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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는 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천천히 쓸었다. 만약 그 아이가 혜담이라면, 이 기억 속의 자신은 다섯 살이었다. 네잎 클로버를 주고 당황하는 아이를 졸라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크면 결혼하기로.
그리고 그날로 완벽한 베타가 되었다.
레오는 태어나기 전부터 알파 기질을 보였지만, 태어난 후 검사에선 베타로 나왔다. 자신의 페로몬 향을 아는 이는 코맘과 대디뿐이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검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골든 알파든 히든 알파든 그들은 의학적 정의에 연연하는 분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형질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어림짐작으로 제가 알파라고 알고 있었다. 집안에서도 자신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형질 따위는 사는 데 큰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제가 부모님의 페로몬을 알고, 부모님이 자신의 페로몬을 아는 건 가족 간의 작은 비밀 같은 것이었다. 숨바꼭질을 할 때면 항상 페로몬 때문에 들켜 숨기는 법도 열심히 배웠다.
그러던 중 외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수목장에 다녀온 날 갑자기 제 페로몬이 완벽히 사라졌다. 자신 역시 부모님의 페로몬을 맡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지?
혜담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의 페로몬 향이었다. 어린 시절 저를 이끌었던 것도 그의 페로몬이고, 기억을 잃은 채 그를 만났을 때도 가장 먼저 느낀 것이 그의 페로몬이었다.
최근 재회에서도…….
꽉 물고 있던 이에서 힘을 빼며 레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주먹을 쥐었다 펴며 저를 진정시키려 해도 날 것의 감정을 쉽사리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다섯 살에 만난 혜담.
알파였던 자신과 오메가였던 그.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고는 하지만 만약 제가 그에게 블라인드를 씌워 버렸다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일을 제가 했다면.
혜담은 오메가이지만 베타로 형질이 숨겨진 채, 살아왔을 것이다. 다시 자신을 만나 그 블라인드가 저절로 풀리기 전까지 말이다.
제멋대로 해 버린 일이 너무 많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다섯 살의 자신은 그에게 블라인드를 씌워 버림으로써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스무 살의 자신은 그를 만나 도움만 잔뜩 받고 말도 없이 떠나 버렸다.
정말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빠진 것이 너무 많아 제대로 이어지지 않던 상황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라 하나의 완벽한 기억을 만들어 냈다.
그날은 제 곁에 선 이의 사랑스러움만으로도 충만해 이 시간이 영원하기만을 빌었다. 슈퍼에 다녀온다며 저를 두고 가 버리는 혜담의 뒷모습을 너무도 잡고 싶었는데.
길 건너의 혜담을 가리듯 제 앞에 선 검은 차에서 로버트가 내려 제 앞에 선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을.
어떻게 그 모든 걸 다 잊어버릴 수 있었던 걸까.
억지로 붙들려 제 곁에 머물러야만 했던 혜담은 무슨 심정이었을까. 자신에게 멋대로 휘둘리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빈 상자를 쥐고 있는 손끝이 하얗게 질리고, 붉은 핏줄이 도드라져 올라왔다. 45일을 채운 뒤에 찾으러 간다고? 그를 데려와 자신의 옆에 둬도 되는 건가?
당연히 그를 찾아와 제 옆에 두겠다는 생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네.”
폭주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요란하게 벨 소리까지 울려 대자 혼이 빠질 것 같은 레오는 대상이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 지금 통화 가능해?
“……왜.”
발랄한 루나의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 뱅쇼 좀 부탁해. 내일 물건 보낼 때 같이 보내려고.
“……먹고 싶대?”
― 언제 혜담 씨가 그런 말 하겠어? 내가 알아서 챙겨 보내는 거지. 그런데 진짜 혜담 씨 혼자 거기서 지내게 할 거야?
“휴가잖아.”
울고 싶은 기분에 레오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처음엔 순수하게 휴가를 간 것이라 여겼다. 휴가가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가 어디 있는지 알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바쁜 거 아니면, 뱅쇼 오늘 갖다줘. 나 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거니까.”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끊겨 버린 통화에 레오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충분히 생각하고 거기 맞게 움직여도 늦지 않았다. 적어도 새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새장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오너를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루나의 사무실로 들어간 레오는 테이블에 챙겨 온 뱅쇼를 내려놓곤 곧장 한쪽에 있는 바로 향했다. 마치 자신의 집이나 사무실 안에 있는 간이 바를 이용하듯 와인 냉장고에서 빈티지 와인을 꺼낸 레오는 곧바로 와인부터 땄다.
“야! 너 그게 뭔 줄 알고…….”
“그러게 양주 좀 채워 놓지 그랬어.”
“네 앞으로 청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와인잔 가득 와인을 채운 레오는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늦은 밤이지만 도시는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화려한 불빛과 신호에 맞춰 움직이는 차. 오가는 사람들까지 모두들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루나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 줄 여력이 없는 레오는 단숨에 와인을 비우곤 다시금 잔을 채웠다.
“혜담 씨 다음 주 주말쯤 해서 나올 거래.”
“언제부터 네 고객에 대한 정보를 제삼자에게 마음대로 넘겨줬어?”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담 씨 일이니까 말해 주는 거지.”
“쉬고 싶다고 휴가 내 놓고 돌아오지 않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당장 가서 잡아 와?”
평소였으면 그가 돌아오는 것에 맞춰 알아서 준비하라는 말을 했겠지만, 엉망진창 꼬여 버려 풀 방법이 없는 그물에 온몸이 묶인 레오의 입에서 잔뜩 날이 선 말이 튀어 나갔다.
“너 진짜 모르는구나.”
“내가 뭘 몰라. 이제 알아서 답 찾는 중이니까 선 넘지 마.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로버트를 통해서 보낼 테니까 오늘처럼 연락해서 오라 가라 하지 말고.”
피처럼 붉은 와인을 벌컥벌컥 마신 레오는 옆에 있는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문으로 향했다.
“레오 루이스. 네가 제정신이라면,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는 새끼라면 넌 지금 당장 전용기를 띄워서 무인도로 가야 해. 가서 무릎 꿇고 대가리부터 박아. 혜담 씨가 모진 말을 하고 널 내쳐도 넌 그래야 해. 그리고 끝내 혜담 씨가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해. 넌 그런 대접 받아도 싼 새끼니까.”
레오는 자신의 등에 무수하게 쏟아지는 욕설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너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도 아이 가진 사람이 무인도에서 혼자 지내는 거 일반적인 상황 아니야. 안정기도 아니고 초기엔 얼마나 불안한지 네가 알아? 입덧에 현기증에 감정 기복까지 혼자 감당하기 쉬운 거 아니야. 혜담 씨가 돌아와서 사직서…….”
“……뭐?”
그녀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지나치려던 레오는 낯선 단어들의 나열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이를 가진 사람이라니? 입덧에 현기증은 또 뭐며, 사직서라는 단어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무리 둔하고 멍청해도 그렇지.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 너잖아. 그런데 그걸 몰랐다고? 가끔 보는 나도 알아챈 걸? 그래. 나라도 말 못 했겠다. 아이라면 쳐다도 안 보고 지긋지긋해하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해. 너 설마……. 혜담 씨가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한 건 아니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허탈한 듯 웃는 루나를 마주 본 레오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혜담이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한번은 레오와 같이 일했던 직원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 것 같고, 루나와 있을 때도 루나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
[혹시 말이야. 네게 아이가 있다면…….]
[그래서 조심하고 있잖아요.]
레오는 지끈거리던 머리가 터져 버리는 것 같은 고통에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혜담과의 아이가 싫은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자신에겐 혜담만 있으면 됐다. 정말 그가 아이를 원한다면……. 그건 나중에 서로 마음을 온전히 나누고, 루나에게 주문한 반지가 완성되면 프러포즈를 제대로 하고, 그러니까 일에는 순서가…….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 버렸다. 분리수거도 안 될, 조금의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가 자신이었다.
“……혜담은 괜찮아?”
“늘 괜찮다고는 해. 네게 말은 안 했지만 보내는 물품 목록에 입덧완화제도 있었고, 통화할 때마다 목소리도 좋고. 사흘에 한 번, 혜담 씨 잠든 사이 정리하러 들어가는 하우스 키퍼들 말로도 잘 챙겨 먹고 잘 지내는 것 같다고 하더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날이 선 채 레오를 공격하던 루나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았다.
“나도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데, 너희 일엔. 그래, 인정해. 내 오지랖이야. 그래도 넌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고, 혜담 씨는…… 지금 네 반응을 봐선 네가 아니라 아이를 선택해서 그런 결정한 거잖아. 제발 둘이 제대로 된 대화 좀 해. 이건 속 이야기 조금만 해도 다 해결되는 거겠다.”
“무릎 꿇은 채 머리 박고?”
마른세수를 한 레오의 웅얼거림에 루나는 “넌 꼭 그 자세가 좋을 것 같아.”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업무와 관련된 통화 중 혜담이 전에 말한 무인도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일이 꼬여 있는 줄 몰랐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제가 아니면 해결할 사람이 없기에 총대를 멘 루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레오를 바라보다 제 사무실로 들어가 종이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다.
“주문한 반지 나왔어. 이거 들고 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 해 봐. 그런데 너 혜담 씨 바뀐 전화번호는 알아?”
“……알고는 있지.”
루나는 완벽한 외모에 더 완벽한 몸을 가지고도 모태 솔로였던 친구를 보며 혀를 찼다. 그저 주인 좋아. 좋아. 주인 말이면 뭐든 충성. 시키는 대로 합니다, 하며 그저 주인만 따르는 대형견과 이놈이 뭐가 다를까. 일 잘하고 머리 좋으면 뭐 해. 눈치가 안드로메다급인데.
종이 가방을 들고 제 사무실을 나가는 레오의 모습이 완벽히 사라지자 루나는 레오가 따 놓은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와인이나 마시자. 오픈된 와인을 다시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와인잔을 가득 채운 루나는 조금 전 레오가 서 있던 창가로 가서 섰다.
며칠 내, 돌아올 혜담을 위해 뭘 준비해야 할까? 적당한 리스트를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