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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119)화 (119/133)

119.

이현이 손에 들고 있던 군것질거리를 다 아이에 손에 쥐여 줬다. 사탕과 초콜릿 몇 개만으로도 자그마한 손바닥 안이 가득 찼다.

“감사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이현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좀비들에게 물리기 직전에 한수호의 도움을 받아 이곳으로 오게 됐다.

종로구에 생존해 있던 사람들이 사설 연구소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이현이 좀비 치료제를 만들 동안 한수호와 진표성, 김진수는 종로구를 돌아다니며 생존자들을 구출했다.

현재 정부와 협회가 거의 무너진 상황이었다. 아무 능력도 없는 일반인들은 자력 생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 안에 스스로를 가둬 구비하고 있는 생필품만으로 버티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학교나 관공서 같은 건물 안에 모여 항전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설 연구소는 5층 건물로 규모가 꽤 컸다. 그러나 에스퍼들이 구해 오는 사람들로 채워지다 보니 항상 물자가 부족한 형편이었다.

게다가 에스퍼들이 나가라고 하면 바로 나가야 되는 처지였다. 그 때문에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에스퍼들과 이현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됐다.

“아니에요. 해솔이 너무 혼내지 말아 주세요. 아이 입장에서는 이 공간이 답답할 만도 하니까.”

이현이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도 이현을 향해 배꼽 인사를 했다. 그 덕분에 엄마에게 혼나지도 않고 하루 한 번 구경하기도 힘든 사탕과 초콜릿까지 잔뜩 얻었다.

친구들에게 가 같이 나눠 먹을 생각에 눈물 젖은 뺨이 연신 실룩거렸다.

아이와 엄마가 멀어진 후 이현이 몸을 돌려 한수호를 마주 봤다.

“형, 저 드디어 치료제 완성했어요.”

이현의 말을 들은 한수호의 표정은 언뜻 보면 무덤덤했다. 그러나 순간이나마 떨린 눈동자를 이현은 놓치지 않았다.

“수고했어. 그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인데.”

커다란 손이 이현의 정수리를 뒤덮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이현이 눈을 감고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치료제를 완성했다고는 하나 아직 효과를 확실히 알 수 없기에 반쪽뿐인 성공이었다.

그래도 한수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간의 일들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아직 피 부분에 대한 건 해결하지 못한 거지?”

“……네.”

그러나 이어진 한수호의 질문에 이현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해야만 했다.

좀비 치료제를 완성했지만 그의 말대로 제 피를 대체할 만한 건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 채혈한 피와 혈액형이 같은 타인의 혈액도 배합해 봤다.

신기하게도 타인의 혈액이 섞이는 순간 제 피는 일반 사람의 것과 같아지고 말았다. 우려하던 게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현재 치료제 양은 얼마나 돼?”

“3천 명 정도는 맞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수호가 현재 연구소 내에 있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봤다.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부터 연구소는 포화 상태가 됐다.

근처에 다른 보호소를 만들어 준다고 해도 사람들은 에스퍼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 때문에 현재 사설 연구소를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 안의 거주 시설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에스퍼들이 돌아가면서 주변을 정찰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덕분에 생존자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 정도 약이면 현재 우리가 구한 사람들에게 주사하기에는 충분해.”

“하지만 아직 효과가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는걸요.”

“사람들한테 강요할 생각 없어. 자원하는 이들한테만 주사할 거야.”

약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사람에게 주사해야만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한테 놓을 거고.”

“수호 형……!”

한수호의 말에 이현이 놀라 그의 팔을 붙들었다. 물론 에스퍼와 가이드에게도 효과가 있는 치료제였으나 자진해서 첫 번째 실험체가 되겠다는 말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네 능력을 믿으니까.”

한수호도 이현을 두고 먼저 죽을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이현의 능력을 믿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자. 난 준비됐어.”

이현이 제 앞에 내밀어진 팔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치료제를 완성했다는 확신도 한수호에게 주사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안개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얼른.”

한수호가 팔을 흔들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통신 아티팩트로 서동연이나 다른 팀원들과도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제 서동연한테서 정강필의 꼬리를 밟았다는 연락이 왔다.

임태한은 벙커에 있는 에스퍼들과 함께 한수호처럼 주변에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뿔뿔이 흩어진 능력자들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정강필이 이끌고 온 놈들은 건물 아래에 파묻혔다. 서동연도 무턱대고 하프 좀비 무리에 들어간 게 아니라 여전히 제 편인 하프 좀비들을 먼저 구출해 낸 뒤에 중립적인 놈들부터 설득하고 있었다.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정강필의 세력은 줄어드는 반면 한수호 무리는 늘어만 갔다.

정강필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청신호였지만 아직 그를 붙잡은 게 아니기에 여전히 위험은 산재해 있었다.

“그래도…….”

한수호의 단호한 음성에도 이현은 섣불리 주사기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이현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한수호가 직접 움직였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이현이 완성한 약물을 주사기에 채웠다. 밀대의 끝에 엄지를 얹고 힘을 가하자 안쪽을 채운 투명한 약물이 주삿바늘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 제가 할게요.”

바늘 끝이 살갗에 닿기 직전 이현이 한수호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서 주사기를 뺏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스스로에게 실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제 혈액 구조가 어떻게 변화할지 몰라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현은 그 순간 마음을 먹었다.

한수호가 만약, 정말 만에 하나라도 잘못 된다면 자신도 그와 함께할 생각을 짧은 시간이지만 수없이 마음 속으로 되새겼다.

손끝이 자꾸만 떨려 이현이 깊게 심호흡했다. 알코올 솜으로 문지른 위치에 바늘 끝이 파고들어 갔다.

고무 패킹의 끝이 가리키는 숫자가 줄어들수록 이현의 심장도 빠른 속도로 뛰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나는 건가?”

“……네. 이론상으로는요.”

마침내 주사기 안을 채우고 있던 약물이 모두 한수호의 몸속에 주입됐다. 한수호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마력을 점검해 봤다.

한수호의 주변으로 어둑한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이 제대로 움직이는 걸 확인한 후 시선을 들어 초조한 얼굴을 들여다봤다.

작은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한수호가 손을 들어 올려 이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 냈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나는 네 능력 믿는데.”

“형은 정말…….”

자신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위험천만한 일에 망설임 없이 달려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시간을 되돌려도 한수호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제 양심을 내려놓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먼저 실험하는 게 좋았을 거란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마력은 문제없이 움직여. 몸 상태도 그 전이랑 똑같고.”

한수호가 평소보다 붉어진 이현의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이현이 잘근잘근 깨문 탓에 당장이라도 핏방울이 맺혀 들 것만 같았다.

“확인하고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이현이 목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참아 내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한수호의 우려대로 새빨간 핏방울이 꽃술처럼 부르튼 입술 위로 피어올랐다.

한수호가 고개를 숙여 혀끝으로 핏방울을 훔쳐 내듯이 핥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수호에 대한 걱정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고뇌하던 이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느새 눈물 한 방울이 마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얼떨떨했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입술 더 깨물지 말고.”

제 타액으로 젖어 든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한수호가 얼빠진 이현과 눈을 맞췄다.

“금방 다녀올게.”

이현은 저도 모르게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제 입술을 두들긴 촉촉하면서도 까끌한 감촉이 계속해서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야? 둘이 또 뭐 했어?”

좀비 치료제 연구가 어느 정도 진전됐는지 물어보기 위해 연구실로 들어오던 진표성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둘만 함께 있으면 이상한 분위기가 계속 흘러서 진표성은 틈만 나면 둘 사이를 방해하러 왔다.

그런데 오늘은 한발 늦은 모양이다. 이미 이현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갰다.

“아, 아니요!”

“좀비 치료제 완성됐어. 확인하러 갈 거니까 따라와.”

이현이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한수호가 가볍게 이현의 볼을 쓰다듬은 후 진표성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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