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대로 맞아서 이빨 나가고 싶지 않음 조용히 해요.”
“으……. 으으…….”
그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네요.”
권채우는 다시 그를 끌고 집 밖으로 나갔다. 하필이면 동네 골목에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황조윤은 그만 눈물이 찔끔 나고 말았다.
더욱 놀란 점은 권채우가 그가 몰래 사들인 주택을 향해 정확히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으……!”
황조윤은 찢어진 입 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몸부림을 쳤다. 그건 본능이었다. 이 남자와 단둘이 집에 들어가서는 결코 안 된다고.
“내가 황조윤 씨 은신처를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으으……!”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 앞집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이연 씨랑 섹스하면 저기서 다 보이겠다.”
예사롭지 않은 폭력에도 절대 흥분하지 않던 목소리가 별안간 비틀렸다.
“나라면 저 집을 사겠다.”
“……!”
“끝까지 숨기지 그랬어요. 이연 씨가 절대로 눈치 못 채게. 방식이 어설프면 상대만 괴로워요.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죠.”
“으으…….”
“애새끼처럼 굴다 좆 되느니 개새끼가 낫거든.”
권채우는 건장한 성인 남성을 참 쉽게도 끌고 갔다. 그는 앞집 대문을 패듯이 발로 차며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그들이 낡은 주택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 황조윤은 비닐봉지를 손목에 끼고 유유히 걸어오던 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으으……. 으으으!”
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마지막 찬스였다.
“으으으!”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손발이 묶인 황조윤의 꼴을 빠르게 확인하는 것 같았다.
됐다, 됐어! 황조윤의 눈에 환희가 깃들었다.
그런데…….
“……! 으읍……! 으으으으!”
남자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제 걸음만 재촉했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간 곳은, 허탈하게도 바로 옆집이었다. 그 사실이 황조윤을 더욱 좌절케 했다.
대체 이 나라의 인류애는 다 어디로 갔는지!
황조윤에게 구원은 없었다.
끼이익 쾅. 대문이 닫혔다.
집 안에는 천체 망원경으로 오해할 만한 커다란 고배율 렌즈가 창가 가까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대충 신문지를 깔아 놓은 바닥에는 이미 시들시들해진 검붉은 장미꽃이 다발로 쌓였다.
탁자에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야구 모자를 벗은 남자는 창가에 앉아 습관처럼 소이연의 집부터 확인했다.
어제 그 난리를 피우더니 결국엔 잡힌 모양이다.
“하……. 어쩌다 도련님한테 걸려서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권채우를 마주친 건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재회의 감격도 잠시, 여전한 피지컬과 악력을 보는 순간 진저리가 쳐졌다.
머리 말고 차라리 몸뚱이가 다쳤더라면.
“그래도 손은 좀 아끼시지. 그게 얼마짜리 손가락인데.”
남자는 그렁그렁해진 눈을 팔뚝으로 슥 닦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얼핏 본 권채우의 눈이 이상스레 침착했다. 불같이 지랄 맞은 성격임에도 때때로 권태롭게 늘어지긴 했지만, 그렇게 순하게, 길들여진 개처럼 고분고분하게 가라앉아 있기는 또 처음인지라. 기억을 잃었다더니 그 말이 진짜인 듯했다.
“이사님, 저 범희입니다.”
우리 도련님이라면 머리가 백치가 됐대도 뒤탈 없이 사람을 잡겠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보여야 했다.
* * *
이연은 오랜만에 늘어지게 잤다.
부스럭대며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멍하니 이 나른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자신의 베개에 스민 낯선 체취에도 별다른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몽롱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이채를 되찾는다.
“권채우 씨……!”
이연은 급히 거실로 달려 나갔다.
남자는 작업용 탁자에 서서 새빨간 꽃을 다듬고 있었다. 가시를 제거하고 시든 잎을 망설임 없이 싹둑싹둑 잘라 나가는 폼이 제법 능숙했다.
이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걸음을 멈추었다. 권채우는 멀뚱멀뚱 서 있는 이연을 발견하고 먼저 알은체를 해 왔다.
“이연 씨, 푹 잤어요?”
그가 선선히 웃으며 꽃을 내려놓았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피가 바짝바짝 말랐던 지난 일주일이 비현실인 양 느껴졌다. 그가 이연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자 그녀가 이끌리듯 다가갔다.
“……뭐 하고 있었어요?”
“꽃꽂이 연습했어요.”
“왜요?”
“다시 일하고 싶어서요. 얼른 일상으로 돌아가야죠.”
“…….”
가슴이 뜨끔거렸다. 거짓말에 후회는 없다. 이연은 스스로 잘못 꿴 첫 단추에 대해 미련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를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꽃은 어디서 났어요?”
“따 왔어요.”
“따 와요?”
“네. 요 앞에 피어 있던데요.”
그가 눈짓으로 창문 밖을 가리켰다.
그 짧은 찰나, 이연은 남자의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턱선부터 귓바퀴까지 흠 하나 없이 매끈하고 균일한 피부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되돌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머리 묶어 줄까요?”
“……아, 제가, 제가 지금 좀 그렇죠?”
이연이 당황하여 부스스한 제 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가 차분하게 이연을 붙잡고 빙글 돌렸다.
“내가 만지고 싶어서 그래요.”
꽃을 묶고 있던 고무줄을 빼내 잇새에 물었다. 두 손으로 이연의 머리카락을 올려 잡자 비밀처럼 드러난 목덜미가 여리고 깨끗했다.
“황조윤은 이제 그런 짓 못 할 거예요.”
그녀가 흠칫 몸을 굳히는 게 느껴졌다. 권채우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마음 편하게 먹어요.”
이연이 어색하게 정수리를 만졌다. 곱창 밴드로 대충 아래에나 묶던 머리를 별안간 위로 질끈 동여매니 인상이 사뭇 달라 보였다.
“예쁘네.”
“어……. 저요?”
그녀가 굼뜨게 반응했다. 남자는 픽 웃음을 터트리며 탁자에 몸을 기댔다.
“이연 씨는 전혀 모르고 있었나 봐요. 밖에 나갈 땐 작업복 뒤에 숨어도, 밤에는 다 씻은 상태로 내 침대에 들어오는 거.”
“……!”
“그 민낯이 얼마나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지 알아요?”
이연은 폭격에 맞은 듯 멍하니 서 있다 별안간 급작스럽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 *
진홍빛 노을이 그녀의 작은 등을 비추었다.
이연은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낀 채 화단 정리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물을 주고, 흙을 새로 덮어 주고, 삐죽이 자란 가지를 자르는 숙련된 손길에선 애정이 묻어났다.
채 자라지 못한 잎을 대하는 그녀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열렬해서, 권채우는 그녀의 집중을 뺏어 오고 싶었다.
‘내가 식물인간이었을 때에도 저렇게 보살폈을까.’
권채우는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작업을 할 때의 그녀는 전래 동화에 나오는 어린 나무꾼 같았다. 삽화 속에서 톡 튀어나온 모습으로 종종거리면 이쪽은 아예 망태기에 넣어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필요와는 별개로 이끌리고 욕심이 났다.
타인이라면 인연을 오려서 붙이고, 이미 가까운 사이라면 짐승처럼 흘레붙으리라. 얼마간은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외출할 때의 소이연은 나름대로 포장을 해 보겠답시고 이것저것 뒤집어썼지만, 껍질을 벗고 나면 놀라울 정도로 뽀얗고 청초했다.
정갈한 눈썹, 선량한 눈매, 작고 동글동글한 코, 통통하고 붉은 입술. 그것들이 주는 여파를 소이연은 분명 모르고 있다.
잘된 일이었다.
내내 무표정했던 권채우는 그녀가 짓는 미소를 흉내 내 보았지만 괜한 갈증만 났다.
이연이 보듬고 있는 건 저 조막만 한 잎사귀일 텐데, 왜 그의 몸이 움찔거리는지.
그렇게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이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고, 꽃이 핀 나무를 칭찬하듯 맨손으로 쓰다듬었다. 땅에 떨어진 꽃을 주웠고, 앙증맞은 콧잔등 위로 노을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불현듯 그녀가 이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
그로선 처음 보는 청명한 미소였다. 무심코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어여삐 벌어지는 입술에는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봄과 여름이 전부 담겨 있었다.
‘너……. 네가 정말 소이연 남편이 맞아? ……증거 가져와. 서류 뭐라도 떼 와서 보여 봐!’
권채우는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단단한 껍데기는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감출 수 없이 뜨거웠다.
“이연 씨, 꽃 빨아 본 적 있어요?”
“아……. 어릴 때는 몇 번 먹어 봤어요.”
“그럼 알려줘요.”
“뭘……요?”
두 손 가득 꽃잎을 담고 있던 이연이 되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권채우는 여유롭게 담장 쪽으로 걸어가 하얀색 아카시아를 꺾어 왔다. 이연이 움찔거리며 그를 말리려 했지만 꽃은 눈 깜짝할 새 후드득 뜯겨 버렸다. 그 억센 손길이 자못 위협적이어서 이연은 숨을 죽였다.
“어떻게 빨아야 밑바닥까지 전부 핥아먹을 수 있는지, 이연 씨가 가르쳐 주면 좋겠어요.”
“…….”
“나는 조금도 남겨 두고 싶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