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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내가 아는 목소리 아니지……?”
압도적인 좀비 떼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의연했던 이나리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낙균도 좋지 않은 예감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두 사람, 무사히 돌아왔네. 수고했어.”
때마침 문이 없는 방처럼 보이는 곳에서 임태한이 걸어 나왔다. 임태한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이나리는 김진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됐다.
“상처…… 일반적인 게 아닌 거죠?”
회복 포션을 바를 때 봤던 상처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터. 급한 대로 회복 포션을 발라 주기는 했지만 김진수의 몸에 남은 흔적은 단순한 창상 따위가 아니었다.
검게 변색된 살은 좀비에게 물린 사람의 살점이 썩어 들어가는 것과도 달랐다. 이나리는 살점에서 피어오르던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도 기억해 냈다.
“무슨 독이에요? 일행 중에 독 관련한 전문가는 없어요?”
벙커 안에는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 정도면 협회 내의 생존한 모든 능력자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반인도 있었으나 협회 직원들 대부분이 하급 에스퍼인 터라 그 수는 적었다.
“연구원은요? 한 명도 없는 거예요?”
대답하지 못하는 임태한에게 이나리가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갔다. 이나리의 추측이 맞는다면 김진수의 상처는 독에 당한 거였다.
몬스터 중에서도 독을 사용하는 몬스터는 동급의 다른 몬스터보다 까다로운 종류로 취급됐다. 그도 그럴 게 회복 포션은 신체 반응을 원래대로 돌려줄 뿐 독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할 때도 있어서였다.
“부팀장님!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누나…….”
이나리가 답답함에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황두학이 이나리의 다른 쪽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가장 답답한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임태한일 게 분명했다.
이나리와 이낙균이 좀비 웨이브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김진수가 이상 반응을 보였다.
‘크으…….’
‘진수야, 정신이 좀 들어?’
의식을 잃고 있던 김진수가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임태한이 고개를 뒤로 돌려 김진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 김진수의 얼굴 위로 굵직한 지렁이 같은 검은색 핏줄이 불거져 있는 걸 발견했다.
‘진수야!’
남아 있는 회복 포션을 모아 먹여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검은색에 가까운 피까지 토하는 터라 지켜보던 이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저…… 이런 증상에 대해서…… 본 적이 있는데요…….’
김진수의 상태에 대한 실마리는 의외의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김진수의 여동생과 함께 구출된 남자였다. 협회장 비서실 직원이기도 했다.
‘아는 거 다 말해 줘요. 지금 당장.’
임태한의 인내심이 조금이라도 얕았다면 임태한은 송민후가 말을 꺼낸 후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임태한은 제 손바닥에 상흔이 생기도록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그게…… 근데 제가 이거를 공식적으로 본 게 아니라서…… 알려지면 정말 곤란한데…….’
송민후는 임태한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정보의 출처가 자신이라는 게 알려졌을 상황에 대해 걱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 줄 테니까…… 알고 있는 거, 빨리 말해요.’
욕이 튀어 나갈 것 같아 임태한은 말하는 중간중간 음절을 끊어야만 했다.
‘독……에 관련된 거였는데…….’
송민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 싶어서 본 것도 아니었고 정말 우연에 우연이 더해져 발생한 사고였다. 송민후는 그 자료를 본 순간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위험한 정보라는 걸 단번에 느꼈기 때문이다. 잠시 정보를 누군가에게 팔아 이득을 취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잠깐뿐이었다.
‘협회장실이 있는 건물 지하에…… 관련 실험실이 있다는 정보였어요…….’
협회장은 대중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송민후는 가끔 협회장실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 일부가 수상하다는 인상을 받고는 했다.
그들에게 눈에 띄는 이상한 부분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른 직원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별거 아닌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입고 있는 옷은 허름한데 신고 있는 신발은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수제화라든지, 뭐 그런.
송민호가 워낙 다른 사람의 옷차림에 관심이 많아 눈에 들어왔던 부분이다. 균형적이지 않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협회장실에 찾아오는 건 시간도 다양했고, 찾아오는 이들의 연령대와 성별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민호는 내심 협회장이 비자금 같은 걸 만드는구나 지레짐작하고는 했다.
하지만 막상 발견한 정보에 들어 있던 건 일상생활에서 접하기 어려운 ‘독’에 관련된 거였다. 보자마자 잊기 위해 노력했으나 김진수의 상태를 보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말해 줘서 감사합니다.’
임태한은 협회 본부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진수는 의식을 차리지도 못하고 계속 몸을 뒤틀었다. 계속 몸부림치다가는 뼈가 뒤틀릴 것 같아 에스퍼의 능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끈으로 몸을 묶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협회장 쪽에서 독 관련 실험도 한 것 같아. 그걸 하프 좀비들에게 푼 것 같고. 아니면 그놈이 다른 방법으로 얻었든지.”
가이딩실 벽에 살려 둔 채로 고정해 놓은 하프 좀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천천히 죽어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렇게 둔 거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놈의 가죽을 산 채로 뜯어내야 했다는 후회가 치밀었다.
“협회장, 이 씨발 새끼가…….”
“누나, 누가 들어요!”
“들으면 어때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새끼 편들 미친놈이 어디 있다고?”
이나리는 황두학의 만류에도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벌써 동료를 한 명 잃었다. 김종현이 아직 살아 있지만 그가 배신했다는 걸 안 순간 그는 동료가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김진수까지 위험해지고 말았다. 황두학도 천운으로 살아난 거지, 잘못했으면 잃을 뻔했다.
동료는 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언제든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가 가족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연구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해. 좀비로 변한 이들 중에서도 연구원은 없었어.”
임태한이 협회에 접근하면서 마주쳤던 일반 좀비들을 떠올렸다. 다들 인간일 때 입고 있던 옷을 걸치고 있었던 터라 신분을 얼추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연구소에서 탈출한 좀비 몬스터들은 간간이 보였는데 하얀색 연구원 가운을 입은 이들은 보지 못했다.
“협회장 쪽에서 어디론가 피신시켰다는 거겠지. 아니면 아직 지하에 남아 있거나.”
협회장은 협회장실이 있는 건물을 5년 전에 증축했다. 그때 지하에 자신만 아는 공간을 만들어 놨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움직여요.”
이나리가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김진수가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독 관련 전문가가 필요했다.
“……누나.”
임태한도 이나리의 말에 동의했기에 움직일 채비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황두학이 벙커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나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다른 방향으로 따돌리고 왔는데, 왜…….”
벙커가 불길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에스퍼들의 시선이 모두 천장으로 향했다. 지상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는 가이드들도 흔들리는 공간 때문에 두려움에 젖어 들어갔다.
“이 상태면……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겠는데요…….”
황두학이 절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벙커 안에 식수와 식료품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김진수가 얼마나 버틸지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문을 연 순간 좀비 떼들이 쏟아져 내릴 게 분명하다. 능력을 사용해 밀어 낼 수는 있겠지만 좀비 웨이브를 인명 피해 없이 밀어 내는 건 S급 에스퍼 여러 명이 달라붙어야 가능할 일이었다.
“포기할 수는 없어.”
임태한이 김진수가 있는 방을 힐끗 바라보더니 가이드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가이드들 중 상태가 괜찮은 이들은 돌아다니면서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는 중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들 손만 마주 잡은 채 가이딩을 하고 있었다.
“가이딩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임태한이 안면이 있는 가이드 앞에 섰다. 매칭률이 나쁘지 않았던 가이드다.
“우리도 가이딩받자. 부팀장님 말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나리가 황두학과 이낙균에게 눈짓했다. 다들 폭주 위험 수치가 위험할 만큼 치솟은 상태였다. 폭주 위험 수치라도 최대한 낮춰야 능력을 사용할 수 있고, 길을 뚫을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제가…… 가이딩해 드릴게요…….”
내내 김진수의 곁을 지키고 있던 김유진이 방에서 나와 황두학 앞에 섰다.
“……부탁할게.”
황두학이 조심스럽게 제 손을 내밀었다. 김유진이 눈물 젖은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문지르고 황두학의 손을 맞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청량하면서도 포근한 가이딩 마력이 조금씩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