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제 팔에 주사 놓는 정강필 뒤로 움직이는 놈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아. 너무 빨라서 형체는 제대로 못 봤는데 대충 정강필이랑 덩치가 비슷해.”
―정강필이 두 명인 것 같다는 건가요?
“역시 우리 신부는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구나?”
서동연이 양손을 마주 붙여 짝짝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묶여 있는 정강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작은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그를 훑어봤다. 찰나지만 정강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목도했다.
“문제는…… 도망갈 곳이 없는 걸 이미 확인했는데 어디로 튀었냐는 건데.”
―조금만 더 자세하게 확인해 주실 수 있어요?
“당연하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현의 부탁은 웬만한 건 다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분한 이현의 목소리를 듣자 정강필의 뒤를 쫓으면서 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한결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응! 나만 믿어!”
이후로 한수호가 이현에게 아티팩트를 건네받아 뭐라 뭐라 추가로 말했다. 하지만 서동연의 머릿속에는 잘 부탁한다는 이현의 말이 너만 믿는다는 말로 변해 메아리치는 중이었다.
“으으…….”
끈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정강필의 앞으로 서동연이 마실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눈꺼풀에 난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어느덧 멎어 있었다. 꼼질거리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점점 싸늘해져 갔다.
잔인한 상상이 휘몰아치는 서동연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정강필이 어떻게 해서든 몸을 움직여 서동연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으으읍……!”
“그러게 왜 자꾸 쓰잘데기없이 반항을 하려고 해. 얌전히 있으면 될걸.”
정강필의 손가락 하나가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나뒹굴었다. 질척한 피가 단면을 따라 흘러내려 순식간에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도플갱어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도플갱어를 만나 본 적이 없어 정말 몬스터인지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일단 겉모습이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모두 사람과 같았기 때문이다.
“대장! 이쪽에 뭔가 있습니다!”
서동연이 핏빛으로 물든 메스를 담배처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엄지 끝으로 찌푸려진 미간을 매만질 때였다.
뒤쪽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던 하프 좀비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서동연을 불렀다.
“뭐 발견한 거야?”
“네!”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인지 하프 좀비의 목소리가 밝았다. 서동연이 정강필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며 그에게 다가갔다.
“흐으……. 으…….”
아무도 지혈을 해 주지 않아 상처 부위에서 끝도 없이 피가 쏟아져 내렸다. 지독한 고통에 앓는 소리를 내도 서동연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야, 먹지 마. 지지야.”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강필의 손가락을 눈독 들이는 한 하프 좀비의 머리통을 곁에 있던 다른 동료가 손바닥으로 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사람 먹는 거 들키면 너 대장한테 바로 목 뜯겨. 정신 차려.”
서동연을 따르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인육을 금기시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선한 인간의 피는 기본적으로 하프 좀비가 거부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아, 알아.”
동료에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놈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서동연의 뒤를 쫓아갔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들 뒤로 새빨간 핏물에 잠겨 있던 손가락이 재가 되어 사라져 갔다.
* * *
“……도플갱어라니.”
이현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귓불을 매만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을 간신히 넘었는데 또 다른 산이 눈앞에 나타난 것처러 막막했다.
“서동연이 생포해서 올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한수호의 마음도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제 기분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대신 이현의 불안함을 달래 줬다.
“몸은 좀 어때? 오늘도 피 뽑은 거 맞지?”
“아, 그게…….”
이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현은 좀비 치료제를 완성한 후 틈만 나면 제 피를 뽑아 대고 있었다.
한수호가 곁에서 일정량 이상의 피를 뽑지 못하도록 제재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빈혈로 쓰러졌을 정도로.
한번 피를 뽑으면 최소 사흘은 쉬어야 한다는 말에 오늘 새벽녘 몰래 피를 뽑은 참이었다.
좀비 치료제는 우선적으로 에스퍼와 가이드들부터 맞고 있었다. 아직 일반 사람들은 좀비 치료제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을뿐더러 사람 수에 비해 치료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리 와. 지금부터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내려오면 안 돼.”
한수호는 이현에게 제 모든 걸 내어 줄 정도로 다정하게 대한다. 하지만 단 하나. 이현의 안위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 깐깐한 선생님처럼 굴었다.
이현이 당장 해야 할 일이 떠올라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술을 떼어 봤지만, 일자로 굳은 입매를 보고는 얌전히 한수호의 품에 몸을 맡겼다.
그에게 안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움직일 때였다.
“팀장! 가이드! 큰일 났어!”
저 멀리서 진표성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현의 안색 또한 창백해졌다.
이곳에 터를 잡은 후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는 중이었다. 정강필은 도주하고 있었고, 한수호와 함께하는 세력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중이었으니까.
아직 정강필이 붙잡히지 않았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지독할 정도로 끈질기게 이어져 온 전쟁이 머지않아 끝날 거라고 다들 희망에 찬 소리를 했다.
그러던 와중에 진표성이 사색이 되어 달려오는 모습을 마주하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애들이…… 사라졌어. 솔이 포함해서.”
“그게 무슨…….”
진표성이 면목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엉망이 되어 버린 협회와 대한민국을 유지하던 시스템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진표성을 비롯한 알파 1팀은 물론, 다른 능력자들도 모두 밤낮없이 일하는 중이었다.
생존자들은 점점 종로구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얼마 전 이현은 김솔과도 재회를 했다.
‘흐어엉……. 아, 아저씨…….’
재회하기 전에도 통신 아티팩트를 통해 서로의 목소리는 들었으나 직접 만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김솔은 이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작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도록 울기 시작했다. 이현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힌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나중에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 이현은 김솔이 진정할 때까지 아이를 품에 안고 계속해서 달려 줘야만 했다.
‘아저씨, 솔이 안아 줘요.’
오늘 아침에도 졸린 눈을 비비면서 다가와 품에 한참 동안 안겼다 간 아이였다. 생존자들이 모이면서 아이들의 수도 늘어났다.
덕분에 김솔도 친구들이 많아져 오늘도 에스퍼들이 만들어 준 간이 놀이터에 가 논다고 했었는데…….
“사라진 애들은 총 세 명이야. 다른 애들 말로는 모험 놀이 한다면서 폐건물 쪽으로 향했다는데. 간식 주러 갔을 때 보니까 흔적이 끊겼어.”
진표성이 엉망이 되도록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아이들이 길을 잃은 거라면 좋겠지만, 폐건물 안쪽에서 채 마르지 않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김솔이 신고 있던 신발 한쪽과 함께.
“솔이가 사라진 위치가 어디예요?”
이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한수호가 앞장서라는 듯 진표성에게 눈짓했다. 이현은 한수호에게 안겨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사라진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솔아, 솔아……!”
이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김솔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렀다. 남아 있는 핏자국이 김솔의 것이라 생각하니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수상한 흔적이 있어.”
이미 다른 에스퍼들이 모여서 아이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한수호도 이현을 품에서 내려 준 후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찢어진 천 조각이었다. 폐건물 안에는 잡다한 물건들과 쓰레기들이 가득했다.
한구석에는 아이들이 쓰레기를 주워 모아 소꿉놀이를 한 흔적도 보였다.
특별할 것 없는 천 조각인데도 한수호는 그 끄트머리에 말라붙은 미세한 핏자국을 발견했다.
“진표성, 냄새 맡아 봐.”
“이리 줘.”
한수호의 감각도 예민한 편이기는 하지만 후각에 있어서는 진표성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진표성이 반쯤 수인화 상태로 천 조각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콧잔등이 씰룩거릴 때마다 진표성의 샛노란 눈동자가 번뜩였다.
“저쪽이야.”
진표성의 손끝이 폐건물 뒤쪽을 가리켰다. 천 조각에서 맡아지는 체취가 희미하게 어디론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현아, 너는 이곳에 있어. 나랑 진표성이 꼭 솔이랑 다른 애들 구해 올 테니까.”
“하지만…….”
이현이 미련 남은 목소리로 뭐라 더 말하려 하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기 무섭게 한수호와 진표성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