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85)화 (85/133)

085.

이낙균이 불러일으킨 화염이 임태한의 바람에 의해 전방으로 넓게 퍼졌다. 좀비들은 먹잇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나 하반신이 뼈만 남고 타들어 간 순간 바닥에 처박혔다.

“캬햐아…….”

타오르는 불길이 뇌를 녹여 버릴 때까지도 좀비들은 일행을 향해 손을 뻗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수호는 불길이 채 삼켜 내지 못한 좀비들의 머리통을 단검으로 가른 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폭주 위험 수치가 높은데…….”

뒷말은 삼켰지만 한수호에 대한 걱정은 임태한의 눈동자에 여실히 담겨 있었다. 한수호가 이현을 잃은 이후 반쯤 미쳐서 좀비들을 도륙한 결과였다.

그러나 현재 한수호가 기이딩을 받을 길은 없었다. 이현이 아닌 가이드를 데려온다고 해도 그가 가이딩을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현이 서동연에게 납치당한 이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듯했다.

“구역을 나눠서 수색하는 게 빠르겠어.”

건물은 넓었다. 협회장이 협회 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인 만큼 다른 건물에 비해 건물에 들어간 자재 또한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금이 간 채로 말라붙은 피가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바닥을 워커의 앞코로 두들기며 한수호가 구역을 세 개로 나눴다.

“다들 시계 기능은 제대로 작동되는 건가?”

“……네. 통신 아티팩트는 아직도 먹통이지만요.”

임태한은 한수호가 제 몸 상태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여유 부릴 시간도 없는 건 사실이니 임태한도 숨겨진 연구실을 찾아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수색하고 30분 후에 여기에서 만나기로 하지.”

통신이 된다면 이런 식으로 시간 약속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임태한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수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낙균도 임태한과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김진수한테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감각을 기울이자 심박수도 느려지고 있어 등허리가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이 났다.

‘……이현아.’

한수호가 절박한 심정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빠르게 분석했다. 이현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한 지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이현의 가치는 다른 존재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정강필이 이현을 쉽게 죽일 리는 없다는 걸 알지만, 안전하게 데리고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실험실에서 겪었던 일들이 기억나자 순간이지만 몸이 굳어 버렸다.

건강했던 자신조차 실험 몇 번에는 맥을 못 추고 반 시체가 됐다. 이현은 제대로 된 실험을 한 번만 당해도 초주검이 될 게 분명했다. 과거처럼.

그가 정강필에게 납치당한 후 지난 시간이면…… 족히 수십 번은 더 실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발, 제발…….’

초조함에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온 신경을 집중해 이질적인 것이 있는지 훑어봐도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그림자를 움직여 벽과 바닥, 천장까지 다 건드리고 있는데도 수상하게 느껴지는 곳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험실이라면 지하에 있을 가능성이 높을 텐데. 바닥을 중점적으로 살펴도 말라붙은 핏자국과 시신만 눈에 들어왔다.

‘……마력?’

그러다 한수호의 기감에 이질적인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한수호가 곧바로 마력이 감지된 곳으로 움직였다. 기척까지 최대한 죽여 가며 도착했으나 시야에 걸린 건 떨어져 나온 팔에 채워진 에스퍼용 팔찌였다.

“……대부님.”

정강필을 떠올리는 한수호의 눈동자 위로 소름 끼치는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일의 원흉인 협회장보다도 그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머릿속으로 용암이라도 부어진 기분이었다. 한수호의 발치에서 슬그머니 피어오른 그림자가 꽉 쥐어진 손아귀에서 실체가 있는 포일처럼 구겨졌다.

스스로에게도 통증이 생기는 자학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한수호의 얼굴 위에는 고통에 대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허탕이라는 걸 안 뒤 바로 시선을 움직여 다른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다.

“……팀장님!”

임태한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몰라도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타앗.

한수호가 곧장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휙휙 지나가는 시야에 지금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평소처럼 협회에서 일하고 있을 직원들의 썩어 가는 시신이 어지럽게 얽혀 들었다.

치미는 어지럼증에 한수호가 눈을 감고 긴 호흡을 내쉰 후 걸음을 멈췄다.

“수상한 소리가 들리는 건가?”

“네. 벽 너머에서 희미한 폭발음이 들려왔습니다.”

임태한은 벽에 옆얼굴을 기대고 무언가를 가늠하듯이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임태한이 지척에서 청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였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던 한수호의 기감에는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흔적, 발견한 겁니까?”

이낙균도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와 피가 흩뿌려진 하얀 벽을 간절한 눈으로 응시했다.

“으, 몸이…… 너무…….”

“……진수 형 몸이 불덩이예요. 계속해서 체온이 오르는 것 같아요.”

이낙균은 보통 사람보다도 체온이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사용하는 능력이 화염인 터라 다른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을 때 뜨겁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현재 김진수의 몸은 불덩이라는 표현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달궈지는 중이었다. 피부 아래 불길이라도 지나가는 것처럼 체온이 계속해서 올라갔다.

고온이 지속되면 아무리 에스퍼라도 뇌를 비롯한 주요 장기에 손상을 입기 마련이다. 회복 포션을 통해 회복할 수는 있지만 손상되는 일을 막는 게 더 나으리라.

“이 안쪽에……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있는 것 같군.”

연구실이 지하에 있을 거라 생각해 바닥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벽도 살피기는 했으나 그동안 정강필이 한수호에게 알려 줬던 벙커들의 대부분은 문이 바닥에 나 있어 더 그랬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바람은 미세한 틈으로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한수호가 손에 마력을 집중하자 임태한이 그를 만류했다. 어떤 장치로 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무턱대고 힘으로 여는 건 좋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임태한이 바람을 일으켜 벽에 미세한 틈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벽 아래쪽에서 바람이 안쪽으로 스며들어 가는 걸 확인했다.

“아무래도 문이 이 아래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문의 위치라고 하기에는 성인 남성의 허리춤에도 안 올 어린아이들이나 드나들 법한 높이였다.

안쪽의 형태를 가늠하기 위해 바람을 세밀하게 움직여 봤지만 투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가 벽을 녹여 볼까요? 그러면 안쪽에 숨겨져 있는 게 드러날 테니까요.”

한수호의 허락에 이낙균이 김진수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벽으로 다가섰다. 이낙균이 벽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손을 대지 않은 상태에서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안쪽에 있는 걸 드러나게 하려면 벽의 가장 바깥쪽부터 세밀하게 녹여 나가야 했다.

이낙균의 양손에서 화르륵 타오른 불꽃이 벽의 아랫부분을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벽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액체화되어 바닥으로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철문이네요.”

벽 안쪽에서 드러난 건 자그마한 철문이었다. 개들이 드나들 법한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손잡이는 아예 없고요.”

“지문이나 홍채 같은 걸로 인식되는 거겠지.”

벽 안쪽에 숨겨 둔 공간이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벽을 녹이기 전에는 문의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이곳이 실험실로 향하는 정문이 아닐 가능성도 있고.”

숨겨져 있는 공간으로 연결되는 문이지만 성인 남성이 드나들기에는 지나치게 작았다. 세 사람 중 가장 어깨가 넓은 한수호는 문을 넘어가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빠듯한 너비였다.

한수호가 불꽃에 달아올라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는 철문을 그림자 단검의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날의 끝에 마력을 집중해 그어 내리자 철문 위로 실선이 그어졌다.

끼이이익, 듣기 싫은 소리가 나며 철문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철문의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보다도 두꺼웠다. 한수호가 이어 가로 방향으로도 철문을 그어 버렸다.

툭.

단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철문을 밀어 내자 4등분 된 철문이 뒤로 넘어가 자그마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어 다른 조각들도 한수호의 손길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폭발음이 계속해서 들려오네요.”

철문을 열자 임태한이 들었던 폭발음이 조금 더 커졌다. 세 사람의 시선에 까만 연기까지 잡혔다.

“아무래도 안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이낙균이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실험실이 멀쩡해야 김진수의 상태를 호전시킬 해독약을 찾을 텐데. 폭발음에 매캐한 연기까지 더해졌다는 건 화재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독약이나 해독제 같은 종류는 미세한 온도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이낙균이 먼저 몸을 집어넣으려 할 때였다. 한수호가 그를 지나쳐 몸을 굽혔다.

“내가 앞장서지.”

한수호가 망설임 없이 좁은 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문 안쪽으로는 환풍구 통로 같은 작은 공간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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