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섭섭하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묘하게 한수호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눈치라 이현은 통화를 하면서도 그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제야 한수호가 제 치졸함을 자각하고는 서둘러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자신은 이현과 연관되기만 하면 자제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어린 시절로 회귀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사하고 나서도 집들이 한 번을 안 하잖아. 나랑 다른 팀원들은 아직 기숙사에서 살고 있어서 그렇다 쳐도. 팀장이랑 가이드는 새 보금자리까지 얻었으면 집들이를 해야지. 안 그래?
진표성을 비롯한 알파 1팀은 아직 협회 내에 있는 기숙사 건물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이현과 한수호는 김솔을 데리고 있어야 하기에 그들보다 서둘러 보금자리를 알아본 거였다.
진표성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이현은 바쁜 일상에 내내 미뤄 뒀던 집들이를 떠올렸다.
“아, 그러면 다 같이 날짜를 잡아 볼까요?”
아직도 세상은 과거의 시간에 할퀴어져 예전과 같은 모습을 완전히 되찾고 있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소소한 것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현과 알파 1팀은 어느 누구보다도 전쟁의 한복판에서 생존한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순간마저도 귀하게 느껴졌다.
이현이 머릿속으로 일정을 떠올리면서 집들이 날짜를 언제로 정하는 게 좋을지 고민할 무렵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네?”
―나랑 팀원들, 가이드 집 앞이거든. 우리 먼저 들어가 있는다?
“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현은 바보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전화가 뚝 끊겼다. 통화한 시간이 박제되어 있는 화면을 빤히 내려다보는 이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얼른 가자.”
저택은 보안이 철저하지만 진표성을 비롯한 알파 1팀이 함께 모여 있다면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수호가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검은색 세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싹 유치원’이라고 명패가 붙어 있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제가 솔이 데려올게요.”
한수호가 내리기도 전에 이현이 먼저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한수호도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기 위해서는 차의 시동을 끄지 않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솔아.”
“아저씨!”
유치원 문을 열기 무섭게 입구에 오도카니 서 있던 김솔이 우다다다 발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어머, 솔아. 그렇게 뛰면 위험한데.”
이어 김솔을 담당하는 유치원 선생님이 입구까지 걸어 나왔다. 행여나 아이가 넘어질세라 서둘러 걸음을 옮긴 이현이 김솔을 품에 안아 들었다.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제법 무게가 많이 나갔다.
“솔이가 하루 종일 이현 씨 얘기만 하더니, 오늘도 일찌감치 입구에 나가서 기다리더라고요.”
이현에게 안긴 김솔의 양다리가 이현의 허리 옆에서 달랑거렸다. 또래 아이들과 있을 때는 마치 어른처럼 의젓한 김솔이 이현만 만나면 여느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게 신기했다.
“우리 솔이가 아저씨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이현이 솔이의 뒷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매만지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솔이도 잘 가.”
“네. 선생님.”
팔이 점점 떨리기 시작하자 이현이 서둘러 정차되어 있는 차로 향했다. 심각한 운동 부족이었다.
김솔을 안은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한수호가 서둘러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에는 김솔의 전용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현과 달리 가뿐하게 김솔을 건네받아 의자에 앉힌 한수호가 꼼꼼한 손길로 안전벨트까지 채웠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서 와.”
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한수호도 활짝 웃으며 다정한 울림을 남겼다.
“어……? 이거는…….”
아이의 둥그런 눈이 제 옆자리에 닿았다. 영민한 아이라 쇼핑백 위에 그려진 로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수호 형이 솔이 선물로 사 오신 거야. 아저씨 것도 있어.”
“우와아!”
김솔의 양 볼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제법 살이 오른 토실한 볼이 움찔움찔했다.
김솔이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건 오랜만이라 이현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아, 그리고 솔아. 오늘 집에 손님들 와 있어. 솔이도 아는 사람들이야.”
“표성이 삼촌이요?”
“맞아. 아마 나리 이모랑 다른 삼촌들도 와 있을 거야.”
“와아아아!”
게임기를 발견했을 때보다도 아이가 더욱 큰 환호성을 내질렀다. 고사리 같은 손을 맞붙여 짝짝 박수 소리까지 내는 모습에 이현도 덩달아 말간 웃음소리를 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한수호의 입꼬리도 어느새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 * *
“정원에 뭐가 없네. 애 키우는 집이면 그런 티가 나야 하는데 너무 삭막한 거 아니야?”
규모에 비해 사는 사람은 세 명이라 항상 집은 적막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다. 김솔도 아이치고는 얌전히 앉아 책을 읽거나 이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때아닌 손님들의 방문으로 도떼기시장처럼 시끌시끌했다.
“안 그래도 이쪽에 그네 의자 설치하려고요. 연못은 생각보다 공사가 커질 것 같아서 고민 중이에요.”
진표성의 말에 이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그동안 일이 바빠 집을 가꿀 시간이 없었다.
하프 좀비들을 가이딩하는 일이 서동연을 끝으로 얼추 마무리됐다. 앞으로는 집안일에도, 아이에게도 더 신경 써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여기 능력자가 널려 있는데 무슨 공사를 해.”
진표성이 황당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한쪽에서 고기 굽기에 여념이 없는 황두학과 김진수를 가리켰다.
“……두학아, 그거 비계 아니야. 살코기야.”
“헉, 정말요?”
“그냥 내가 할게. 가서 앉아 있어.”
“어떻게 그래요. 제가 막내인데…….”
“막내가 고기 구워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냥 얌전히 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다.”
이현은 진표성이 왜 두 사람을 가리켰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야 두 사람은 흙과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자였으니까.
“하지만 연못은 배수로도 뚫어야 하고. 그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런가?”
단순히 흙을 퍼내고 그 안에 물을 붓는 건 쉽겠지만 연못이 유지되게끔 만드는 건 다른 문제이리라.
진표성도 이현의 말을 듣고서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대신 그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팀장이랑 사는 거, 재미있나?”
흘리듯이 한 말이었으나 음성에 묻어난 씁쓸함을 이현은 놓치지 않았다. 이현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어떤 말을 꺼내야 최대한 진표성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한다 해도 결국 진표성을 상처 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네. 너무 행복해요. 힘들었던 일들도 빛바랜 추억으로 남을 만큼이요.”
그렇기에 이현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처럼 진표성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여느 때보다 행복을 느끼는 건 사실이기에 목소리는 고목처럼 굳건했다.
대신 흔들린 건 한낮의 햇살처럼 선명한 노란빛을 머금고 있는 눈동자였다.
“……그래. 행복하면 됐지, 뭐.”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련을 털어 버리듯 진표성이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이현은 그의 감정에 동요돼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낼까 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다 떨어졌네요. 안쪽에서 좀 가져올게요.”
다행히 진표성은 이현을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뭘 무겁게 혼자 들고 오냐고 같이 일어났을 사람인데.
“후우…….”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야 이현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꼭 죄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속을 잠식하려는 상념을 털어 내기 위해 이현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주류 창고로 향했다.
이현도, 한수호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집에 아이까지 있으니 더 삼가기도 했다
주류 창고는 저택을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거였다. 그동안 한 번도 초대한 적이 없었으나 오늘 같은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는 걸 알아 미리 다양한 종류의 술을 구비해 뒀다.
“나리 씨는 레드와인을 좋아하고, 표성 씨는 위스키 종류를 좋아하고…….”
이현이 사람들의 술 취향을 중얼거리며 술병들을 하나씩 하나씩 안아 들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같이 올 걸 그랬나.”
다섯 병을 넘어가자 술병 하나는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팔에 걸쳐졌다.
아무래도 걸어가면서 떨어뜨릴 듯해 이현이 한번 갔다가 다시 오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릴 때였다.
스으윽―.
이현의 발치에서 그림자가 일어나더니 술병들을 가져갔다.
“수호 형?”
“한동안 안 나오길래.”
한수호는 김솔에게 게임기 작동 방법을 설명해 주러 2층에 올라갔었다. 이현은 1층과 정원에서 손님들을 상대하고.
간접조명만이 은은하게 밝혀진 공간 안으로 장신의 남자가 별안간 들어왔다.
“힘들지는 않아? 이만 가라고 할까?”
알파 1팀만 왔다면 이렇게 정신없지는 않았을 텐데. 김진수의 여동생부터 동고동락했던 사람들까지.
저택에 방문한 이들의 수는 열 명을 가뿐하게 넘어갔다.
이현도 협회에서 일할 때 오고 가며 인사한 이들이라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불시에 벌어진 일이라 고되기는 했다.
다행히 진표성이 먹을거리는 다 사 들고 왔지만.
“괜찮아요.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 진짜 오랜만이잖아요.”
다들 할 일이 많았다. 임태한은 새로운 협회장의 자리에 올라 오늘 집들이도 저녁 9시는 되어서야 도착할 예정이었다. 원래는 한수호에게 제안한 자리였지만 그가 거절했다.
“다음 주에 같이 휴가 낼까?”
“휴가요?”
“그동안 너무 쉼 없이 달려왔잖아.”
한수호가 가만히 손을 뻗어 옅게 음영 진 이현의 눈 밑을 엄지로 부드러이 쓸었다. 평소보다 흰자위에 붉은빛이 도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솔이도 같이요? 요즘 유치원 친구들이랑 부쩍 친해졌다고 아침에도 잘 일어나는데.”
이현은 김솔을 입양했다. 법적으로 가족이 된 날 김솔은 이현의 품 안에서 양쪽 눈이 부어오르도록 울었다.
아직은 ‘아빠’라는 호칭이 어색한지 여전히 ‘아저씨’라고 부를 때가 많았다.
“이나리한테 부탁했어. 솔이 일주일만 봐 달라고.”
둘만 떠나고 싶다고 넌지시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현은 쇄골께에서 번진 열기가 목덜미까지 잠식하는 걸 느꼈다.
아이방이 따로 있지만 김솔이 틈만 나면 두 사람의 침실로 찾아왔다. 전쟁의 상흔은 아이에게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 때문에 이현은 한수호와 입을 맞추며 야릇한 분위기에 달아올랐다가도 서둘러 김솔을 품에 안고 떨리는 등을 도닥거렸다.
그때마다 한수호는 두툼하게 솟은 고간을 말없이 내려보다가 욕실에 들어가고는 했다.
“……좋아요.”
무수히 스쳐 지나간 밤이 아쉬운 건 이현도 마찬가지였다. 혈기 왕성한 남자 둘이 매일 밤을 공유하면서도 끝까지 가지 못하는 건 생각보다도 슬픈 일이었다.
밤이 아닌 낮에 시간을 낼 수도 있겠으나 두 사람이 쉴 틈 없이 바쁘다는 게 문제였다.
“이현아.”
“네.”
한수호가 저번 주보다도 살이 빠진 듯한 볼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시선을 맞췄다.
어느새 단단한 팔이 이현의 허리를 감싸 안아 바짝 끌어당겼다. 몸이 가까이 닿자 두 개의 시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사랑해.”
“어…….”
고백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타이밍이었다. 여전히 술병들은 그림자에 감싸인 채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고, 정원에서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다양한 소음을 냈다.
2층에서는 김솔이 갖고 싶었던 게임기에 푹 빠져들어 고사리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현은 한수호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또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현도, 한수호도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속삭인 적은 없었다.
이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낯이 뜨거워져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열기가 목덜미를 잠식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어둑한 공간이지만 한수호의 시야에는 붉어지는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해, 이현아.”
심장이 빠르게 뛰다 못해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현이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주먹 안에 말아 쥘 때였다.
“……입 맞춰도 돼?”
방금 전 고백을 할 때는 떨림이라고는 모르는 사람 같더니 이어 속삭이는 목소리는 미세하게 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현이 발끝에 힘을 줬다. 제게 쏟아져 내리는 눈빛에 문득 숨이 막혔다. 이 숨을 다시 틔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단 하나.
“저도…… 사랑해요, 수호 형.”
땅에 못 박힌 듯이 붙어 있던 발뒤꿈치가 서서히 지면에서 멀어졌다. 반대로 떨어져 있던 입술은 제자리를 찾아가듯 가까워져만 갔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감촉에 이현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옆얼굴을 만지고 있던 손이 자연스럽게 목덜미를 감았다.
“하아…… 형…….”
이현도 두 팔을 들어 한수호의 목뒤를 감쌌다. 발뒤꿈치가 떨어지다 못해 발끝으로 몸을 지탱해야 할 만큼 몸이 들렸다.
추락감은 들지 않았다. 단단한 팔과 손이 떨리는 이현의 몸을 안정감 있게 받쳐 줬다.
오고 가는 숨결이 황홀해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현은 한수호가 주는 감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심장이 옮겨 붙은 듯 박동이 느껴지는 살덩이를 허공으로 내보였다.
서늘한 온도가 느껴질 새도 없이 저보다 더 뜨거운 것이 입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이현은 기꺼이 제게 들이닥치는 숨결을 받아들였다.
이 사람하고 있으면 어떤 미래가 다가와도 모두 괜찮을 것 같았다.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해 때때로 현재의 삶을 침식하려 드는 과거의 잔상 또한.
한수호가 제 곁에 있다면 이현은 살아갈 수 있었다.
두 사람분의 호흡이 밀폐된 공간 안을 가득 채워 갔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