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손댈 데 없이 정석적으로 앉아 있던 그가 돌연 마른세수를 하며 등을 굽혔다. 기도하듯이, 혹은 복통을 견디듯이 상체를 식탁 쪽으로 숙였다.
좁은 식탁의 모서리를 붙든 팔에는 거미줄 같은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이연 씨 전남편만 생각하면 속이 메슥거려요.”
곧 죽어도 선을 긋는 행동이 결벽적이다.
그 순간 이연은 자면서 억눌린 울음을 터트리던 그를 떠올렸다.
흐느낌은 지금도 여전했다. 이연은 주기적으로 잠에서 깨야 했고, 소매는 하루도 마를 날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과거가 궁금하지 않아요? 권채우 씨한테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그런 결심을 하게 됐는지…….”
그러나 남자는 미묘하게 얼굴만 굳힌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채우는 그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입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건 응당 폐기돼야 할 시간이었고, 이연이 더는 떠올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부러 젓가락질을 멈추고, 속눈썹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냥 같은 몸을 쓰고 있으니까 알아요. 죽으려고 했던 건 후회 때문이라고.”
“…….”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진 몰라도, 그런 하책밖엔 못 쓰는 멍청한 새끼였어요.”
이연은 목 언저리를 더듬거리며 복잡한 심정을 애써 꾹꾹 삼켰다.
“그런 새끼가 돈은 잘 벌어다 줬어요?”
그가 번쩍 고개를 들고 사뭇 날카롭게 물었다.
“어……, 딱히 돈을 잘 벌었다고 하기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흐리자, 권채우가 매섭게 코웃음을 쳤다.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너 말이지?
“이연 씨는 책임감이 강해서 탈이에요. 꾀부릴 줄도 모르는 것 같던데 누구 좋으라고 참고 버텨요?”
이연은 괜스레 양심에 찔려 수저질을 멈추었다.
“더는 봉사하지 말아요.”
그때 남자가 서슬 퍼렇게 읊조렸다.
그 수혜는 권채우 자신이면 족했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꿀 같은 인내를 입어서는 안 된다.
“골 빈 남자를 들였으면 마음껏 이용해야죠.”
권채우가 별안간 사나운 눈매를 반으로 접었다. 진심인 양 시원스레 벌어지는 입매가 놀랍게도 순수했다.
이연은 그를 떠보는 것도 잠시 잊었다. 확 바뀌는 인상은 그의 말마따나 새로운 사람처럼 부드러웠다.
“그 씹새끼랑 겉가죽이 똑같아서 유감이지만, 나는 이연 씨가 아니면 사람조차 아니에요. 나를 깨우고,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건 오로지 한 사람뿐이잖아요.”
순종적인 말과 달리 그에게선 한기가 감돌았다.
기억이 났다는 말에 목이 졸렸던 건 자신인데, 오히려 필사적으로 끙끙대는 남자가 딱하고 우스웠다. 이연은 재빨리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그치만 사람은 잘 안 변한대요.”
“나는 텅 비었는데 누구랑 비교하는 거예요. 이연 씨가 색안경을 낀 건 잘 알겠는데요. 내가 그 뒈진 망나니 새끼랑 같아 보여요?”
“어……, 글쎄요…….”
“앞으로 이연 씨 기억에서 그딴 쓰레기 하나 못 밀어내면 좆 떼야죠.”
이연은 밥을 한 숟갈 퍼서 입에 넣었다. 식탁 유리에 안도하는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여전히 그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음을 안심한 건지, 변하지 않은 남자의 믿음에 마음을 놓은 건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니까, 이연 씨가 원하는 건 뭐든지, 누구든지 될 수 있어요.”
그저, 혼자서 열을 내는 권채우를 보며 푸시시 나오려는 웃음을 밥과 함께 밀어 넣었다.
* * *
“정식으로 원장 선생님의 수놈을 봅니다.”
물구나무를 서면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권채우의 시야에 웬 아이가 거꾸로 잡혔다.
그는 일자로 쭉 뻗었던 다리를 내리고 제자리에 섰다. 기껏해야 자신의 골반까지밖에 오지 않는 무척이나 작은 남자아이였다.
“꼬마는 누구야?”
“버들 초등학교 1학년 이규백입니다.”
아이는 고개를 뒤로 팍 꺾어 그를 열렬한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규백이는 입술을 호오, 하고 모으며 미끈한 복근을 탐구적으로 살폈다.
마침 커다란 창문 너머로 이연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규백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손뼉을 짝 쳤다.
“냄새가 납니다.”
“뭐?”
아이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방에서 웬 책을 꺼내 들었다. 바삐 넘어가는 페이지가 다급해 보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아이가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수컷 알락꼬리여우원숭이는 꽃향기를 분비해서 암컷을 유혹합니다. 냄새로 추파를 던지고 구애를 합니다.”
“…….”
“그래서 수놈, 지금 냄새납니다.”
규백의 두 손가락이 조그마한 코를 집게처럼 집었다. 반질반질한 눈동자는 그의 시선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지만, 기어이 정답을 찾아냈다는 눈빛이 의기양양했다.
권채우는 희미하게 동하는 경계심에 눈썹 끝을 엄지손톱으로 긁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땀이야.”
“수놈은 원장 선생님보다 나이가 어려야 합니다.”
“아니, 동갑이라던데.”
“안 됩니다. 큰일입니다. 그러면 냄새가 상합니다.”
“뭐?”
“불리합니다. 나이 든 원숭이보다 어린 원숭이들이 페로몬 물질을 더 강하고 오래 내뿜습니다.”
“…….”
“수놈은 이제 큰일 났습니다.”
규백이 발을 동동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권채우는 턱 끝에 모여든 땀을 손등으로 대충 닦으며 웃음을 흘렸다. 아이의 화법을 그냥 장난으로 넘기려는데 이어지는 말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원장 선생님 인기 많습니다.”
“……얼마나?”
“가끔 여기에 들르는 제재소 목수 아저씨, 묘목상 아저씨, 환경부 기자 아저씨 전부 비슷한 냄새가 납니다.”
“…….”
“수놈은 좀 더 분발해야 합니다.”
어느새 규백이는 땅을 가로지르는 개미 떼에게 시선을 빼앗긴 후였다. 그제야 권채우는 눈앞의 꼬마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곤충 박사님이 한 분 더 계시긴 한데……. 요즘은 학교에 다니느라 방문이 뜸하네요.’
‘교단에도 서시는 분인가 봐요.’
‘초등학교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야매 박사님이군.
권채우가 무릎을 굽히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자 규백은 멀뚱멀뚱 커다란 손만 쳐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수놈. 앞으로 수놈은 내 조수입니다.”
그렇게 서열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조용한 오후.
이연은 따뜻한 티를 마시며 널찍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했다. 오늘은 권채우의 수면 검사와 동악산 쪽으로 나무 왕진을 가는 날이었다.
머그컵을 입가에 댄 그녀는 문득 운동 중인 남자를 힐끗거렸다.
나무 밑동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권채우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팔굽혀펴기를 했다. 팔과 등 근육이 특히나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허공을 향해 길쭉하게 뻗어있는 다리는…….
“……!”
아니다, 아니야.
이연은 툭 불거져 있었던 수건이 생각나 괜히 고개를 내저었다. 남성의 신체란 대왕버섯처럼 눈에 띄는 부분이 있어 스스로 단속하지 않으면 자꾸만 궁금해지는 것이다.
“암컷 공작새는 멀리 있을 때 수컷의 꽁지 윗부분을 보고, 가까이 있을 땐 아랫부분을 집중적으로 봅니다.”
“……악!”
이연이 흠칫 놀라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규백이 창문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치미 떼듯 자못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규백이 언제 왔어? 밥은 먹었어?”
“원장 선생님이 수놈의 생식 부위를 뚫어져라 봅니다.”
“그, 그, 규백아.”
“암컷은 수컷의 깃털의 색깔이나 길이를 중요하게 봅니다. 모양과 무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이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것 참 까다로운 공작새네.”
색깔, 길이, 모양, 무늬? 깃털이 그렇게나 중요했어?
“원장 선생님도 특질이 우수한 수컷만 훔쳐봅니다.”
“뭐?”
“역시 까다롭습니다.”
“…….”
벙찐 그녀는 이내 규백의 입에 쿠키를 물려 주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아이의 귀 뒤에 때가 꼈는지 안 꼈는지를 확인하고는 우유를 따라 주었다.
규백이는 가방에서 두툼한 백과사전을 꺼내며 다시금 이연을 올려다보았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원장 선생님. 코끼리를 조심합니다.”
“응?”
“조심합니다.”
평소 표정이랄 게 없던 규백이의 얼굴에 일순 긴장이 서렸다. 아이가 책의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짐승들의 발정기』.
요즘 규백이가 읽고 있는 목차였다. 귀를 한껏 펼치고 있는 거대한 코끼리가 페이지의 반절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랑이 고픈 수컷 코끼리는 괴수가 됩니다.”
“어?”
“수컷 코끼리는 발정기가 오면 난폭하게 돌변합니다. 그때는 절대 접근하지 않는 게 동물원의 법칙입니다.”
규백이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책을 자판기처럼 두드리는 손짓이 퍽 급박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