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 보는데.”
김태진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죽을 뻔한 위기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실험체였던 이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등급의 에스퍼로 각성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한 실험이 촉발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제 추측이 맞는다면 자신은 좀비 치료제 완성과 맞먹을 만한 업적을 달성한 건지도 모른다. 손끝이 근질거렸다.
당장이라도 한수호를 실험대 위에 묶어 놓고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십 가지 이론들을 하나하나 실험해 증명하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실험과 약물이 그가 에스퍼로 각성하는 데 영향을 줬는지 추론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받은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잠시 미동조차 없는 오유화의 시신에 시선이 힐끗 닿았으나 그뿐이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과 실질적으로 연구 성과를 내는 것. 두 가지는 같은 저울에 올릴 수 없을 만큼 무게가 달랐다.
문제는 한수호가 제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거였다. 아무 능력이 없을 때도 결코 눈빛이 사그라들지 않던 놈이었다.
이현이 같은 케이지 안에 들어간 후로는 자신을 향해 불쾌할 정도로 짙은 살기를 내보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놈은 힘까지 얻었다.
아직은 힘을 다루는 게 미숙한 듯 고통스럽게 얼굴이 일그러져 있으나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할 놈이었다.
“윽…….”
“움직이면 이현이 목숨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
김태진의 행동은 빨랐다. 지금 이 안에서 유일하게 한수호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미끼를 사용했다.
이현이 목을 조이는 김태진의 팔을 풀어내기 위해 두 손을 들어 올렸으나 소용없었다. 광기를 띤 놈은 힘도 강했다.
“……너.”
한수호의 시선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김태진은 눈빛만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지금 자신은 수십 갈래로 몸이 찢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한수호의 눈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김태진은 그가 아무리 큰 힘을 각성했다고 해도 여전히 목줄이 채워진 짐승이라는 걸 잘 알았다.
“흐윽…….”
이현의 목을 더욱 강하게 졸랐다. 동시에 살기가 그득하던 한수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정말 이현은 쓸모가 많았다. 좀비 치료제의 핵심 키 역할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에스퍼까지 제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도록 해 줬으니까.
비록 이현이 자신을 배신한 기억을 떠올리면 당장 숨통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싶을 만큼 분노가 들끓었지만, 자신도 이현에게 한 짓이 있으니 한 번쯤은 용서해 주기로 했다.
“형…….”
억눌린 목소리가 이현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흐릿해진 시야에 들어오는 한수호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참기 힘들 정도로 욱신거렸다.
그의 품에 기대 위로받고 싶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로 고됐다. 차라리 실험대 위에서 까무러치고 했던 지난날이 나으리라 여기질 만큼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손끝에서 말라 가는 피의 감촉에 소름이 끼쳤다. 끝까지 자식에게 가혹하게 군 사람이라도 피가 완전히 말라붙기 전에 묻어 줘야 하는데, 미련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혼몽해졌다.
김태진의 팔을 붙들고 있던 이현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김태진은 조절한다고 한 거지만 생각보다도 강하게 이현의 목을 압박하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산소 공급마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자 이현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져 갔다. 한수호는 그런 상태에 다다른 눈을 지금껏 지겨울 정도로 봐 왔다.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이 꼭 마지막 숨결이 끊어지기 전에 이현처럼 동공이 크게 확장되면서 코끝으로 느릿한 숨을 뱉어 내고는 했다.
뚜둑―.
한수호의 이성이 끊어진 순간이었다. 이현의 목을 압박하고 있던 힘이 풀렸다. 귓전을 두들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이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으으…….”
김태진의 목이 완전히 뒤로 돌아가 있었다. 목의 살이 늘어나다 못해 찢어져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뒤통수를 앞으로 내보인 채로 김태진이 뒤로 넘어갔다. 안면을 바닥에 부딪쳐 퍽 소리가 나는데도 김태진한테서는 작은 신음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으, 아아……!”
이현이 머리카락을 거머쥔 채 비명을 질렀다. 홉뜬 눈이 공포에 질린 채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성대가 찢긴 듯 이현의 목소리가 온통 갈라져 있었다. 새파란 핏줄이 목 위에도, 관자놀이에도 선명하게 불거졌다.
“……이현아!”
처절한 비명 소리에 그제야 한수호가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다가가 이현을 품에 안았다. 이현이 몸부림치며 한수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러다 다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칠게 몸을 뒤트는 탓에 한수호가 이를 악물고 이현의 몸을 옭아맸다.
“이현아,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이현의 얼굴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김태진은 살려 둬야 했던 걸까. 오유화는 좀비가 되어 이현을 죽이려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김태진은 아직 인간이었으니까. 비록 그가 이현을 인질로 삼았다 하더라도 이현에게는 저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사람이니.
아니면 이현이 알지 못하게 은밀히 그를 처리해야 했을까.
그러나 모든 건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흘러간 시간은 에스퍼로 각성한 한수호라 할지라도 돌릴 수 없었다.
“흐으, 으…….”
이현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한수호가 이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코끝을 비비며 그와 어떻게든 시선을 맞추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는 한수호를 담아내지 못하고 어딘지도 모를 허공을 바라봤다. 한수호가 그를 부르는 소리도 아예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제 지켜 줄 수 있는데. 아무도 너를 건들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자신이 각성한 힘은 이현을 이런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지켜 낼 수 있다는 걸.
그런데 너무 늦어 버렸다. 자신은 이현에게 제 부모를 모두 죽인 살인자일 뿐이었다. 이현을 구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고는 해도 이현은 눈앞에서 부모가 죽는 걸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으…….”
이현의 눈동자가 기어코 뒤로 넘어갔다. 축 늘어진 고개가 한수호의 팔에 걸린 채 힘없이 흔들렸다.
“안 돼, 제발……. 이현아…….”
눈물과 피로 엉망인 뺨에 입술을 붙이고 귓가에 속삭여도 이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미약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이현이 정신을 잃기 전의 모습이 계속해서 뇌리에 맴돌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이현이 과연 자신을 보고 예전처럼 웃어 줄 수 있을까?
지금은 눈꺼풀 사이로 자취를 감춘 새까만 눈동자가 한없이 보고 싶었다. 어렵게 얻은 힘이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순간에 힘을 각성한 제 운명이 야속했다.
한수호가 떨리는 손을 들어 피에 젖어 평소와 달리 불그스레한 빛을 띠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짓무른 눈가도 엄지로 쓸어내렸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현을 품에 끌어안고 있는데도 그를 잃어버린 듯해 가슴이 미어졌다.
눈동자의 핏줄이 다 터져 나갔다.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제어되지 않은 힘이 실험실 가득 퍼져 나갔다.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그림자들이 실험실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미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좀비들의 사체도 그림자에 걸린 순간 재차 난도질당했다.
화르륵―.
인화성 물질이 들어 있는 유리병이 깨져 하필 천 더미 위로 떨어졌다. 삽시간에 날름거리는 불길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한수호가 이현을 보호하듯이 제 품으로 바투 안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렇게 열고자 해도 열리지 않던 문이 바깥에서부터 뜯겨 나간 건 그때였다. 한수호는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정강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과 이현의 악몽이 깃들어 있는 공간이 화마에 완전히 집어삼켜질 때까지도 그는 고삐가 풀려 버린 힘을 제어하지 않았다.
화마는 정강필이 불러온 사람들이 수습하고 나서야 서서히 잦아들어 갔다.
한수호는 다른 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듯 이현만 품에 끌어안은 채 주변을 경계했다. 아주 오랜만에 지상으로 나와 햇빛을 쐬는데도 그는 감동하기보다 이현의 온기가 혹시라도 식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떻겠니?”
그런 한수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정강필이었다. 한수호가 그 손을 잡은 이유는 단순했다. 이현을 양지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