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아이랑 같이 가고 싶으면 어쭙잖은 반항은 포기하자, 응?”
이현은 서동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동연이 당장이라도 이현의 품에서 김솔을 떼어 내 던질 기세였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목숨은 단번에 끊어질 터.
“한수호가 쫓아오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지.”
이현이 얌전해지자 기분 좋아진 서동연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속도를 높였다.
“김이현 가이드!”
“눈치도 빨라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동연이 휘파람을 불었다. 일차적으로 알파 1팀을 향해 달려들던 하프 좀비뿐만 아니라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을 부른 거였다.
서동연의 지시에 하프 좀비 열 명이 한수호의 앞을 빠르게 막아섰다.
“다들 치고 빠지는 식으로 공격해.”
서동연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김태훈이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키며 데리고 온 하프 좀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잠깐이지만 그는 한수호를 상대한 전력도 있었다. 각자 손에 맞는 무기를 든 하프 좀비 무리가 한수호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커윽―!”
하지만 달려들었던 이들은 달려든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한수호가 그림자 단검을 반원 모양으로 휘둘렀다.
칼날에 응축되어 있던 마력이 단검의 길이를 월등히 넘어 길어졌다.
일부 하프 좀비는 상체가 크게 베여 걸쭉한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김태훈이 본인의 무기인 마테체를 고쳐 잡고 숨을 고르고 있는 한수호의 측면을 공략했다.
카앙―!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김태훈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수호가 가볍게 휘두른 단검에 막힌 마테체의 칼날 위로 실금이 그어졌다.
햇빛이 눈 부시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검날에 반사된 흰색 빛이 김태훈의 눈동자를 찌르듯이 건드렸다.
벼려진 칼날이 매끄럽게 잘리는 순간이었다. A급 좀비 몬스터 히에나 다섯 마리가 한수호의 등으로 뛰어들었다.
한껏 벌어진 입에서 송곳니 다섯 쌍이 당장이라도 인간의 여린 살갗을 꿰뚫듯이 번뜩였다.
한수호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오른손을 히에나 무리를 향해 뻗고 움켜쥐었다.
그림자 다섯이 동시에 일어나 한수호를 공격하는 히에나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검회색 송곳니가 회색빛 가죽을 무른 두부 뚫듯이 파고들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다섯의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키에에엥―!”
썩어 문드러진 살점이 그림자 히에나의 입 속에 들어가 잘근잘근 씹혔다. 히에나 다섯 마리를 처리했지만 여전히 하프 좀비의 수는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검녹색 눈동자가 이제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는 이현의 모습을 좇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서동연은 처음부터 목적이 이현이었다는 것처럼 혼란을 틈타 이현을 데리고 사라졌다.
“확실히 쉽게 볼 수는 없는…….”
살점을 가르는 살벌한 소리가 김태훈의 목을 뚫고 튀어나왔다. 김태훈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피 끓는 소리만 났다.
“부대장님!”
하프 좀비들의 고개가 동시에 김태훈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이곳에 있는 하프 좀비들은 모두 김태훈의 밑에서 구른 자들이었다.
김태훈은 하프 좀비가 된 기간이 오래된 게 아닌데도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마음을 다루는 데 탁월했다. 서동연은 김태훈의 특기를 살려 하프 좀비들의 훈련을 전담시켰다.
하프 좀비는 좀비였을 때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일반 좀비였을 때는 인간성이 완전히 말살되어 버리지만, 하프 좀비로 변하면서 잃었던 인간성을 회복해 버리는 게 문제였다.
기억도 다는 아니어도 일부가 돌아왔다. 대부분 일반 좀비가 되었을 때 처음 사람을 씹어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보통 가장 소중한 이들이 첫 번째 먹이였다.
일부는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기도 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혼란에 휩싸였을 때 김태훈이 건넨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도움을 받지 않았던 이가 없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김태훈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투욱.
그러나 그들이 다가가는 속도보다 한수호가 김태훈의 머리통을 몸에서 분리하는 게 빨랐다.
검녹색 눈동자에서 휘몰아치는 시린 폭풍에 남은 하프 좀비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 *
“……솔이 만나게 해 주세요.”
“흐응. 나중에. 신부가 그 아이보다 나한테 더 관심을 두면 만나게 해 줄게.”
신부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이 턱 끝까지 치밀었다. 이현은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입술을 짓씹었다.
서동연에게 납치된 이후로 이현은 그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참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미친놈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였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 서동연은 이현과 김솔을 한 호텔로 데려갔다. 호텔 안에는 하프 좀비들과 그들이 부리는 좀비 몬스터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아이는 다른 애한테 좀 맡기자.’
서동연이 이현의 품에서 김솔을 떼어 냈다.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지만 서동연은 가차 없었다.
이현은 숨겨 둔 무기를 향해 손을 뻗던 중 손이 결박되고 말았다. 지니고 있던 물품도 입고 있는 보호복과 가이딩 마력 반지를 제외하고 다 빼앗겼다.
‘솔아……!”
‘으아아앙…….’
팔이 등 뒤로 묶인 채 이현은 김솔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제발 솔이랑 같이 있게 해 주세요…….’
‘안 돼. 얌전히 여기에 있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서동연에게 애원도 해 봤다. 하지만 서동연은 이현을 비어 있는 호텔방 하나에 넣어 두고 사라졌다.
‘그래도 상처는 치료하고 가야지.’
그는 가기 전에 이현의 볼 위의 상처를 치료해주기까지 했다. 회복 포션의 화한 느낌이 사라지면서 상처 또한 모습을 감추었다.
이현은 서동연이 나가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룸 안에 있는 거라고는 육포와 생수병 두 개가 다였다. 창문 쪽으로 향했지만 까마득한 높이에 이현은 창문을 열고 나가지도 못했다.
발코니라도 있다면 그쪽으로 몸을 움직여 볼 텐데 통창이라 그것도 불가능했다.
상황도 모르고 끼니를 요구하는 배가 배고프다고 아우성쳤다. 검붉은색의 육포는 뭐로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뚜껑 열린 흔적이 없는 생수병도 마찬가지였다. 가는 주사기로 안에 어떤 약을 탔을지 모를 일이었다.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이현은 서동연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창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날이 저물고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걸 지켜봤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지던 황두학도 걱정됐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김솔도 생각이 나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김종현은 왜 같은 팀원을 공격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무기로 쓸 만한 게 없는지 룸 안도 샅샅이 뒤져 봤다. 더블 침대와 침구 일체, 벽과 일체형인 책상이 다였다.
나머지 물품은 다 치워 버린 것 같았다.
“눈이 왜 이렇게 빨개. 한숨도 못 잤어?”
초췌해진 이현과 달리 문을 열고 나타난 서동연은 간밤에 푹 잔 얼굴이었다. 반질반질한 피부가 삶은 달걀의 표면처럼 뽀얬다.
“나랑 어디 좀 가자.”
서동연은 다짜고짜 이현을 안아 든 후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칼바람에 이현은 눈을 감은 채 서동연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이현을 데리고 서동연이 도착한 곳은 종합 쇼핑몰이었다.
분명 사람들이 피신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어 엉망이어야 할 곳은 보초를 서는 하프 좀비들을 제외하면 예전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백화점 괜찮지?”
설레는 표정으로 서동연이 이현의 손을 잡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현이 움직일 때마다 양쪽의 색이 다른 눈동자들이 이현을 기민하게 살폈다.
축축한 지하실 바닥이 연상되는 음습한 시선들이었다.
미친놈의 행동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현이 어떤 상황에서 끌려왔는지 알면서 데이트라도 하는 듯한 태도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러나 불쾌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사방이 하프 좀비였다. 이현은 현재 살면서 가장 많은 수의 하프 좀비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적진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일반 좀비들도 무섭지만 하프 좀비들 또한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서동연의 손에 이끌려 백화점 안을 걸어 다녔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이현은 도대체 서동연이 무슨 생각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김솔을 만나게 해 달라는 이현의 말에 “나중에.”라는 대답을 남긴 서동연은 현재 분홍색 맨투맨티를 손에 들고 있었다.
화려한 색감을 과감하게 매치하기로 유명한 명품의 로고가 정중앙에 떡하니 박힌 티셔츠였다.
“분홍색이 잘 어울리네.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서동연은 명품 매장들이 즐비한 층으로 곧장 향한 후 남성복 라인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본인의 옷이 아니라 이현의 옷을 고르기 위해 들른 듯 괜찮다 싶은 옷이 있으면 꺼내 들고 이현에게 대 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하늘색도 잘 어울리는 것 같고. 파스텔 톤은 다 잘 어울린다.”
창백한 안색의 이현과 대조적으로 서동연은 정말 애인이랑 데이트라도 나온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이현은 여전히 보호복을 착용한 상태였다. 룸 안에 있을 때 몸을 씻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먼지에, 핏방울에 꾀죄죄한 상태인데도 서동연은 스스럼없이 이현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이거부터 벗을까?”
서동연의 검지손가락이 이현의 뺨을 톡톡 두들겼다. 이현이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곧 팔을 잡고 탈의실로 밀어 넣는 서동연 때문에 졸지에 새 옷을 들고 황망하게 서 있는 거울 속 자신과 조우했다.
지금 이게 뭐 하고 있는 짓인지 한숨만 터져 나왔다. 동료들과 김솔의 안위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서동연과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벼 볼 만한 실력이 있다면 서동연의 머리통을 쪼개고 싶었다. 미친놈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같이 미친놈이 되어야 하는 걸까.
자신과 김솔이 있는 장소를 한수호에게 알려야 하는데, 그조차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눈앞이 깜깜했다.
“혼자 옷 입기 어려운 거지? 내가 도와줄게.”
이현이 막막한 기분에 멍하니 서 있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은 별수 없이 착용하고 있던 보호복을 벗고 서동연이 건넨 옷으로 갈아입었다. 새 옷이 입으면서 더려워졌지만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자신만 잡힌 상황이라면 무모한 행동이라도 할 텐데. 김솔까지 같이 잡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서동연이 이현에게 현재 생명의 위협을 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언제 본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도 그가 이현에게 대하는 행동을 보면 제 입맛대로 굴어도 되는 인형을 데리고 노는 것과 유사했다.
이현은 서동연이 건넨 옷을 그가 보는 앞에서 찍찍 찢어 버리는 상상을 했다.
웃음기가 맺혀 있던 눈동자는 금세 살기로 뒤덮여 이현의 가슴쯤은 순두부 가르듯 꿰뚫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아…….”
서동연은 분명 눈대중으로 옷을 골랐다. 그런데 옷들이 신기할 정도로 이현의 몸에 딱 맞았다. 옅은 분홍색의 셔츠와 연한 색의 청바지가 맞춤옷처럼 몸을 감쌌다.
“역시 잘 어울리네.”
이현이 바지의 버클을 채우기가 무섭게 탈의실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