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일부 문들은 열쇠로 열리도록 조처해 놨습니다.’
그 말을 하던 정강필의 얼굴이 떠오르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 홍채로 인식되게끔 비상구 문에 조치만 해 놨어도 자신이 지금처럼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문을 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도대체, 어떤 열쇠가……!”
기억을 더듬어 시도해 봤던 열쇠들을 제외하고 다른 열쇠를 구멍에 끼워 넣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열쇠가 헛돌았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에 들어가 몹시 따가웠다. 연구소장이 초조하게 열쇠 꾸러미를 내려다봤다.
이제 시도하지 않은 열쇠는 단 하나.
이것마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정강필은 애초에 자신에게 제대로 된 열쇠 꾸러미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달칵―.
이제까지와는 다른 맞물림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 위로 기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느낌이 났다. 연구소장이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에 벅차오르는 숨을 가쁘게 내쉴 때였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구소장의 눈이 홉뜨였다. 분명 이 목소리는…….
“탈출구가 여기군요.”
임태한은 연구소장이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데도 무표정했다. 연구소장의 손을 툭 치워 내고 열린 문 건너편을 시야에 담았다.
기나긴 복도가 문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 침입할 때 사용한 환풍구와는 다른, 사람이 걸어서 나갈 수 있는 통로였다.
“이 열쇠는 잠시 제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안 돼……!”
연구소장이 뒤늦게 손을 뻗어 봤으나 그의 손에 걸리는 거라고는 허공뿐이었다. 열쇠 구멍에 꽂혀 있던 열쇠를 빼내 주머니에 챙겨 넣은 임태한이 절망에 빠진 연구소장과 살아남은 연구원들을 둘러봤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남아 있다면 이곳을 함께 빠져나가는 방법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살아남은 이들도 다들 크고 작은 상처들을 몸에 달고 있었다. 심한 상처들이라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과다 출혈로 쇼크가 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지금도 여전히 사방은 커다란 진동음에 휩싸여 제대로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 잔해물들을 쏟아 내는 중이었다.
“사, 살려 주……! 아아악!”
임태한은 목적을 달성하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연구소장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그는 쓸모를 다했다.
그들은 현재 살아남는 것에 집중하고 있으나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분명 열쇠를 가지고 있었지. 아마 탈출구와 관련이 있는 것일 테고.’
한수호가 임태한에게 한 말이다. 임태한은 그 말만으로도 한수호가 제게 내린 명령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다 죽일까요?’
그렇기에 그의 의중을 물었다. 연구소장을 바라보는 한수호의 눈에 어린 분노는 자신보다도 강했다.
높은 확률로 이현을 처참한 몰골로 만든 게 그일 테니 분노한 심정이 이해가 갔다. 자신도 당장 연구소장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니까.
‘운에 맡기지. 죽는다면 운이 좋은 편이겠고.’
모르는 사람들은 한수호의 성정이 다른 에스퍼들보다도 유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킨 임태한은 알고 있다. 그는 분노할 필요가 없는 일에는 지독하리만치 냉정하다는 걸.
연구소장은 살아남으면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았다는 후회를 수백 번이고 할 터.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에 굳이 그의 안위를 챙기지 않는 것뿐이다.
열쇠를 챙긴 임태한이 서둘러 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에 새로운 무리가 난입했다. 터져 나오는 고함과 진동하는 피비린내가 살벌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려 줬다.
“으아아아! 이 새끼들이 진짜!”
전투가 벌어진 한가운데에서 악을 지르고 있는 놈의 모습이 단연 눈에 띄었다.
그가 끼고 있는 통신 아티팩트를 한수호에게 건넨 장본인, 서동연이었다.
* * *
“……이건 또 무슨 개같은 상황일까.”
정강필의 뒤를 쫓는다는 일념으로 미로처럼 구불거리는 통로를 기어가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기가 차는데 벽을 이루고 있던 공간이 갑자기 녹아내렸다. 별안간 나타난 무리에 서동연의 입술 사이로 기가 찬 숨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이야, 대장.”
분노로 일그러지는 눈에 박혀 든 건 반질거리는 정수리였다. 정수리 위로 파르스름하니 드러난 해골 문양이 선명했다.
쭉 찢어진 눈매는 둥글게 휘어져 있지만 그 안에 들어찬 눈동자에는 살기가 그득했다.
“흐으……. 대, 대장님…….”
자신을 끌어내린 이건오만 나타났다면 서동연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어 얄밉게 웃고 있는 눈을 뽑아 버렸을 거다.
문제는 그의 손아귀에 목이 잡힌 채로 흔들리는 이 때문이었다.
‘저도 언젠가 대장님처럼 멋진 하프 좀비가 될 수 있겠죠?’
유독 자신을 잘 따르던 하프 좀비 중 하나였다. 애틋한 동료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김태훈을 분노한 한수호에게 미끼처럼 던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살렸겠지.
서동연은 제 안위와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아끼던 부하들 또한 언제든지 사지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잔혹성이 있기에 거친 하프 좀비들을 수년 동안 이끈 거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제 부하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의 손에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건 다른 얘기였다.
바지는 아래로 축 늘어진 데다 반팔 아래 드러난 것도 없었다.
“확실히 하프 좀비라서 그런지 생명력이 질겨요. 사지를 뜯어내도 죽지 않는다니까요.”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사지를 한 번에 뜯겼다면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현재 이건오가 인질처럼 붙들고 있는 강지우는 하프 좀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일반 좀비가 됐다가 곧바로 하프 좀비가 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인육조차 탐한 적이 없었다.
수많은 부하들 중에서도 서동연이 강지우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는 건 그가 앳된 얼굴에 피 칠갑을 한 교복을 입고 하프 좀비 무리로 기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저는, 괜찮으니까…….”
떨리는 눈동자 가득 어려 있는 맹목적인 신뢰에 서동연이 이를 악물었다. 그를 제대로 지켜 준 적도 없는 사람을 지금도 대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원망 한 조각 비치지 않는 것까지.
아무리 서동연이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기에는 없던 양심이 되살아나 뿌리째 뽑히는 기분이었다.
“커흑…….”
“씨발 새끼가……!”
강지우의 목을 놓아 준 이건오가 중력의 영향으로 추락하는 강지우의 가슴을 꿰뚫었다. 떨어져 내리던 몸은 가슴을 뚫고 나온 손에 고정돼 공중에서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약한 생명력으로 불타오르던 눈의 초점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동시에 서동연이 이건오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건오가 팔에 달라붙은 벌레를 떼어 내듯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으윽…….”
강지우가 바닥으로 던져져 무력하게 신음을 흘렸다. 뻥 뚫린 가슴으로 빠져나가는 피의 양이 너무도 많아 시야가 뿌예졌다.
서동연에게 약점이 되고 싶지 않아 버텼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오래도록 버텼다. 차마 스스로 죽을 용기는 없어 하프 좀비가 되었어도 어떻게든 인간처럼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죽음이 코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이제야 먼저 떠나보낸 가족들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생각에 죽음이 두려운 것과는 별개로 자그마한 기대감이 가슴속에 피어올랐다.
“버텨. 죽으면 내가 다시 살려 내서 또 죽여 버릴 테니까.”
그런 강지우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처럼 서동연이 다가왔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길게 찢은 뒤 붕대처럼 만들어 피를 토해내는 상처를 압박하는 손길이 재빨랐다.
“……여전히 강하네요, 대장.”
서동연의 힘에 벽 한쪽에 처박혀 있던 이건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제 피 내음에 코끝이 저절로 실룩거렸다.
근처에 인간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싶을 만큼 식인에 대한 욕구가 들끓었다.
“그런데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아요.”
이건오의 양 입꼬리가 찢어질 듯 위를 향해 휘어졌다. 처음 서동연을 만난 날 이건오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프 좀비가 된 후 무서울 것 없던 그가 처음으로 맛본 절망감이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제 육신이 좀비들에게 물어뜯겼던 그 순간처럼 쓸모없이 느껴졌다.
그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이건오는 식인에 발을 들였다. 먹어 치운 인간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몸속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활력이 넘쳐났다.
‘왜 저를…….’
‘그러게. 충동이 자제가 안 되네.’
문제는 가끔씩 본능에 사로잡혀 옆에 있는 동료도 죽여 버린다는 거였지만. 그건 이건오가 생각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힘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부작용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