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아이가 김이현 가이드를 찾고 있습니다.”
“아…….”
부지불식간에 시야가 높아져 놀란 이현의 시선이 한수호에게 닿았다. 허리춤에 닿은 손이 크다 못해 제 허리를 완전히 감쌀 것만 같았다.
한수호의 눈빛은 입맞춤 이후로 한층 더 다정해졌다. 감정의 농도가 짙어졌다기보다는 그 스스로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내보이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솔이, 가요……?”
당황한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 이현이 시선을 돌려 김솔을 찾았다. 한수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김솔이 이현을 향해 두 팔을 뻗으며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크지 않아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이현이 곧장 김솔을 향해 다가갔다. 김솔은 이현의 상의가 깔린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었다. 잠시 의식을 차렸으나 회복 포션을 먹이자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든 거였다.
깨어났을 때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해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서 자리를 비웠던 건데.
“아저씨…….”
“응, 솔아. 일어났는데 아저씨가 안 보여서 놀랐어?”
“네에…….”
자신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쏟아지는 피를 보면 발작하기 마련인데 이현의 상태를 배려하듯이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아이인 김솔에게는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갔을 거다. 모르는 이들이고, 윽박지르던 사람들이지만 생존자 다수가 죽었다.
폭음과 무너져 내리는 돌기둥,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 짙은 살기를 풍기는 좀비들까지.
아이가 언제 정신을 놓아 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의 연속이었다.
“아저씨, 흐윽, 많이 아파요……?”
이현이 안아 주자 잠시 눈물을 멈추는 듯하던 아이의 눈망울이 눈물로 얼룩져 갔다.
“아, 아니야. 아저씨 피가 맞기는 한데, 아, 이게 아니라…….”
이현은 현재 김솔에게 셔츠를 벗어 준 터라 하얀색 민소매만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하얀색이었던 옷은 이현이 토해 낸 피로 군데군데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뜻 보면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옷 상태가 말도 아니었다. 이현이 손사래 치다가 헛소리를 했다.
“솔아, 봐 봐. 상처 하나도 없지?”
아이의 입매가 우그러지기까지 하자 이현이 대뜸 옷을 들어 보였다. 새하얀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김솔이 큰 눈을 끔벅거리며 이현의 상체를 자세히 살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콕콕 찔러 보기도 했다.
정말로 이현의 몸에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김솔의 안색이 나아졌다.
“아저씨…….”
“응. 이리 와.”
김솔이 재차 이현을 향해 두 팔을 뻗어 보였다. 이현이 아이를 품에 안고 등을 도닥였다. 잠깐 정신을 차린 듯했다.
잠시 크게 들썩이던 등이 서서히 내려앉더니 곧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이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진표성에게 생각이 미쳤다.
“둘이…… 굉장히 심각해 보이네.”
하지만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한수호와 진표성의 얼굴이 너무나 심각하게 굳어져 있어서였다.
이현은 대신 김솔을 안은 상태로 김민지에게 손짓했다.
강준과 다른 생존자 두 명은 멀찍이 떨어진 채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한수호와 진표성이 함께 있는 만큼 그들이 해코지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이 세상은 서로를 대가 없이 믿기에는 이미 지옥처럼 변해 버렸으니까.
* * *
“……좀 가라앉혀.”
이현이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지자 한수호가 진표성의 하체를 눈짓했다. 진표성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다리를 모았다.
별거 아닌 접촉이었다. 이현이 처음에 상처를 만질 때만 해도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과 제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입바람에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을 뿐이다.
문제는 이현이 제 등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복부에서 뻐근한 감각이 일었다는 거다. 열기가 몰리는 감각은 시시각각 더해 갔다. 절정은 엉덩이 골 근처까지 이현의 손끝이 닿을 때였다.
한눈에 봐도 허벅지 한쪽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이현이 아프냐고 물어봐도 말할 수 없었던 건 입을 여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입술 새로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팀장, 가이드한테…… 정말로 진심이야?”
열기를 가라앉히며 진표성이 한수호에게 넌지시 운을 뗐다. 이제는 제 감정을 모르기도 힘들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라 자각이 늦었을 뿐 어쩌면 자신은 처음 이현을 본 순간부터 반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 이현한테는 처음부터 시선이 갔다. 한수호가 이현에게 남다른 반응을 보여서 더 관심이 간 건 맞으나 이후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도 제 시선은 자꾸 이현을 좇았다.
감정을 자각한 이상 제 사전에 망설임이란 없었다. 한 가지 걸리는 건 한수호의 마음이었다.
진표성은 진심으로 제 팀장을 존경했다. 태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을지 몰라도 다른 팀에서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던 제가 알파 1팀에 온 이후로는 쭉 붙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진표성은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따라 후회 없이 부딪쳐 보고 싶었다. 마음을 접으려고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내 목숨도 걸 만큼.”
한수호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가볍게 넘기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진표성을 바라보는 검녹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진표성의 마음이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이현은 연인 사이가 아니다. 이현과 함께 나눴던 추억도 지금은 한수호에게만 남은 상태였다.
이현의 무의식에도 기억은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피를 본 순간 발작을 일으키던 이현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이현에게는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것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수호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지금은 깨끗하지만 그때에는 피부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빨간 피에 물들어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비릿하게 풍기던 냄새는 한수호에게도 영영 잊히지 않을 기억이었다.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어. 내가 가이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을지.”
평소 능글맞던 진표성의 목소리는 진심이 가득 담겨 나직하게 울렸다. 김솔을 다독이고 있는 이현을 흘낏 살피는 얼굴 위로 혼란스러운 빛이 서렸다. 그러나 곧 다부진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꼭 살아남고 싶어. 혼자가 아니라 가이드랑 같이.”
일상적인 것들을 해 보고 싶었다.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고, 경치 좋은 장소에 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걷기도 하는, 그런 일상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이딩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입맞춤을 하기를 원했다. 진표성은 한 번도 먼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현의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실제 미래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었다. S급 에스퍼라고 해도 지금처럼 좀비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 근시일 내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은 아니었지만 흰머리가 생기도록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진표성은 지금은 꼭 안전해진 세상에서 이현과 오래도록 살고 싶다는 염원이 생겼다.
“가장 중요한 건…… 김이현 가이드의 마음이야.”
한수호는 진표성에게 마음을 접으라 얘기하지 않았다. 그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줬을 뿐이다.
“그리고 나도 포기할 생각 없어. 경쟁자가 생긴 지금은 더더욱.”
한수호의 다정한 시선이 걱정스러운 듯 자신과 진표성을 살피는 얼굴에 닿았다. 예전처럼 “이현아.”라고 부르고 싶었다.
상황이 여의찮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다 서동연 때문에 이현을 잃을 뻔했다.
이현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과거는 과거로 남겨 두고 새로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과 이현은 한배를 탄 상황이었다.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이현은 제게 기댈 수밖에 없다. 이현이 가이딩 때문이라고는 해도 진표성에게 입을 맞춘 순간 한수호는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사실 진표성에게는 이현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으나 한수호는 이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들 놓아줄 자신이 없었다.
“그럼 결정됐네. 앞으로 페어플레이하자, 팀장.”
진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윤곽이 보일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던 바지 앞섶은 어느새 가라앉은 상태였다.
마음을 다잡은 진표성의 얼굴은 해맑았다. 길을 잃어 혼란스러워하다가 제대로 된 지도를 얻은 사람 같았다.
“……그래.”
한수호의 표정은 진표성만큼 밝지는 않았다. 그래도 진표성을 따라 이현에게 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심각해 보이던 두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솔도 한결 진정된 상태로 이현의 검지손가락 하나를 손안에 야무지게 쥔 채 잠들었다.
“얘기 다 끝나신 거예요?”
“네. 날이 곧 어두워지니 제대로 쉴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