요, 아닌 거.”

“뭐 하나에 꽂히면 곧 죽어도 자기 식대로 해요.”

“그건 나랑 비슷하네요.”

별안간 운전대를 쥔 손이 움칠 튀었다. 차에 시동이 걸릴 때부터 줄곧 이어져 온 시선. 조수석에 몸을 구기고 앉은 권채우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권채우 씨, 앞 좀 봐요. 앞 좀.”

“나는 운전 중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어요?”

“이러다 내가 사고 내면 그쪽도 손해예요,”

“사고 낼 거예요?”

“어쩌면요!”

자외선보다 질긴 시선을 떼어내기 위해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오른쪽에선 해도 들지 않는데 괜스레 귀가 뜨거웠다. 그는 탐탁지 않다는 듯 흐음, 하고 낮게 성대를 울렸지만 순순히 고개를 돌려 주었다.

“이연 씨, 나 신분증이 필요해요.”

“……!”

빨간불이었다.

그녀는 타이밍을 놓쳐 다소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고, 운전대에 가슴팍을 부딪칠 뻔했다. 그 사이로 재빨리 끼어든 권채우의 팔만 아니었다면.

“괜찮아요?”

쇠처럼 단단한 그의 팔에 물컹한 가슴이 짓눌렸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필이면 유두가 제대로 눌려 버려서.

전기가 치닫듯이 짜릿한 열감이 일었다. 젖꼭지가 비벼지고, 뭉개졌던 가슴이 다시 탄력 있게 올라붙는 동안, 그녀는 벌어져 있던 무릎을 본능적으로 붙였다. 찰나인데도 아래쪽이 욱신거렸다. 낯선 감각이었다.

“이연 씨, 어디 안 좋아요?”

“아뇨, 아뇨!”

이연은 고개까지 열렬히 저었다. 이 강렬한 느낌은 자신만의 것인지 권채우는 태연해 보였다.

“……권채우 씨, 저기, 너무 가까운데요.”

이연이 몸을 뒤로 쭉 뺐다.

운전석의 헤드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핸들을 막느라 그의 몸이 훅 다가와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담갈색 눈동자가 새삼스러웠다.

“…….”

“…….”

밀접한 거리였기에 더 잘 보였다. 흔들리던 그의 동공이 미끄러지듯 내려가 그녀의 입술에 고착되는 순간을.

이연은 공연히 건조해진 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런데 갑자기 신분증은 왜요?”

“…….”

“권채우 씨?”

“……예. 본격적으로 일자리 좀 찾아보려고요.”

그가 천천히 시선을 끌어올렸다.

다시 마주친 눈은 붉은 솥처럼 찐득하게 끓고 있었다. 이연은 순식간에 목덜미가 축축해졌다.

“그나마 쓸 만한 게 몸뿐인데, 써먹어야죠.”

이연의 눈길을 억지로 붙잡고 있던 남자는 이내 빵―! 하고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비로소 물러났다.

그가 한 일이라곤 단지 제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숨 막히던 공기가 단박에 흩어졌다.

“핸드폰이랑 통장 만들어서 제대로 일할게요.”

그러나 시원한 느낌도 잠시였다. 이연은 곧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런 거…… 나한테 없는데 어떡해요.

* * *

“경과는 아주 좋습니다.”

의사는 목을 쭉 빼고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 안에는 이연이 알아볼 수 없는 뇌파 그래프와 수치들로 빽빽했다. 의사는 바퀴 달린 의자에서 일어나 이연과 마주 보았다.

“확실히 소이연 씨의 유무가 환자의 수면을 결정짓는 건 맞습니다. 아마 심리적인 문제 같은데, 이와 관련해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망칠 구석이 없는 확인 사살이었다. 그녀는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환자가 소이연 씨 얼굴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죠.”

투명한 벽 너머에는 환자복을 입은 권채우가 머리에 수십 개의 줄을 달고 누워 있었다. 오늘은 이연과 함께 누워서 진행한 검사였다. 잠에서 막 깬 그는 텅 빈 옆자리를 더듬다 유리벽 너머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턴 제 추측입니다만, 환자가 사고 전에 어떤 극심한 충격을 받았던 걸 수도 있고―”

누가요? 권채우 씨가요?

당시에 극심한 충격은 제가 더 받았는데요……?

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묵직하게 쳐다보았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최면이 걸린 걸 수도 있습니다.”

“……네?”

이연은 눈썹까지 찌푸리며 멍하게 반응했다.

“환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의식이 없던 2년 동안 알게 모르게 들었던 것을 무의식이 축적해 놓은 걸 수도 있어요.”

의사는 팔짱 낀 손으로 턱을 연신 문질렀다.

“막 의식을 찾은 환자가 그런 말을 했거든요.”

의사의 까만 눈이 소연에게 닿았다.

“깨어나지 말아 주세요.”

“……!”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동요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내리깐 그녀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망치처럼 두들겨 대는 맥박 때문에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연은 누워 있던 권채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었다. 확인하고, 요구하고, 부탁하면서 그가 영원히 잠들어 있길 바랐다.

“그……, 그 잠자는 숲속의 그 증후군은―”

“클라인-레빈 증후군이요.”

“네, 그거요. 그 증후군은 완치가 가능한 건가요?”

“치료 방법이 딱히 있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선 소이연 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책임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가 빌었던 염원이 정말 그에게로 흘러들어 간 걸까.

살인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상대에게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니.

이연의 눈 밑에 그늘이 고여 들었다. 한쪽에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미소를 짓고 다른 한편에선 죄책감이 고개를 든다.

“혹시……, 환자분한테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그때 의사가 흰 가운을 젖히고 허리에 손을 걸쳤다.

“보통 이 증후군에는 공격성, 과다 성욕, 행동 이상 등의 증상이 함께 따라오기도 합니다. 집에서 비슷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습니까?”

“…….”

훅 떠밀린 종이배처럼 동공이 흔들렸다. 떠오르는 게 너무 많았다.

“……행동 이상에 과다 성욕이요?”

“모든 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증상은 아닙니다. 그래도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싶으면 알려 주세요.”

“…….”

“그런 상태에서 한집에 있긴 힘들 겁니다.”

순간 권채우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행동 이상이면 예를 들어 어떤 거예요?”

“사고 과정이 비정상적으로 튀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렇다 보니 감정, 정서, 욕구가 강박, 흥분, 성욕으로 과장될 겁니다.”

의사의 말 그대로였다.

그는 2층 문과 도어 록을 부수었고, 생닭을 물어뜯었고, 다짜고짜 정액을 분출하거나 키스를 했고, 장비 하나 없이 30m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또, 초면인 황조윤이 이연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지나치게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

‘본성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다…… 병의 증상일지 모른다고?’

설명할 순 없지만 이연은 왠지 허탈해졌다.

이윽고 의사가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의료진들은 권채우에게 붙여 두었던 온갖 선들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 의사는 베드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권채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약에 기대지 않는 환자는 없습니다.”

발등만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환자는…… 소이연 씨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분명 매달려 올 겁니다. 고작 몇 년, 그렇게 짧게 볼 일이 아닙니다. 각오는 되셨습니까?”

이연을 지그시 바라보는 의사의 눈빛이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불현듯 이 사람도 권기석의 눈과 귀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이연의 거짓말을, 그 남자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고.

“그런데 저는 감히 환자를 더 동정합니다.”

의사가 목을 기울인 채 우중충하게 읊조렸다.

“환자는 평생, 소이연 씨에게 구걸해야 할 테니까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