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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71)화 (71/133)

071.

정강필이 손쉽게 진표성의 바지를 뜯었다. 김솔이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이는 행동이 나이보다도 어려 보였다.

진표성이 정강필을 비롯한 이들에게 치료받는 동안 이현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한수호를 살피고 있었다.

“……피가 많이 나요.”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안 다쳤어요.”

한수호가 안심하라는 듯이 이현을 향해 엷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피투성이인 몰골이라 더 안쓰러워 보일 따름이었다. 이현이 떨리는 손길로 한수호의 입가부터 닦아 냈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하얀 수건이 금세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한수호는 이현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얼굴을 만지기 쉽도록 무의식중에 상체를 이현 쪽으로 서서히 기울였다.

집중한 이현의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닫혀 있었다. 다만 가끔 떨리는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한수호는 이현의 표정 변화를 세심한 눈길로 바라봤다.

이현을 걱정시켜 미안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게 좋다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예전에는 이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지고 싶을 때 망설였던 적이 없는데. 다시 시작하는 관계에서는 이현을 바라보는 것도 조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꼭…… 이런 상황을 겪어 본 것만 같아요.”

이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선이 흔들린 건 이현의 말 때문이었다. 이현이 이제는 상체 위에 묻어난 피를 닦아 내면서 무언가를 떠올리듯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이상해요. 그냥 데자뷔라고 하기에는.”

이현이 고개를 들어 한수호와 시선을 맞췄다. 세상에 자신만 존재한다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눈길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한수호와 관련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걸까. 답답한 마음이 들어 수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 위에 파란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러다 손등을 덮어 오는 온기에 조금씩 힘을 풀었다. 한수호는 이현의 손을 쥐고 아직 핏자국이 남아 있는 상체 위에 툭 얹었다.

다른 손은 이현이 인지할 만큼 천천히 뻗어 앞머리 부근을 매만졌다. 그러나 이마에 손끝이 닿자마자 움츠러들어 힘없이 뒤로 물러났다.

“더 닦아 줄래요? 보시다시피 손에 힘이 없어서요.”

엷은 미소가 어린 얼굴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현은 멀어지는 손을 붙잡아 제 머리 위에 가져다 댔다. 방금 전에 한수호가 제 손을 가져가 상체에 두었던 것처럼.

“칭찬받아야 저도 힘이 날 것 같아요.”

그 말을 하고 고개를 숙인 이현의 귀 끝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수호의 입매에 맺힌 미소의 농도가 짙어졌다.

이현의 정수리를 다 덮을 듯한 커다란 손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짙은 시선이 귀 끝뿐만 아니라 붉은 물이 번져 가는 뺨에 닿아 떨어질 줄 몰랐다.

“팀장도 회복 포션 마셔. 상처에도 바르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분위기가 깨진 건 진표성이 둘에게 다가오면서였다. 진표성이 휙 던진 회복 포션을 가볍게 받아 낸 한수호가 회복 포션 병을 만지작거렸다.

“못 열 것 같아요?”

“……그 말 지금 팀장에게 하는 소리야?”

진표성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과연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 얼떨떨해하는 얼굴이었다.

한수호가 누군가. 방금 전에도 S급 좀비 몬스터 외뿔 구렁이 하나를 걸레짝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 모였다는 서울 지부 알파 1팀을 이끄는 팀장이기도 하다.

과연 살면서 웃어 본 적은 있는 건가 의문이 들 만큼 목석같던 사람이 지금은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표성이 소름 돋는 팔을 벅벅 긁어 댔다. 그 후 곧바로 한수호의 손에서 회복 포션을 뺏어 가 뚜껑을 열어 다시 건넸다.

“됐지?”

“……고맙군.”

한수호도 진표성이 두 번이나 건네자 무시하기 힘들었는지 회복 포션을 받아 일부는 마시고 남은 건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가이드, 나는 걱정 안 했어?”

이현의 손끝이 움찔 떨리는 걸 본 진표성이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이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로 두면 애써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행동이 소용없게 이현이 한수호의 몸 곳곳에 회복 포션을 발라 줄 것만 같았다.

언젠가 옥상에서 제 몸에 회복 포션을 발라 주던 조심스러운 손길이 떠올랐다. 왜 이현의 시선은 한수호에게만 가 있는 건지, 속이 상했다.

이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현의 앞에서 알짱거리는데도.

“몸은 좀 어때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잔뜩 묻어난 서운함을 알아차린 이현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진표성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가 벌거벗은 진표성의 상체를 마주하고 입술이 벌어졌다.

“왜 옷을…….”

이 장면도 데자뷔였다. 알파 1팀에 임시 가이드로 파견 가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알파 1팀 사무실로 향했던 날, 처음 자신을 마주한 게 땀으로 번들거리는 거대한 가슴팍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땀에 젖어 있지는 않았지만 방금까지 전투를 하다 온 영향으로 근육들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선망할 만한 멋들어진 몸이었다. 순간적으로 제 빈약한 가슴을 떠올린 이현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갔다.

“답답해서. 나 외뿔 구렁이가 몸 조여서 죽을 뻔했거든.”

큰 부상을 당하기는 했어도 사경을 헤맨 건 아닌데 상황을 과장하는 목소리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미 한수호가 이현의 앞에서 약한 척하는 걸 목격한 뒤였다.

현재 심경으로는 이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듯했다.

“회복 포션 다 바른 거예요?”

“응. 그런데 등 쪽은 덜 바른 것 같기도 하고. 지금 계속 욱신거리거든.”

진표성이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이현에게 등을 내밀었다. 졸지에 넓은 등판을 마주하게 된 이현의 눈꺼풀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혹시라도 남은 상처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왼쪽 옆구리 아래쪽에 진표성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상처가 보였다.

“이쪽 아플 것 같은데. 괜찮아요?”

이현이 손을 내밀어 상처 부위를 눌렀다. 이현의 손끝이 몸에 닿기 무섭게 진표성의 상체 근육이 맥동했다. 혹시나 세게 누른 건가 싶어 이현이 바로 손을 떼어 냈다.

멀어지는 손을 붙잡은 건 진표성이었다. 진표성이 이현의 손을 끌어다 제 옆구리에 척 올려놨다.

“멍 사라지게 문질러 줘. 그러면 바로 나을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현을 바라보는 진표성의 눈빛은 진중하기만 했다. 이현이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살결과 근육의 움직임에 멍하니 굳어 있을 때였다.

“이걸로 찜질부터 해라, 이놈아.”

정강필이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진표성의 어깨에 올렸다. 진표성의 뾰족한 시선이 정강필에게 닿았다. 방금까지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는데 그걸 와장창 깨 버린 그에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근육이 놀랐을 수도 있으니까…….”

이현이 대충 얹어진 수건을 펼쳐서 진표성의 목과 어깨 부근을 감쌌다. 정강필이 건넨 회복 포션을 열어 멍이 생긴 부분에도 발랐다.

볼을 붉히는 진표성을 보고 정강필이 혀를 쯧, 찼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못 떼는 한수호를 발견했을 때는 헛웃음도 나왔다.

“전쟁 통에도 사랑은 싹튼다는 옛말이 틀린 것 하나 없다니까.”

자식 같은 놈들의 사랑싸움을 눈앞에서 목격할 줄은 몰랐다.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을 만큼 흥미로웠으나 이제는 정비를 하고 떠날 때였다.

“수호랑 표성이는 이제 가서 밥 좀 먹어. 너네가 기운이 넘쳐야 긴 여정을 떠날 게 아니냐.”

이현을 진표성에게 빼앗긴 한수호는 소파에서 바로 일어났으나 진표성은 계속해서 미적거렸다. 정강필이 할 수 없이 이현에게 할 일을 줬다.

“가이드는 아이랑 같이 눈 좀 붙이는 게 좋겠어. 거기 두 사람도 마찬가지고. 잘 수 있을 때 자 놔야 일정을 버틸 수 있으니까.”

한수호와 진표성이 무사히 돌아온 걸 확인한 후 김솔은 눈꺼풀을 느릿느릿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아이의 눈동자에 졸음기가 가득했다.

“그러면……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솔에게 다가갔다. 김솔이 자연스럽게 팔을 벌려 이현에게 안겨 들었다.

“저도 같이 떠나요?”

“그러는 게 좋지 않겠어? 지금도 계속해서 벙커가 흔들리는데.”

신민우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자 정강필이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지금도 꾸준하게 천장이 울리고 있었다.

“이곳을 무덤 삼겠다면야,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강필의 농담에 신민우가 꼬리 밟힌 강아지처럼 캥캥거렸다. 김민지가 한숨을 푸욱 내쉬고 신민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냥 입 다물고 들어가서 자요. 아까 밥도 배부르게 먹었잖아요. 전복도 두 개나 먹어 놓고선.”

“아니, 그건…… 에스퍼가 밥 잘 먹고 있으라고 했으니까 난 그대로 따른 거지.”

신민우는 진표성의 몫으로 남겨져 있던 전복도 먹은 참이었다. 그 부분을 콕 집어 주자 신민우가 부엌에 있는 진표성의 눈치를 보면서 곧장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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