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네가, 네가 오메가이길 바랐어. 차 회장 그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길 바랐어. 우성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90%라고 하긴 했지만 넌 예쁘니까. 그리고 난 우성 오메가니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네가 그 10%의 확률을 뚫고 나처럼 우성 오메가로 발현하진 않을까 기대했어.”
하지만 차우현은 차 회장이 바라던 대로 우성 알파로 발현했다. 한도연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12년 전 아무것도 모르고 불행과 탐욕의 씨앗을 낳은 날. 그날과 같은 달, 같은 날, 한도연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게 유일하게 남은 내 복수 방법이었는데, 네가 그것마저 망쳐 버렸어. 속이 시원하니? 이제 속이 시원해? 어? 날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트려 놓고 넌 속이 시원하냔 말이야!”
맨 마지막 말은 거의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차우현의 가슴마저 욱신거릴 만큼 절박하고도 처절한 발악이었다.
죄송해요. 엄마. 제가 엄마의 기대와는 다르게 우성 알파로 발현해 버려서. 우성 오메가가 아니라 죄송해요. 그렇게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걸까 했다. 자신이 우성 알파가 된 게 왜 한도연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일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충분히 사과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가 조금이라도 덜 괴롭고 덜 불행해질 수 있다면야 못할 것 없었다.
“죄….”
“아니지. 아니야. 혹시 또 모르지.”
그때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울부짖던 한도연이 별안간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미소 지은 건.
“네가 차태민과 똑같이 젠더체인지를 겪어서 다시 베타로 발현할 수도 있는 거잖아. 환갑 거의 다 돼서 본 늦둥이 아들마저도 그렇게 되면 우성 알파만 사람 취급하는 네 할아…, 아니. 네 아버지 표정이 참 볼 만하겠구나.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란 단어가 거의 씹듯이 발음됐다. 대놓고 이죽거린 한도연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흐르고 있는 눈물 때문에 진짜로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호흡하기가 힘든 건지 웃음소리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언뜻 들으면 그냥 숨이 넘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고용인 하나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어머나, 도련님!”
깜짝 놀란 여자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새된 소리로 외쳤다. 한도연만 있는 줄 알았던 곳에 차우현도 함께 있으니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줄곧 한도연한테 고정되어 있던 차우현의 고개가 부엌 입구로 천천히 돌아갔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리 정신이 온전치 못하셔도 여태껏 도련님한테 손댄 적은 없으셨는데.”
고용인이 서둘러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한테 있어 한도연은 그저 미친 사람일 뿐이었다. 그녀가 하는 말 같은 건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날도 없었다. 한도연이 평소에 하는 말이라고는 ‘술 더 꺼내 와.’, ‘술 어디 있어?’ 정도가 전부였다. 아니면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스산하게 중얼거리거나.
유난히 금실이 좋던 차태민과 한도연이었다. 고용인들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충격으로 미친 걸 거라 추측했다. 그녀는 차태민의 교통사고 전부터 술을 마셨지만 다들 그 시간의 간극은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그래도 그녀가 완전히 미치기 전이었으므로.
“아이고. 어떡해. 도련님. 많이 놀라셨죠? 괜찮으세요?”
고용인이 차우현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한도연의 손을 재빨리 풀어냈다. 그새 또 취기가 오르는 건지, 아니면 지쳐 버린 건지. 한도연은 순순히 손목을 놔주고는 또다시 식탁 위로 엎어졌다.
“큰 사모님은 제가 방으로 모셔다 드릴 거니까 도련님도 그렇게 가만히 서 계시지 마시고 얼른 올라가 보세요.”
네? 얼른요. 고용인이 재촉하며 차우현의 등을 앞으로 살짝 떠밀었다. 차우현은 한도연을 잠시 내려다보다 결국 2층 계단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고용인이 한도연의 양팔 아래로 손을 넣은 다음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끄응. 작게 힘을 주는 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들리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차우현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쿵. 방문이 거세게 닫혔다. 방에 도착한 차우현은 침대에 눕지 않았다. 그 대신 곧장 책상 앞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젠더체인지’. 손가락 끝이 자음과 모음을 섞어 다섯 글자를 만들어 냈다. 금방 검색 결과가 떴다.
「처음부터 고정된 성별을 가지고 태어나는 베타와 달리, 제2의 성이 발현하는 알파와 오메가에게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변이 증상. 제2의 성이 발현한 후 특정한 조건 없이 또 한 번 제3의 성이 발현하는 것을 ‘젠더체인지(Gender Change)’라 부른다. 알파와 오메가 인구 중 약 0.1%의 극소수만이 이러한 젠더체인지를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국내에서 젠더체인지를 겪은 사례가 보고된 바 없다.」
젠더체인지에 관한 설명은 의학 정보 파트로 분류되어 있었다. 다른 질병에 관한 설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길이가 짧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차우현이 원하는 정보를 얻는 데에 크게 부족함은 없었다. 아직 국내에서 젠더체인지를 겪은 사례는 보고된 바 없다. 낮게 가라앉은 고요한 눈동자가 맨 마지막 문장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머리가 좋은 차우현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금방 파악했다. ‘차태민과 똑같이’, ‘젠더체인지’, ‘베타’, ‘네 아버지’. 한도연이 제게 한 말들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그 모든 단어가 마치 이정표처럼 하나의 추악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애써 아닐 거라 부정하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차우현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의 맨 위에는 오늘 받은 젠더 검사 결과지가 들어 있었다. 차우현은 그것을 꺼낸 뒤 망설임 없이 짝짝 찢었다. 우성 알파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잘게.
알고 있었다. 이런다고 해서 자신이 베타가 된다거나 한도연이 바라는 것처럼 우성 오메가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 하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우성 알파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이 종이 쪼가리가 너무나도 저주스러웠다.
“…우성 알파.”
어금니를 악문 차우현이 씹듯이 우성 알파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제 마음만큼이나 갈기갈기 찢긴 젠더 검사지를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면서.
차 회장이 원하는 건 보다 완벽하고, 우월하고, 월등한 우성 알파였다. ‘우성’이라는 단어로 그 모든 우위와 가치를 증명하는. 고작 그 이름을 가진 존재를 하나 더 집안에 두기 위해 차 회장은 한도연을 망쳐 놓았다. 차우현을 가장 사랑했고, 또 차우현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그래서 끝내 결국엔 차우현의 인생도 함께 망쳤다. 그런 인간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줄 수야 없었다. 절대 차 회장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 주지 않을 것이었다.
차우현은 결심했다. 그가 자신한테 품은 기대감을 모조리 다 부숴 버리기로. 차 회장 인생에 있어 아마도 최초의 감정일 패배감을 안겨 주고 싶었다. 아무리 잘난 CH그룹의 차 회장이라고 해도 모든 일이 당신 마음먹은 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걸. 당신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는 걸. 결국엔 당신이 틀렸다는 걸. 그 사실을 차 회장의 비틀린 욕망과 집착으로 인해 태어난 자신을 통해 직접 알려 줄 것이었다.
혹시 몰랐다. 그러면 이 지독한 CH그룹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금은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될지도.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아니. 그것도 모자라 우성 알파란 이름에 먹칠을 하는 존재 같은 걸 차 회장이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해 줄 리가 없으니까. 그 순간 잘못 깨진 유리 조각처럼 잔뜩 날이 선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차 회장이 자신을 버릴 언젠가의 그날이. 그건 차 회장이 결국 스스로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자신한테서 등을 돌린단 소리였으므로.
***
초등학교를 졸업한 차우현은 자연스럽게 세움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른바 귀족 재단이라 불리는 세움 재단에서 세운 학교였다. 돈 있고 힘 좀 깨나 쓴다 하는 집안의 자제들만 다니는 명문 중학교라 다른 학교에 비해서 알파가 많았다. 그래 봤자 베타와 비교하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임에도 알파들은 당연하다는 듯 베타를 배척했다. 오직 알파끼리만 뭉쳐 다니려고 했다. 저것도 피에 새겨진 본능인가. 알파로 발현된 지 고작 1년도 채 안 된 주제에 본능적으로 무리를 나눠 서열질을 하는 꼬락서니가, 차우현의 눈에는 우스워 보였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베타들이 그 돼 먹지도 않은 장단에 맞춰 준다는 것이었다. 알파의 앞에서 베타들은 자연스럽게 저자세를 취하며 몸을 사렸다. 도대체 그깟 알파가 뭐라고. 여기고 저기고 죄다 병신뿐이었다.
“안녕, 우현아. 나는 7반 한상수야.”
“나는 3반에 박영후.”
“나는 이민우고 4반이야. 우현아. 너 오늘 학교 끝나고 뭐 해? 우리랑 같이 놀래?”
그런 알파들 사이에서도 차우현의 존재감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CH그룹’과 ‘우성 알파’. 차우현의 앞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서열이 누구인지 직감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알파들은 친한 척 차우현한테 달라붙었다. 그들은 당연히 차우현이 자신들의 무리에 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우현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알파들과 몰려다니며 우위에 서려고 하는 거. 그걸 당연시하고 즐기는 거. 가장 보편적인 알파의 모습임과 동시에 차 회장이 바라는 모습이었다. 차우현은 차 회장의 눈 밖에 나도록 등신짓을 해야 했다. 그의 눈에 들 짓을 하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