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진표성은 몰라도 한수호까지 그런 의사를 내비치자 이현은 할 수 없이 에스퍼들을 가이딩할 때만큼은 접촉하는 방식을 취했다. 진표성이 가이딩할 때마다 달라붙으려고 해 그와 실랑이하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 건물이 은신처라고? 다 무너졌는데?”
한수호가 앞장서서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진표성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원래는 3층 정도 되는 건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돌무덤처럼 변해 있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는 일반인이라면 하나도 들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워 보였다.
“이거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신민우도 불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일렬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천장에서 우수수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기침이 터질 것 같아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움직였다. 희한하게 이 근처에는 좀비들의 수가 적었다. 그들이 먹잇감으로 삼는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난 곳인 만큼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적은 편이었다.
기침을 한다고 해도 좀비들이 달려들 위험은 낮았다. 한수호와 진표성이 일대의 좀비들이 다 해치운 덕분이었다.
기침을 억누른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본능에 따라 움직인 거였다.
“압사되면 유해는 잘 처리해 줄게.”
진표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열불이 나는 소리를 했다. 신민우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동고동락하면 고마운 마음이 들든, 조금이라도 더 친해질 텐데 진표성과의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짜증만 났다.
“우으윽……!”
“조용히 있어. 거의 다 왔으니까.”
자루 안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자 진표성이 자루를 한 바퀴 휘둘렀다. 발버둥 치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이미 자루는 강준이 처음 들어갔을 때보다 훨씬 더 꾀죄죄해진 상태였다.
진표성이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강준을 자루 안에서 꺼내 주지 않아서였다.
신민우는 강준을 보면서 제 처지가 이만하면 괜찮다는 걸 매일같이 깨달았다. 지금도 진표성에게 뾰족한 말을 하려고 했으나 강준을 보니 입이 꾹 다물렸다.
“다들 조용.”
한수호가 일행을 조용히 시켰다. 김민지는 원래부터 조용했기에 진표성과 신민우만 입을 다물면 됐다.
이현이 두 다리로 바닥을 딛고 섰다. 덩달아 바닥에 내려진 김솔이 익숙하게 이현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을 내려 준 한수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눈살부터 찌푸려졌을 텐데. 한수호가 그런 행동을 하자 중요한 일을 하는 듯했다.
“설마 은신처가 바닥에 있는…….”
이어지려던 진표성의 말은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끊겼다. 진표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수호를 제외한 이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놀라움이 어렸다.
먼지와 쓰레기만 나뒹굴던 바닥에 이질적인 공간이 드러났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걸어 내려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예전에 들렀던 곳들이랑 분위기가 완전 다르네.”
진표성은 이현을 구하러 가는 길에도 폭탄과 무기를 구하기 위해 한수호가 알고 있는 은신처를 몇 곳 들렀다. 하지만 그곳들은 보호 아티팩트로 보호되어 있을 뿐 장소 자체는 평범했다.
일반 가정집이거나 아니면 공장지대에 있는 창고 같은 건물이었다. 지금처럼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입구 같은 건 없었다.
“진표성, 마지막에 내려와.”
“왜?”
“내려오면서 여기에 있는 홈 버튼 눌러. 마력 넣어야 해.”
“그러면 다시 닫히는 거야?”
짧게 고개를 끄덕인 한수호가 이현을 향해 손짓했다. 이현이 김솔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 입구로 향했다.
“제 뒤를 따라서 천천히 내려오세요.”
“네.”
한수호는 이현을 안아 드는 대신 먼저 칠흑 같은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조명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지면 부근의 계단 몇 개를 제외하고는 온통 어둠 속에 삼켜져 있었다.
“가이드, 이거 들고 내려가.”
계단은 가팔랐다. 이현이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앞서 걸어가고 있는 한수호가 붙잡아 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진표성은 재빨리 손전등 하나를 꺼내 이현에게 건넸다. 잡다한 것들이 보일 때마다 이현에게 필요할까 싶어 챙겼던 게 소용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솔아, 아저씨한테 업힐까?”
“네에.”
이현이 김솔을 등에 업고 손전등을 켜 계단 아래를 비추었다. S급 에스퍼는 아주 약간의 빛만 있어도 사물을 대낮처럼 식별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자신과 김솔은 아니었다. 잠시 김솔을 안고 내려갈까 생각했으나 발을 헛디디면 그게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등 뒤의 온기를 느끼면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제 발밑의 계단을 비추면서 한수호가 나아가는 방향에도 빛이 흘러가도록 했다.
이현이 보지 못할 위치에서 한수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손전등 하나 더 없어요?”
“있는데 넌 안 줄 거야.”
진표성이 손전등을 하나 더 꺼내 김민지에게 건넸다. 김민지가 두 손으로 손전등을 받으며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신민우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불평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걸 알아 슬그머니 김민지의 곁에 달라붙었다.
“좀 떨어져요.”
“너도 자꾸 치사하게 굴지 마라. 사선을 몇 번이나 같이 넘은 사이잖아.”
어깨가 스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신민우 때문에 김민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할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 이현의 뒤를 이어 계단을 내려갔다.
한 명씩만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라 다행이었다. 나란히 붙어서 걸어 내려갔다면 신민우를 밀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야, 좀 천천히 가.”
김민지는 겁도 없이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반대로 어두운 걸 싫어하는 신민우가 김민지를 애처롭게 불렀다.
신민우는 완전한 악인은 아닐지 몰라도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김민지도 그곳에 갇혀 있으면서 이타적으로 살지는 못했다. 누군가를 챙기기에는 당장 제 목숨이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목숨이 가장 소중한 것처럼 구는 신민우와는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그가 살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 것에 불과했다.
“알아서 따라붙어요.”
귀찮게 구는 신민우를 떨쳐 낸 김민지가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이현의 등에 업힌 김솔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계단이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야…….”
체감상 1층 높이보다 훨씬 더 많이 내려온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앞서 걸어 나가는 이들은 걸음을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신민우가 구시렁대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진표성도 강준이 든 자루를 챙겨 계단을 내려갔다. 얼굴만 지면 위로 나왔을 즈음에 한수호가 알려 줬던 홈을 마력이 깃든 손으로 눌렀다.
키이이잉. 희미한 기계 소리가 나면서 열렸던 바닥이 다시금 닫히고 있었다. 지상에서 흘러들어 오던 빛이 차단되자 깜깜했다.
진표성도 아래에서 비치는 손전등의 빛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신민우가 투덜대는 것도 이해될 만큼.
“와, 대박…….”
김민지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계단을 한참 내려오면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적당히 시원한 공기에 증발됐다.
분명 지하인데도 외부에 있을 때보다 공기가 더 상쾌했다. 온도조절장치에 공기정화 기능까지 가동되는 공간이었다.
넓은 공간은 거대한 호텔 같았다.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공간부터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조리 공간에 사방팔방에 달린 문들은 짐작건대 침실 아니면 욕실 같았다.
“이제 좀…… 쉬어도 됩니까?”
신민우가 지친 안색으로 간절하게 진표성과 한수호를 바라봤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 근래에 드나들었던 공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깔끔했다.
에스퍼들이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것도 아니라서 제 목숨은 제가 챙겨야 하는 상황이 여러 번 발생했다. 그렇다 보니 긴장감은 한시도 늦출 수 없었다.
이제야 좀비들이 없는 안전한 공간에 들어왔다. 억눌렀던 피로가 온몸을 순식간에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이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한수호가 문 하나를 열었다. 안쪽에는 작은 싱글 침대와 책상, 옷장이 있었다.
“욕실은 이쪽에 있는 걸 사용하시면 됩니다. 아마 온수도 나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신민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공간이지만 그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5성급 호텔 스위트룸이나 다름없었다.
한수호는 이어 김민지에게도 방 하나를 내어 줬다. 이현도 김솔을 땅에 내려놓고 한수호에게 다가갔다.
그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온수가 나온다는 말에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당장이라도 따뜻한 물 아래에 서 있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