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두 손 가득 차 있던 꽃잎이 별안간 바람에 흩날렸다.
남자의 손에 들린 건 분명 아카시아일 텐데, 왜 언젠가 그가 뜯어 먹었던 닭의 모가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이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아카시아 하나가 입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시범 먼저 보여줘야죠.”
서늘한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권채우는 관찰하듯 그녀를 유심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음.”
이연은 얼떨결에 아카시아를 쪽 빨아먹었다. 입술 위로 타들어 갈 것 같은 시선이 내려앉았다.
“한 번 더요.”
그가 재차 이연의 입술에 꽃을 넣어 주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통통한 아랫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맛있어요?”
“음……. 어릴 땐 맛있었는데요, 지금은 그렇게까지 달지 않아요. 요즘엔 워낙 다른 간식거리들이 많으니까…….”
“그럼 혀는 어떻게 써요?”
“네?”
그녀가 별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양 눈을 키웠다.
“여기 보면 꿀이 나오는 구멍이 있던데―”
그가 아카시아의 끝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연 씨는 그냥 빨고 끝이에요?”
“어…….”
“혀를 뾰족하게 구멍 안으로 넣어야 끝까지 다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남기면 아깝잖아요. 한번 그렇게 해 봐요.”
이번엔 직접 해 보라는 듯 꽃을 건네기만 한다. 이연은 자신이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권채우의 눈치를 보며 아카시아의 끝을 살살 핥기 시작했다. 잇새를 가르고 조심스럽게 나온 붉은 혀는 애가 탈 정도로 어설퍼서. 코앞에서 픽, 웃는 소리가 났다. 이연은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로 덧붙였다.
“저는 원래 이렇게 안 하거든요!”
“그럼요?”
“그냥 끝을 살짝 씹어서……”
“씹어요?”
“네, 그렇게 씹으면 남아 있던 꿀이 팍 터져서…….”
권채우는 낮게 드리운 그림자처럼 눅눅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연은 더 다가갔다간 한순간에 삼켜질 늪을 피하듯 말소리를 점차 줄였다.
“좋네요. 그렇게 먹어도 맛있겠어요.”
권채우도 꽃을 빨기 시작했다. 그는 이연을 빤히 쳐다보며 입속에서 혀를 굴렸다. 홀쭉하게 들어갔다 나오는 뺨이 미끈했다.
“이연 씨.”
때마침 그가 손을 뻗어 이연의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 그녀가 뒷걸음을 치자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묻었어요.”
그럴 리가 없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뻔한 핑계에도 이연은 열감이 일었다.
“아무래도 난 벗겨 먹는 쪽이 취향인 것 같아요.”
속절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 * *
현관문이 쾅 닫히는 순간 정신없이 입술이 맞붙었다.
권채우는 그녀를 벽에 처박듯 밀어붙이고는 아랫입술을 빨았다. 뜨거운 혀가 입 안을 절박하게 헤집고, 점막을 훑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당기자 고개가 젖혀졌다. 그러자 더 깊은 곳까지 혀가 들어왔다.
“흐…….”
이연은 처음 겪는 감각에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사람과 이렇게까지 깊숙하게 닿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입술을 물어뜯듯 씹으며 혀를 밀어 넣었다. 두 살점이 얽히며 혀뿌리가 삼켜졌을 땐 모든 잡생각이 날아갔다. 두툼하게 밀려드는 그를 받아내느라 숨이 다 헐떡거렸다.
“하으……!”
잠깐, 잠깐만…….
대체 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그냥 사이좋게 꽃을 나눠 먹고 있었는데!
이연은 몽롱한 머리로 조금 전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노을 아래, 무언가가 부푸는 듯했던 묘한 분위기였다. 그녀로선 처음 겪어 보는 낯선 기분에 푹 잠겨 있을 때, 별안간 무시무시한 표정의 권채우가 그녀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녀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를 한 차례 밀었다. 그럴수록 남자는 각도를 틀어 더욱 질척하게 입술을 맞춰 왔다. 집요하게 엉겨 붙고 치댔다. 입술을 빨고 혀를 휘감으며 연신 어지러이 섞였다.
다시 한번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뜨겁게 얽히는 입술과는 정반대인 서늘한 눈빛이었다.
움찔 놀라 몸을 빼려 하자 그 낌새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그가 거칠어졌다. 그녀의 몸을 힘껏 끌어안고 꽃꿀이 남아 있는 입술을 씹듯이 빨아 당겼다.
혀가 엉기는 소리는 야릇했다. 흐릿한 신음 위를 그가 훑고 지나갔다. 이연의 몸이 절로 파들거렸다.
이러면 안 돼.
머릿속에서 새빨간 경고등이 울렸다.
뿌리쳐.
이연이 다소 센 힘으로 그의 어깨를 퍽 때렸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얼굴 각도를 바꾸며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으읍……!”
이연은 이제 거리낌 없이 적극적으로 퍽퍽, 그의 어깨와 목을 때렸다. 입술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고 꽉 잡힌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녀가 빠져나가려 할수록 속박하는 힘은 거세졌다. 권채우는 입천장을 느긋하게 문지르며 도리어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이 팔걸이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에도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이연의 몸 위를 자연스럽게 차지한 남자는 혀를 강하게 빨아올린 뒤 입술을 뗐다.
젖은 살갗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
흥분에 들떠 내뱉는 그의 숨결이 야릇했다. 왜인지 바짝 날이 서 있는 눈빛이 허기진 야생 동물처럼 예민했다.
“내가 여기서 부부 관계를 갖자고 하면, 내 아내는 과연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요.”
“어……, 어…….”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 숨만 몰아쉬었다. 이연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두툼하고 딱딱한 무언가가 그녀의 복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게 발기한 성기라는 것쯤은 아무리 경험이 없는 그녀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묵직하게 꾹 눌러오는 무게가 대답을 재촉했다.
“……우린 플라토닉하게 지냈는데요?”
“그건 옛날이잖아요.”
권채우가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일축했다.
“내가 그때 그 권채우랑 같은 사람으로 보여요?”
이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닐 텐데.”
그가 묘하게 눈웃음을 쳤다.
“그 조루 새끼는 잊고, 새로운 내연남이랑 놀자고요.”
분명 이 관계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을 텐데. 이연은 불현듯 또 다른 급류에 휩쓸리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내려 입술을 물었다.
“앞으로도 착하고 얌전하게 굴게요.”
점막을 훑으며 밀어 넣은 혀가 그녀의 타액을 훔쳐 갔다. 막무가내로 살갗을 씹던 처음과는 달리 제법 보드랍게 맞추는 입술이 애틋했다. 그러나 꿰뚫을 듯 쳐다보는 시선이 건방지다.
“이연 씨가 빼라면 빼고, 박으라면 박고.”
그가 이연의 티셔츠를 입질하는 개처럼 물었다. 천을 잇새로 집어 가는 와중 그녀의 앞가슴이 앞니에 긁혔다. 이연은 괜스레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게……. 난 그게 좀 어려워요…….”
“무슨 뜻이에요?”
생각 없이 휩쓸리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이연은 사전을 뒤지듯 쓸 만한 말을 찾아냈다.
“권채우 씨도 아마 나랑 하기는 싫을 거예요.”
그가 슬쩍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목석이에요.”
“…….”
“들었어요? 내가 바로 그 유명한 나무토막이에요.”
그 한마디가 팽팽했던 공기를 단번에 갈랐다.
“……저, 저번에도 말했지만 서로 사이즈가 안 맞아서 성교 시 통증도 있구요. 저는 타고나길 목석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으로 누워만 있어요. 말만 들어도 재미없죠?”
“재밌네.”
“네?”
권채우가 눈매는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웃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얼버무릴 수 있을지 재밌어서요.”
“……!”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앞으로 이연 씨는 좀 더 충실한 모습을 보여야 할 거예요. 우리가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가 맞다면.”
떠보는 듯한 눈길에 이연은 손끝부터 떨려 왔다.
“다음번에도 오늘처럼 흥분하고, 달려들어서, 똑같이 물어볼 생각인데. 그때는 제대로 된 답을 미리 준비해 놓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라는 것만 알아 둬요.”
그가 이연을 번쩍 일으켜 소파에 제대로 앉혀 주었다.
* * *
예기치 못한 키스를 하고 어색하게 떨어진 사람과 다시 한 이불을 덮어야 하는 상황은 정말이지 곤혹스러웠다.
이연이 씻고 나올 동안 권채우는 그녀의 사무실에 들렀다 왔는지 낯익은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이연 씨, 좋은 꿈 꿔요.”
“……권채우 씨는요?”
“먼저 자요, 나는 이것 좀 읽다 잘게요.”
그가 2층 침실의 불을 끄고 들어왔다. 이제 방에는 협탁에 놓인 수면 등만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불을 들추고 들어와 침대맡에 등을 기댔다.
사라락 넘어가는 종이 소리가 새벽처럼 적막하다.
“…….”
잠이 오지 않는 건 이연도 마찬가지였다. 낮잠을 늘어지게 잤더니 자정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눈이 또랑또랑했다.
결국 이연은 이불에 폭 감싸인 채 남자의 옆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활자를 눈에 담고 있는 그는 꼭 다른 인물처럼 점잖았다.
절절 끓었던 성기를 들이밀 땐 언제고 종이에만 시선을 두는 그의 담백한 태도에 그녀는 도리 없이 휘둘렸다.
배가 맞닿고 다리가 얽혀 있었던 일이 자꾸 신경 쓰이는 건 자신뿐인 듯해서. 별것 아닌 말, 의미 없는 기척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때 탁, 하고 권채우가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