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결말인데. 아무래도 하늘이 너를 저버렸나 봐. 네가 생각해도 그동안 해 온 짓이 고약하기는 하지?”
서동연도 다른 이들보다 정의롭거나 이타적인 삶을 살아왔다고는 털 난 양심으로도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정강필보다는 괜찮게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불로불사라는 허무맹랑한 허상을 좇아 자신이 아끼던 이들까지 배신해 가며 사지로 밀어 넣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부하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낸 건 맞으나 그들 또한 그걸 알면서 명령에 응했다.
“크윽……. 이거 놔…….”
정강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세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의 발끝이 서동연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렸으나 서동연은 여유롭게 미소 짓기만 했다.
“커헉…….”
서동연이 쥐고 있던 정강필의 목을 놓은 후 주먹으로 명치를 거세게 후려쳤다. 목뼈를 부러뜨리면 즉사할 수도 있으나 명치는 몇 번 때려도 숨이 끊기지는 않을 터.
정강필이 눈을 홉뜨며 컥컥댔다. 한껏 벌어진 입가를 따라 걸쭉한 침이 흘러내렸다. 더러운 모습에 서동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끈을 휙휙 돌렸다.
“그동안 개고생한 거에 비해 결말이 너무 싱거울 지경인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허공에서 힘차게 원을 그리던 끈이 정강필의 몸을 속박하기 시작했다. 두 팔을 등 뒤로 돌려 발목과 연결해 묶어 버린 후 서동연이 미간을 긁적거렸다.
“천도 하나 가져와 봐.”
“여기 있습니다.”
부하가 가져다준 천을 뭉쳐서 정강필의 입 속에 욱여넣었다. 아직 정강필이 명치를 맞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천을 집어넣는 건 쉬웠다.
“긴 천 하나도.”
이어 길쭉한 천까지 건네받은 서동연이 뭉쳐 넣은 천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도록 둘둘 감아 정강필의 머리 뒤에서 묶었다.
“으읍…….”
일부러 힘을 강하게 준 탓에 끈처럼 되어 버린 천 위로 정강필의 살이 볼록 솟아올랐다. 아마 몇 분만 지나면 피부 위에 멍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건 서동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길 만한 일이었다. 지금도 번들거리는 시선은 멀쩡하게 꼼지락거리는 정강필의 손가락에 닿아 있었다.
“손가락이 꼭 열 개 다 붙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서동연이 하려는 짓이 뭔지 알게 된 정강필이 고개를 격하게 내저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수없이 고통을 줬던 사람이 보일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람이 이기적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나이프.”
“여기 있습니다.”
서동연의 오른손 위로 날카롭게 벼려진 메스가 놓였다. 날 위에 하얀 전등 빛이 반사됐다.
“읍……!”
서동연이 손가락을 자르기 전에 날 끝을 정강필의 눈동자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종이 한 장만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거리라 정강필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코옥.”
제 입으로 효과음까지 내면서 서동연이 정강필의 눈꺼풀 위를 쿡 찔렀다. 살갗만 벨 정도로 힘을 준 터라 마치 피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처럼 정강필의 얼굴 위로 붉은 물길이 생겨났다.
“진짜 웃기는 놈이네, 이거. 그토록 자신만만해하던 모습은 다 어디 갔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싱거운데.”
정강필은 이곳으로 도망 오기 전에 자신이 끌고 온 놈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자신과 알파 1팀이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상황 속에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었다.
결국에는 어마어마한 위력의 폭탄까지 터트려 도주에 유유히 성공한 놈이었다.
물론 그 뒤에 자신이 하프 좀비의 세력을 다시 제 편으로 끌어당기고, 알파 1팀 쪽에서도 움직여 배신한 능력자들을 제압했다고는 하지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새끼 이거, 도플갱어인 거 아니야?”
그러다 번뜩 든 생각에 서동연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도플갱어는 유럽 쪽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몬스터였다.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도플갱어가 등장하는 던전이 열린 적이 없었다.
“안쪽까지 더 샅샅이 뒤져 봐.”
“네!”
상식적으로 벌어지기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워낙 정강필은 또라이 같은 놈이었다. 어떤 놈이 불로불사에 미쳐서 이 같은 스케일 큰 미친 짓을 벌인단 말인가.
보통 또라이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좁다고 느낄 정도로 종횡무진 움직인 놈이었으니 유럽 쪽에 줄이 닿아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밀 통로 같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서동연에게 지시받은 하프 좀비들이 안쪽의 공간을 쥐 잡듯이 뒤져 봤으나 수상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분명히 뭔가 있어.”
이럴 때는 에스퍼들의 능력이 아쉬웠다. 마력을 다루는 그들은 에스퍼만이 사용 가능한 아티팩트가 있을 만큼 신체 구조가 달랐으니까.
“일단 이 새끼 잘 감시하고 있어.”
“네.”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한 기분이 들어 서동연은 직접 공간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강필이 이상행동을 보이기 전에 제 팔에 주사했던 주사기와 약병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이것들 좀 챙겨.”
“네.”
하프 좀비 중 하나를 불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사기와 약병, 그리고 정강필이 손댔던 것들을 모조리 챙기게 했다.
서동연이 기감을 예민하게 끌어올렸다. 벽에 다가가 손끝으로 쓸어 보면서 이질적인 곳이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벽이 아니면…… 천장? 바닥?”
정강필의 흔적을 쫓아 협회 쪽으로 향했을 때도 천장에 비밀 공간이 있었다. 물론 그곳에 기어 올라갔을 때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했지만.
“그러고 보니 그때 벽에서 나타났지.”
자신은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던 부분인데. 벽이 일렁거리더니 이건오가 주인공처럼 등장했었다.
“그 새끼 시체도 확인해야 했는데. 아, 왜 이렇게 다 찜찜한 일투성이야.”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쯤 이건오도 건물 잔해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자신이 거의 반 시체로 만들어 놨으니까.
불길하게도 포박해 둔 정강필에 이어 이건오까지 머릿속에 떠오르자 볼일을 보고 뒤처리를 제대로 안 한 듯한 찜찜함이 들었다.
“한수호.”
―정강필은?
서동연은 결국 통신 아티팩트를 이용해 한수호에게 연락을 넣었다.
예전에는 이 목소리를 들으면 호승심과 제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행태에 살심이 치밀어 올랐는데 지금은 옅게나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역시 사람, 아니 하프 좀비는 오래 살고 볼 일……. 이게 아니지.
“정강필을 붙잡았어.”
잠시 삼천포로 빠지려는 생각을 단단히 붙든 서동연이 바로 본론을 말했다.
―상태는? 죽인 건 아니겠지?
“야, 날 뭘로 보고. 이래 봬도 내가 맡은 일은 잘해 낸다니까?”
한수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불신에 서동연이 발끈했다.
“손가락 하나 안 건드렸어. ……눈꺼풀만 콕 찔렀지.”
뒷말은 속삭이듯이 아주 자그마했다.
“아무튼 정강필 새끼는 붙잡았는데 뭔가 좀 이상하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
“물론 내 능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정강필이 이렇게 쉽게 잡힐 놈이냐고. 이상하지 않아? 나 지금 완전 멀쩡하다니까?”
―…….
최소 팔다리 중 하나는 날아가야 정상이 아닌가. 다른 놈도 아니고 S급 에스퍼인 정강필을 사로잡는 일인데.
원래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게 배로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봐.
그쯤 되니 한수호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모양이다.
“이 새끼가 자기 팔에 주사를 직접 놓더니 갑자기 악을 지르는 거야. 막 얼굴 위로 굵은 핏줄도 생기고.”
당시의 정강필 모습을 떠올린 서동연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스친 잔상에 감탄사를 흘렸다.
“헐, 대박.”
―……갑자기 왜 그래.
상황 설명을 하다가 뜬금없이 감탄사를 내지르는 서동연 때문에 한수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 나 방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어.”
서동연이 스스로에게 연신 감탄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럴수록 통신 아티팩트 건너편에서는 한숨 소리만이 길게 들렸다.
마치 서동연이 제 눈앞에 있다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말하는 그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갈길 듯한 기세마저 은근하게 묻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진짜 천재 같은…….”
―서동연 씨.
서동연의 입술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꿈에서도 그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진득하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신부야!”
양 볼이 봉긋 솟아오르도록 웃는 얼굴이 아이처럼 해맑았다.
―어떤 걸 발견한 건지 저한테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아, 그게 말이지.”
서동연이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정보들을 블록 쌓듯이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수호면 몰라도 이현한테까지 산만한 모습을 보여 주기는 싫었던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