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방금 환청처럼 들린 목소리보다 지금은 더 낮고 그윽한 느낌이 나지만 같은 사람이었다. 이현이 떨리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때 당시 병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두고 그가 한 행동에 의문이 생겼었다. 그렇기에 알파 1팀으로 파견 가라는 지시를 따른 거였다.
막상 임무에 나온 이후부터는 정신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져 과거와 관련된 일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인지하지 못하는 새 과거의 기억이 불쑥 떠오를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도 떠올랐다.
“저를…… 원래부터 알았어요?”
“…….”
이현의 물음에 한수호의 눈동자도 돌멩이가 던져진 호수의 표면처럼 파문이 일었다. 한수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현이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침묵만으로도 이현은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이현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잡고 있던 한수호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는 가이딩 안 해 줄 거야?”
“아…….”
진표성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맞잡은 손에 시선이 닿을 때는 날카로웠던 눈매가 이현을 바라보는 순간, 이내 둥글게 휘어졌다.
“머리가 너무 아파.”
방금 한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두통은 이현과 한수호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자 더욱 심해졌다.
“그러면…… 실례할게요.”
이현이 어쩔 수 없이 한수호의 손을 놓고 이번에는 진표성의 손을 잡았다. 진표성이 이현을 향해 커다란 덩치를 숙였다.
“저번처럼 키스로 해 주면 안 돼? 그게 더 가이딩 잘되잖아.”
“그건…….”
이현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의식중에 했던 일이다. 당시 이현은 어떻게든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가 보겠다고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응?”
진표성이 서로의 코끝이 스칠 정도로 고개를 틀어 내렸다. 지척에서 마주친 눈동자에 이현의 볼에도 홍조가 맺혔다.
“진표성.”
“진짜 너무한다니까. 팀장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면서.”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했다. 목석같고, 생전 다른 사람과는 필요 이상의 접촉을 하지도 않던 인간이 이현에게는 망설임 없이 입 맞추던 순간이.
그러나 진표성은 이현에게 그 사실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이라도 이현의 머릿속에 자신과 한 입맞춤만이 떠오르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면 포옹이라도 해 줘.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래…….”
진표성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추욱 늘어지는 양쪽 눈썹은 가식적이었지만 진표성에게도 한수호처럼 짙은 피로가 쌓여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머뭇거리던 이현이 팔을 뻗었다. 진표성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싸 내렸다. 잠시 멈칫하던 진표성이 곧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키며 이현의 어깨 위로 고개를 묻었다.
늘어져 있던 팔이 이현의 등을 감싸 안았다. 닿은 건지 의심이 들 만큼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그렇기에 이현은 진표성을 밀어 내는 대신 목덜미를 통해 그에게 가이딩 마력을 흘려 보냈다.
확실히 손을 잡는 것보다 포옹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는 게 효율이 좋았다. 악수했을 때보다도 수월하게 흘러가는 마력을 느끼며 이현은 눈을 감았다.
가이딩할 때마다 눈을 감거나 내리깔았던 적이 많아 시야가 차단돼야 집중이 더 잘됐다. 한수호와 진표성이면 몰라도 아직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제 눈동자 색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기분 너무 좋다…….”
이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표성이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그가 내쉰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목이 예민한 부위라는 걸 간질거리는 숨을 통해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많이 내려간 것 같은데…….”
몸 전체에 탈력감이 퍼져 나갔다. 가이딩 마력의 양은 늘어났지만 그만큼 한수호와 진표성을 연달아 가이딩하면서 흘려 보낸 양이 많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껴안더니 이제는 이현의 허리를 감싼 손길에도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진표성 에스퍼.”
“아저씨 놔줘요.”
이현이 진표성의 어깨를 쥐고 밀어 내는 동시에 김솔이 다가왔다. 진표성이 입고 있는 바지가 김솔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진표성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꼭 잘못한 학생을 혼내는 선생님 같았다. 아이답지 않은 얼굴에 이현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꼬맹아.”
“저 꼬맹이 아니에요.”
“아저씨는 허리춤에 오지도 않는 사람은 다 꼬맹이라고 불러.”
처음에는 형이라고 불러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진표성은 김솔이 자신을 형이라고 불러 줄 일이 영영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게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빛은 꽤 매섭기까지 했다. 순간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한수호가 이현하고 가까이 있을 때는 가만히 있더니, 왜 자신이 이현과 뭐라도 해 보려는 순간 방해하는 걸까.
“……우리 저쪽으로 가요.”
김솔이 진표성의 바지를 놓고 이현의 손끝을 말아 쥐었다. 이현의 검지와 중지가 김솔의 손안으로 숨어들었다.
안 그래도 이현은 연속된 가이딩에 힘이 없었다. 진표성이 계속해서 달라붙어 고민되던 참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김솔과 함께 움직이는 이현의 뒤를 진표성이 뚱한 얼굴로 따라갔다.
“이 상황만 보면……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 같기도…….”
김민지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가만히 지켜보니 삼각관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전쟁 통에도 사람들은 아이를 낳는다고 하던가.
좀비들이 내는 소리도 그들의 귀에는 감미로운 음악으로 들리는 걸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김민지가 깔끔하게 정리한 침낭을 품에 안아 들고 한 편의 시트콤처럼 움직이는 이현과 진표성, 그리고 김솔을 바라봤다.
그녀의 입가에도 어느새 심각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눈앞에서 동생이 죽는 모습을 본 이후로 처음 짓는 미소였다.
* * *
“이 근처에 은신처가 있다고?”
진표성이 먼지와 땀으로 엉망인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 인상을 쓰고 손을 털어 냈다. 제대로 샤워한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그나마 세면도구는 있어서 이는 주기적으로 닦을 수 있는 게 다행인 상황이었다.
한수호가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인 지도 벌써 사흘째였다. 확실히 지켜야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움직이니 이동 속도가 더뎠다.
“허억, 헉……. 저, 더는…… 못 움직여요…….”
신민우가 무릎을 짚은 채로 허리를 숙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그가 입고 있는 옷도 온통 땀범벅이었다.
진표성은 정말 위급한 경우에만 도와줬다. 신민우는 자루 안에 들어가지 않는 대신 제 발로 뛰고, 가끔은 달려드는 좀비들을 무기로 쳐 내야만 했다.
손에 들린 단창의 날에는 썩은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했다. 불과 사흘 만에 그는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 수의 좀비들을 처리했다.
“후우…….”
김민지는 최대한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에 띄게 지쳐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김민지의 손에도 신민우의 손에 들린 것과 같은 단창이 쥐어져 있었다.
김민지가 땀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훔쳐 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진표성이 의아한 목소리를 낸 것도 이해가 갔다.
주변은 폐허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했다. 협회에서 폭파한 건지 멀쩡하게 서 있는 건물을 찾기가 힘들었다.
구석진 곳에는 어김없이 썩어 가는 사체가 놓여 있었다. 사람의 수가 가장 많았고, 일반 좀비와 좀비 몬스터들도 간간이 보였다.
“이쪽으로.”
한수호가 덤덤하게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장 큰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은 곳이었다. 이현이 불편하게 한수호의 품 안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김솔은 캥거루 주머니 속 새끼처럼 얌전히 이현에게 몸을 기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이들과 달리 이현의 안색은 김솔 다음으로 멀쩡했다. 한수호가 이동하는 내내 이현을 안고 다닌 덕분이었다.
신민우는 그런 이현을 부러우면서도 아니꼬운 눈빛으로 흘겨봤다. 이현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한수호에게 내려 달라고도 얘기해 봤다.
‘김이현 가이드에게 체력이 남아 있어야 저희들도 안전합니다. 가이딩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하고요.’
한수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현의 능력은 게임으로 치면 치트 키였다. 실제로 이현은 일행이 너무 밀린다 싶으면 가이딩 능력을 사용했다.
처음에야 어려웠지, 몇 번 반복하자 이제는 제법 수월하게 허공에 가이딩 마력을 흩뿌릴 수 있었다.
그러다 이현은 한수호와 진표성을 가이딩할 때도 접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접촉해서 가이딩하는 게 더 쉽기는 하다. 하지만 능력을 조금 더 능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비접촉 상태에서 가이딩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싫어. 손잡고 할래. 아니면 포옹.’
그러나 이현의 바람은 사탕 뺏긴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진표성 때문에 날아갔다. 한수호도 은근히 이현이 손을 잡고 가이딩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