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허억……!”
이현이 꿈에서 깨어났다. 심장이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빠르게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단순한 꿈이라면 깨어난 순간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현은 어느 때보다 방금 전에 꾼 꿈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
눈을 깜박일 때마다 방금 자신이 봤던 광경들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이현이 눈시울이 발개지도록 눈을 뜬 채 꿈속 제 기억을 곱씹었다.
이현이 잃어버린 스무 살 때의 기억이었다. 이토록 선명하게 떠오른 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친의 얼굴에 이어 그녀의 연구실을 나와 계단을 향해 걸어가던 과정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꿈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해 낸 이현의 고개가 닫힌 문을 향해 휙 돌아갔다. 왜 자신의 잊힌 기억이 꿈을 통해 떠오른 건지 알 것 같아서였다.
이현이 떨리는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든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건지는 몰라도 문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오는 걸로 보아 아직 잘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달칵. 문이 열리고 드러난 광경에 이현이 한동안 멈춰 선 채로 숨을 깊이 쉬었다.
“아저씨 좋아하는 술은 나중에 마시자. 오늘은 차로 해.”
“목구멍 타들어 갈 정도로 독한 술이 필요한데. 아쉽구만.”
거실 같은 공간에 다들 모여 있었다. 이질적인 분위기에 이현이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진표성은 분명 이곳에 도착해서도 옅은 긴장감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진표성은 마치 이번 임무를 맡기 전 모습처럼 근심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만큼 정강필의 등장이 진표성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리라.
진표성이 정강필과 마주 보고 앉아 찻잔을 부딪치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평소보다 붉은 볼이 그가 현재 얼마나 기분 좋은지 은근하게 드러냈다.
김솔은 소파 한쪽에 담요를 덮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김민지의 무릎베개를 한 채였다. 김민지도, 신민우도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긴장이 풀어진 상태로 손에 든 잔을 홀짝거렸다.
이현의 시선은 뒷모습만 보이는 정강필에게 고정된 채였다.
자신은 저 사람을 안다. 지금의 이현이 아니라 스무 살의 이현은 저 사람을 부모님의 연구소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마주친 순간 꿈에서 깨버려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안한 감정이 마음을 온통 들쑤셔 댔다.
분명 고단한 일정 중에서 지금은 잠시나마 평화로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현은…… 좀비 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오싹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한수호와도 함께하려고 한 거였다.
처음에 한수호를 가이딩할 때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함은 원인 모를 그리움과 설렘으로 변해 갔다.
그랬던 시간이 정강필의 등장으로 모두 다 엉망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김이현 가이드.”
“…….”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가 이현의 앞에 나타났다. 이현이 멍한 시선을 들어 한수호를 응시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검녹색의 눈동자에 제 불안이 전염된 것만 같았다.
“형…….”
“지금 뭐라고……?”
이현이 한수호의 허리춤을 붙들고 그대로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당황한 한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현도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입술이 움직여 ‘형’이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뿐이다.
‘한수호 에스퍼’라고 부를 때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호칭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한수호만의 체향이 코끝을 파고들자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휘몰아치던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 어떻게 만났어요?”
속삭이듯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이현의 온기에 굳어 있던 한수호가 그 말에 떨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가려져 이현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수호는 이 순간 이현이 울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의 끝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이현이 묻는 사람은 정강필이었다. 한수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정강필과 시선을 마주하고 이현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이현도 이상했지만 정강필도 묘하게 이상 반응을 보이는 건 같았다. 찰나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자 한수호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까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바람을 쐰다는 건 지상으로 나가자는 의미일 터. 이곳으로 향하면서 주변에 있던 좀비들을 많이 해치웠지만 언제나 그렇듯 빈자리는 곧 새로운 좀비들이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현은 망설이는 대신 한수호의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한수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호와 함께라면 좀비 떼들 사이에 던져져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뭐야. 둘이 어디 가게?”
“잠시만 나갔다 올게.”
이현과 한수호가 계단 쪽으로 향하자 진표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들기 전에 상태가 이상했던 이현이다. 지금은 괜찮은지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데 이현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진표성이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자 한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양보하기 싫다는 마음이 삐죽 솟아올랐다.
“나랑 계속 얘기해야지. 어딜 가려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움직이려던 진표성을 막은 건 정강필이었다. 정강필이 팔까지 붙잡자 진표성은 할 수 없이 일으켰던 몸을 소파 위로 묻었다.
이현은 등 뒤로 달라붙는 여러 개의 시선을 느끼며 계단을 먼저 올라갔다. 어두컴컴했지만 한수호가 어느새 등 뒤에서 휴대용 랜턴으로 빛을 비춰 줘서 올라가야 하는 계단은 잘 보였다.
“제 등 뒤에 있어요. 나오라고 하면 나오고요. 알았죠?”
“네.”
지상에 다다랐을 때 한수호가 이현을 뒤로 물리고 먼저 나갔다.
“크햐아악―!”
“키익―!”
달빛이 지상 위에도 내려앉을 무렵이었다. 이현의 예상대로 주변에는 또다시 몰려든 좀비들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한수호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달려드는 일반 좀비와 좀비 몬스터들을 단숨에 처치했다.
달빛만이 드리워진 공간에 썩어 가는 피가 흩뿌려졌다. 익숙한 냄새였다. 이현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왔다.
“안아도 괜찮아요?”
한수호가 이현을 안아 들기 전 허락을 구했다. 이현이 먼저 팔을 뻗어 한수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현의 등허리와 오금에 팔을 집어넣은 한수호가 두 사람이 빠져나온 입구를 다시 잘 닫은 후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키햐악……!”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둘의 존재를 인식하고도 좀비들은 따라붙지 못했다. 얼마간 팔을 휘적거린 후 제 동족의 몸에 팔이 부딪치자 새로운 먹잇감을 찾듯이 고개를 휙휙 돌려 가면서 움직이는 게 다였다.
“이제 눈 떠도 돼요.”
이현은 어느 순간부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바람에 눈이 시리기도 했고, 가끔씩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모조리 속이 울렁거리는 장면들뿐이어서였다.
한수호가 이현을 안은 채로 근방에서 가장 높은 건물 난간 위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이현이 까마득한 아래를 보고 한수호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줬다.
“김이현 가이드가 떨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매달려 오는 온기에 한수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다정한 목소리는 이현의 두려움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형.”
“…….”
서로의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현은 ‘형’이라는 호칭에 평정심을 잃고 흔들리는 한수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저한테는 스무 살 때의 기억이 없어요.”
상담사가 아닌 이에게는 처음으로 털어놓는 이야기였다. 기억이 없다는 이현의 고백에도 한수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갑자기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이현은 제 마음인데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강필이 이현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한수호도 그때의 자신과 분명 연관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해서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한수호를 믿을 수 있기에 털어놓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동안 노력해도 떠올릴 수 없던 기억을 이제는 찾을 때가 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 꿈속에…… 정강필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꿈은 아마 잃어버린 스무 살 때의 기억일 가능성이 높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스무 살 때의 기억이 없다는 말에는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가 정강필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깨질 듯이 흔들렸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예요? 제 기억 속 일인데.”
자신이 솔직하게 한수호에게 얘기한 만큼 그도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해 주기를 원했다. 왜 자신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행동했는지 알게 되면 제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날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이현아.”
이번에는 이현이 동요할 차례였다. 언젠가 환청처럼 들려왔던 목소리다. 그때와 달리 음색이 조금 더 낮아졌다고는 하나 분명 같은 사람이었다.
“기억하면…… 힘들 거야. 날 잊더라도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니까.”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수호가 얼마나 자신을 아끼는지 전해졌다.
“……그래도 찾고 싶어요.”
상담사도 그런 말을 했다.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는 만큼 기억을 되찾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