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저 멀리서부터 붉은 놀이 슬금슬금 기어 오고 있었다. 현재 건물 옥상에 있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계절이 봄이기는 해도 밤과 새벽에는 온도가 확 낮아진다. 현재 무리에는 일반인들과 아이까지 있는 상황.
찬 바람을 막아 주고 한 끼라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장소를 구하는 게 중요했다. 다들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긴 여정을 떠나야 하는데 초반부터 체력이 바닥인 이상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주변에는 좀비들이 벌 떼처럼 몰려든 상황이었다. 동시다발적인 폭발은 벌집을 건드린 효과를 냈다. 폭발음의 범위가 미친 곳에 있는 모든 좀비들이 몰려들었다.
“괜찮은 장소가…… 있을까요?”
이현의 기억에 자신이 갇혀 있던 호텔이 떠올랐다. 이동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 이 근처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하프 좀비의 본거지였던 이상 그곳에는 아직도 하프 좀비들이 우글거릴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자신의 능력 때문에 서동연이 자리를 피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놈이었다.
“근처에 모텔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정리하고 올 테니 진표성 에스퍼랑 잠시만 있어요.”
진표성과 함께 움직이는 게 더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지만 한수호는 이곳에 남을 이들을 믿을 수 없었다.
하프 좀비였던 강준도 문제고, 생존자들 중 두 명도 문제였다. 그들은 여전히 회복 포션을 자신들에게는 나눠 주지 않은 일로 꽁해 보였다.
“진표성.”
“걱정 말고 다녀와.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진표성이 어깨 근육을 이완시켰다.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일더니 지금은 싹 사라졌다. 피곤함이 남아 있기는 해도 이현이 가이딩을 해 줘서 폭주 위험 수치도 위험 범위를 벗어난 상태였다.
“너도 이리 와.”
“……제 이름, 김민지예요.”
김민지가 조심스럽게 제 이름을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진표성이 계속 ‘야’ 혹은 ‘너’라고 부를 것 같아서였다.
“나 이름 잘 못 외워.”
“못 외우는 게 아니라 안 외우는 것 같은데…….”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한데. 너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구나?”
결코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민지는 하프 좀비들에게 잡혔던 날 이후로 가장 사람답게 행동하고 있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터라 생존자들끼리 있을 때는 어린 나이가 취약점이었다. 그러나 이현도, 그를 구하기 위해 온 에스퍼들도 자신을 지켜 주려고 했다.
오랜만에 받아 보는 보호였다. 그래서인지 원래의 성격이 조금씩 튀어나오고 있었다. 진표성의 말에 김민지가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김민지가 겁먹은 듯 보이자 진표성이 장난스럽게 김민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그러다 오랜 시간 감지 못해 기름진 머리카락을 느끼고는 어색하게 손을 떼어 냈다.
김민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도 났다. 그동안은 생존 위기에 밀려 자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다.
“그쪽들은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진표성이 김민지를 위해 자리를 피했다. 협회 내에도 한창 사춘기인 10대들이 있었다. 그들을 상대한 경험이 있어 다행이었다.
김민지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참에 아예 다른 이들의 이름까지 들어 놓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철희입니다.”
“신민우요.”
생존자들이 조그맣게 제 이름을 말했다. 이름을 누군가에게 말해 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지인이 아니면 불러 주지 않는 이름이었다. 하프 좀비들은 생존자들을 ‘인간’이라고 불렀고, 생존자들이 서로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름 대신 누구에게나 붙일 수 있는 호칭을 사용했다.
두 사람 다 얼굴이 앳됐다. 신민우는 김민지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고, 최철희도 갓 성인이 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려 보였다.
“야. 너는 이름이 뭐냐.”
진표성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강준에게 물었다.
강준의 상태는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좋지 않았다. 진표성이 그를 가장 마지막으로 구해 준 영향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던 건 아니지만 온몸에 상처가 생기기에는 충분했다. 아등바등 버텼던 시간들이 떠오르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꽁하기는. 그럼 앞으로도 좀비 새끼라고 부른다?”
“……강준.”
진표성이 한 번 더 말을 걸고 나서야 강준도 제 이름을 말했다.
“팀장 올 동안 얘기 좀 나누자. 네가 알고 있는 정보 하나씩 다 얘기해 봐.”
“……뭐?”
강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면 너를 왜 살려 뒀다고 생각하는데. 적이었던 놈을 그냥 살려 줄 정도로 내가 마음이 넓어 보여?”
절대 아니다.
오랜 시간 안 건 아니지만 진표성은 제가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는 자라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이현을 보던 눈빛이 제게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봐도 자신을 보는 것보다는 온기가 돌 것 같았다.
“왜 자꾸 다가와……?”
“네가 곱게 말하면 안 들을 것 같아서.”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오는 진표성을 피해 강준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원래도 구석에 앉아 있었던 탓에 금세 등에는 차가운 벽이 닿고 말았다.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진표성의 모습이 앞으로 제가 겪게 될 고난을 예고하는 듯했다.
“으아아악―!”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강준은 순식간에 몸이 뒤집혀 옥상 바깥쪽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됐다.
“그으어…….”
“캬흐악―!”
강준이 내지른 비명에 아래를 배회하던 좀비들이 그가 매달린 방향으로 모여들었다. 진표성은 강준의 발목만 모아 손에 쥐고 있었다.
물구나무서기를 한 것 같은 자세에 얼굴로 피가 몰려 새빨개졌다.
“미친 새끼야……!”
“정신을 덜 차렸네.”
심지어 진표성은 강준의 몸을 좌우로 흔들기까지 했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양새가 바늘에 걸린 미끼 같았다.
제가 소리를 내지를 때마다 좀비들이 발광한다는 걸 알게 된 강준이 희게 질리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격한 움직임에 자극받은 어깨도 끊어질 듯이 아파 왔다.
“크햐아악―!”
그러나 이미 좀비들은 강준의 존재를 인식한 이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좀비들이 팔을 길게 뻗어도 강준에게는 닿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알고 있는 게 없다고…….”
강준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진표성에게 속삭였다. 이런 취급을 당하는데 알고 있는 게 있어도 알려 주기 싫었다.
“그래?”
“으허억……!”
진표성이 생긋 웃으면서 발목 하나를 더 놓아 버렸다. 졸지에 다리 하나만 고정된 강준의 몸이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진표성의 손이 발목 하나는 확실하게 붙잡아 주고 있지만 다리가 다 잡혀 있을 때랑 하나만 잡힌 느낌은 차이가 컸다.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몸이 한 뼘 더 아래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캬르르르―!”
갯과 형태의 좀비 몬스터가 도약질해 강준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입을 쩌억 벌렸다 다물면서 강준을 씹으려고 했다.
시도가 불발로 그친 건 좀비 몬스터의 턱이 반쯤 떨어져 나간 상태라 무언가를 제대로 씹을 수 없어서였다.
“씨이발…….”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강준은 목덜미가 오싹해지는 경험을 했다. 좀비에게서 튄 진액이 귓바퀴에 묻었다.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멀쩡한 손을 들어 귀를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그럴수록 손은 끈적끈적한 액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캬하악!”
좀비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강준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언뜻 봐도 스무 마리를 넘어갔다.
몰려드는 좀비들의 수는 점점 늘어 갔다.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신호를 알아들은 이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연스러운 몸을 뒤틀며 다가오고 있었다.
진표성이 팔을 더 아래로 뻗었다. 이제는 정말로 강준의 정수리와 얼굴에 좀비들의 손끝과 주둥이가 스칠 정도로 내렸다가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아직 욕할 기운도 남아 있고 팔팔하네.”
안색이 새빨갛게 변했다가 푸르죽죽하게 바뀌어 가는 강준과 달리 진표성은 정말 낚시라도 하는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다만 너무 많은 좀비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주변을 살필 따름이었다. 강준이 처음에 소리를 우렁차게 지른 탓에 생각보다 많은 좀비들이 몰려들었다.
탈출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썩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한수호의 차가운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난은 감수할 수 있으나 문제는 이현과 김솔의 안전에도 직결된다는 거였다.
진표성이 혀를 쯧, 차며 일단 강준을 끌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알고 있는 거 다 말할 테니까…… 제발 좀 올려 줘…….”
아래쪽에서 지린내가 훅 풍겨 왔다. 좀비들에게서 나는 썩은 내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냄새였다. 진표성이 눈썹을 들썩거렸다.
강준이 입고 있는 바지 앞섶이 다른 부위보다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진표성이 입술을 꾸욱 말아 물었다.
여기에서 웃음이라도 터트렸다가는 강준이 알려 줄 정보의 질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