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끊어질 듯 가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바람이 많이 섞여 있었다. 한숨처럼 내뱉은 말이 공중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결이 너 그동안 나랑 일하느라 고생 많았잖아. 쉰 적도 거의 없고. 얘기 들어 보니까 확실히 나쁜 조건 같지는 않아. 그러니까 거기로 소속 옮겨.”
멍하니 굳어 있던 고결의 미간이 이내 살짝 찌푸려졌다. 대화가 왜 이렇게 진행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우현한테 회사를 관두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다른 결론이 이상했다. 형. 저 소속 안 옮겨요. 안 옮길 거예요. 고결은 다시 한번 완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사실대로 말하고 회사 그만둘 거라고.”
“안 돼.”
고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우현이 대답했다. 그만두겠다는 결의 말과 안 된다는 우현의 말이 허공에서 강하게 맞부딪혔다.
“회사 그만두지 마. 계속 다녀.”
“형.”
형. 단 한마디의 부름이지만 거기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 안에 담긴 뜻을 우현이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우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강경했다.
“지금까지 별일 없었잖아.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억제제만 빼먹지 말고 잘 챙겨 먹어. 그러면 돼.”
“이미 형하고 민호한테 들켰어요. 근데 그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에요.”
“나 때는 결이 네가 발현한지도 모르고 있던 상태였잖아. 그리고 민호라는 친구한테는 약 때문에 들킨 거였고. 그 친구 말이 맞아. 결이 네가 그 팀으로 가면 대놓고 억제제 들고 다녀도 당연히 그 멤버 약인 줄 알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말라는 우현의 말에 순간 울컥했다. 고결이 걱정하는 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억제제를 들키면 어떡하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고결의 걱정은 오로지 우현이었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우현한테 피해가 갈까 봐, 그걸 걱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현이 자신을 생각해서 이런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도 우현을 생각했다. 왜 그걸 몰라 주나 싶어 야속한 마음마저 들려고 했다.
“그리고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여기에 있어.”
차우현이 마치 못을 박듯 단단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런 고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와 달리 강압적이다 못해 조금은 고압적이기까지 한 말투였다. 고결은 힘주어 입안을 꾹 씹었다. 역시나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가끔씩 이렇게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의 묵직한 위압감과 압박감을 내뿜는 우현의 모습에는. 우현이 이런 식으로 나올 때마다 손쓸 틈도 없이 져 왔다. 고결은 본능적으로 또 한 번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결이 너 사실대로 말하고 그만둔다고 하면 내가 네 서류 위조한 거라고 말할 거니까.”
“형!”
새된 목소리가 막혔다 터지듯 거세게 튀어나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고결은 우현의 앞에서 언성을 높여 본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고결의 모습에도 차우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꿋꿋하게 자신의 말만 꺼내 놓았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그만둬도 회사에다가는 그렇게 말할 거야. 결이 네가 원래는 열성 오메가인데 내가 서류 위조해서 들어온 거라고. 근데 결이 네가 이제라도 바로잡고 싶다고 해서 그만둔 거라고.”
회사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차우현과 고결이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거. 그래서 차우현이 고결을 데려와 매니저로 함께 일하게 됐다는 것도. 물론 차우현이 처음부터 그 조건으로 한그루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하고, 재계약 조건에도 고결을 내걸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에 한해서였지만.
흔히들 말하는 인맥 채용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연, 혈연, 학연으로 사람 하나 회사에 꽂는 거야 그리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어느 회사나 암암리에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 고결이 회사에 입사한 건 무려 5년 전의 일이었다. 한 달에 몇십 명이 관두고 다시 들어오는 회사였다. 그런 곳에서 군소리 하나 없이 5년간 묵묵히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사람들이 고결의 입사 특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근데 그러면 다들 좀 놀라긴 하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결이 베타여서. 아니. 베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성 알파인 내가 열성 오메가인 결이 너를 서류 위조까지 해 가면서 내 매니저로 5년씩이나 일하게 했다는 거에.”
우성 알파와 열성 오메가라는 단어에 묘하게 힘을 실렸다. 고결은 그 순간 아득한 현기증마저 느꼈다. 역시나 우현은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하게 되면 가장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이 무엇인지.
젠더 검사지 위조는 엄연히 불법이었다. 우현이 검사지를 위조했단 잘못된 얘기가 사실처럼 퍼지면 이미지에 큰 흠집이 가게 될 것이었다. 그게 아무리 자신이 아닌 남의 검사지라고 해도.
하지만 고결은 그것보다도 우현이 검사지를 위조하게 된 경위. 그러니까 그 이유가 열성 오메가인 후배를 자신의 매니저로 두기 위함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 우현의 뒤에 따라붙을 여러 가지 질 낮은 헛소문들이 더 걱정됐다. 이건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해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소재였다.
착하고 사람 좋기로 유명한 차우현이 열성 오메가인 후배를 불쌍히 여겨서 친히 검사지까지 위조해 줬구나. 그리고 자기 매니저로 써 준 거구나.
저런 식으로 생각할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었다. 그동안 우현이 쌓아 온 이미지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오히려 그동안의 이미지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기에 더 격렬하게 반응할 확률이 높았다.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바다에 쓰레기 하나 버리는 것쯤이야 티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깨끗하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쓰레기를 떨어트리는 건 달랐다. ‘사람 냄새 나는 알파’. 그런 전무후무하고 또 유일무이한 이미지로 사랑받아 온 우현이기에 받는 타격은 더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우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게끔 쉬쉬하며 안에서 덮으려고 할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막을 수 있는 형질의 것이 아니었다. 차우현이 알고 보니까 열성 오메가인 매니저를 끼고 다녔다더라. 그럼 그렇지. 우성 알파가 사생활이 깨끗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매니저가 열성 오메가니 대기실이며 차 안이며 둘이 시도 때도 없이 붙어먹었겠네. 안 봐도 훤하다 훤해. 애초에 문제가 안 되게 안에서 자기들끼리 해결하니까 밖에서는 티가 안 나는 거였어. 이런 질 낮은 얘기들이 어느 순간 진실로 둔갑해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형. 아까도 제가 말했잖아요. 저 어깨 다친 거 형 때문에 그런 거 아니고 형이 미안해하거나 죄책감, 책임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로요.”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저 아래로 내려앉은 고결의 마음만큼이나 낮게. 단지 제가 다칠 때 함께였단 이유로, 그거 하나 때문에 우현이 이렇게까지 헌신적으로 굴 필요가 없었다. 속이 답답했다.
“단지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야.”
“그럼요?”
“결이 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
“그래서 난 네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좋겠어. 그게 다야.”
그러면 안 돼?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 조심스러운 물음이 건네졌다. 조금 전,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로 제 피를 말리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 모습에 맥이 풀렸다. 하.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짧은 숨을 뱉어냈다. 차우현이 팔을 뻗어 여전히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는 고결의 손을 마치 덮듯이 붙잡았다. 별안간 손등을 감싸 오는 그 따스한 온기를 감히 떨쳐 내지 못하고 고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원래는 12살 때 발현하는 게 보통인데 결이 너는 25년을 베타로 살다가 갑자기 발현한 거잖아. 그래서 더 많이 힘들고 혼란스러울 거라고 생각해. 넌 남들하고 다르게 적응할 시간이 제대로 없었으니까.”
차우현이 엄지로 고결의 마른 손등을 쓸듯이 가볍게 훑었다. 조금은 간지러운 그 감각에 고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하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겹쳐진 두 개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난 결이 네가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베타로 살았으면 좋겠어. 너한테 주어진 평화를 굳이 네가 네 손으로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원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잖아.”
바로 코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다정했다. 지금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과 같은 온도를 지닌 목소리였다.
“결이 네가 그 평화를 스스로 깨는 이유가 나 때문이면…. 그러면 나 진짜 너무 슬플 것 같아.”
아니었다. 인생에서 그나마 찾은 숨통을, 기분 좋은 바람을 멈추게 만든 건 우현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발현. 그러니까 환절기 감기처럼 때가 되어 찾아온 자신의 불행 때문이었다.
고결은 그 언젠가 일일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을 보며 엄마가 하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저렇게 착하기만 해서 어떡해. 사람은 너무 착해도 탈이야. 어느 정도는 좀 이기적이게 살 줄도 알아야지. 그때는 그래도 착하게 살면 좋은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절실히 공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