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오래간만에 쉬는 날이었다. 고결은 억제제를 타기 위해서 집 근처 병원을 찾았다. 억제제는 어느 병원에서나 탈 수 있었다. 꼭 처음 오메가 판정을 받은 병원에서 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래서 억제제가 떨어질 때쯤 되면 근처에 있는 아무 병원이나 들어가서 진찰받고 약을 탔다. 우현의 스케줄에 따라 고결이 있는 장소 또한 바뀌게 되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혹시 열성 오메가여도 우성 알파한테 영향을 줄 수 있나요?”
그래도 집 근처에 있는 이 내과는 제법 자주 방문했다. 오늘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 세 번의 방문 중 고결이 질문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원래 질문하는 사람은 고결이 아니라 의사였다. 컨디션은 괜찮으셨나요? 약효는 어떠셨어요? 약을 좀 늘릴까요? 줄일까요?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고결은 네, 아니요만 대답하다 억제제를 처방받고 병원을 나왔다.
“영향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나요?”
“그러니까 그… 열성 오메가 페로몬 때문에 러트에 영향을 받게 되기도 하나 궁금해서요.”
제 얘기는 아니고요. 구질구질해도 그런 말을 덧붙여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괜한 고민이었다. 어차피 그런 말을 할 새도 없었다.
“아. 그럼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의사의 입에선 너무도 쉽게 긍정의 대답이 나왔다. 충분히. 그 단어가 유독 크게 들렸다. 고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친절한 의사는 환자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번엔 보다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졌다. 고결의 입장에선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만한.
“오메가 분이 페로몬 조절이 잘 안 되는 경우라면 그럴 수도 있어요. 각인을 했다면 또 모를까 반려도 아닌데 그런 상태로 함께 있으면 아무리 우성이라도 영향을 아예 안 받긴 힘들 테니까요.”
의사는 말하고 나서야 그게 제 앞에 있는 환자의 사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저를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탓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거의 종일 붙어 있는 거 아닌 이상은 그렇게까지 크게 영향받진 않을 겁니다.”
의사는 다급하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을 건넸다. 그러니 걱정 마시라는 의미를 담아. 다만 그게 고결한테는 오히려 확인 사살이 됐다는 게 문제였다.
며칠 전에 그 서랍을 연 건 정말 지극히 우연이었다. 아니.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평소 우현은 러트에 철두철미하게 대비하는 편이었다. TV 선반의 작은 서랍 한 칸을 러트 억제제로 채워 두는 거로도 모자라 지갑과 가방 안에도 한두 개씩은 꼭 넣어 두곤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용으로.
하지만 정작 고결은 우현이 억제제를 먹는 걸 제 눈으로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1년에 두 번 볼까 말까 그랬다. 얼굴 봐 온 시간만 8년, 개중에서도 5년 동안은 거의 한 몸처럼 늘 붙어 있다시피 했는데도 불구하고. 우현의 말에 따르면 원래 알파의 러트는 오메가의 히트사이클과 달라서 그렇게까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뭐지? 원래도 이것밖에 없었나?’
고결은 보조 배터리를 찾는 중이었다. 분명 거실 테이블 아래에다 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보이질 않았다. 억제제가 든 서랍으로 팔을 뻗은 건 그 맥락에서였다. 여기저기를 들쑤시다가 그냥 얼떨결에 열게 됐다.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는 그 서랍을.
‘약이… 줄어든 거 같은데.’
우현의 집에서 같이 지낸 세월이 제법 길었다. 그래서 서랍에 손은 대지 않아도 그 안이 러트 억제제로 차 있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약이 좀 비어 있었다. 빽빽하게 차 있어야 할 공간이 헐겁게 남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형이 약 채워 두는 걸 잊었나? 근데 그 전에 이렇게 비는 게 티가 날 정도로 약을 먹은 적이 없는데?’
순간 의아함과 함께 어떤 불안한 예감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나 때문인가? 나 때문에 형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뒤늦게 열성 오메가로 발현하게 된 자신. 그리고 눈에 띄게 줄어든 우현의 억제제. 아무런 연관도 없을 거라고 치부하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실제로 차우현은 고결한테 페로몬을 풀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고결의 페로몬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물론 고결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의사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열성이라고 한들 각인 대상도 아닌 오메가의 페로몬에 계속 노출되니 몸에 무리가 왔다. 관계는 맺지 않으면서 페로몬으로 자극만 하고 있는 꼴이니 몸에 무리가 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우현이 페로몬을 흘릴 때마다 거기에 반응하는 고결의 페로몬 또한 짙어졌다. 희미하던 단내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때마다 우현의 페로몬도 불안정하게 변했다. 어린 시절 우현은 페로몬 조절에 관해 엄하다 못해 강박적으로 교육받았다. 아무 데서나 함부로 페로몬을 푸는 건 이쪽 세계에서 못 배운 사람이나 할 법한, 상당히 저급한 행동으로 여겨졌으니까. CH그룹의 이름에 먹칠할 행동을 차 회장이 용서할 리가 없었다.
페로몬을 조절하는 건 차우현한테 있어 숨 쉬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하게 되는 그런 거. 그런데 이제는 그 쉬운 페로몬 조절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았다. 제멋대로 날뛰려는 페로몬을 억누르기 위해선 억제제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날 이후로 고결은 차우현을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우현이 억제제를 먹는 모습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안감은 차츰 더 커져 갔다. 그러던 중 집에 온 택배들 가운데 무언가를 발견했다. CH병원. 보낸 사람의 이름에 덩그러니 적혀 있는 익숙한 명칭. 우현한테 온 택배를 함부로 뜯어볼 순 없었다. 그건 고결의 일이 아니었다. 고결은 언제나처럼 택배들을 모아 우현에게 가져다줬다. 그리고 억제제가 든 서랍을 다시 열어 봤다. 저번과는 다르게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비었던 약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마치 증식이라도 한 것처럼.
‘아니야. 혹시 몰라. 아닐 수도 있잖아.’
그걸 보고서도 애써 부정했다. 조금 더 확실하게 하자 싶었다. 고결은 떨리는 손으로 약의 개수를 셌다. 총 마흔 개. 그런데 어제 셌을 때는 서른네 개로 줄어 있었다. 이로써 우현이 저 몰래 억제제를 먹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확실해진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 때문인 게 맞았던 거네.”
병원에서 나온 고결이 멍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현이 억제제를 먹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확실해졌다. 아마 우현은 단순 컨디션 난조에 의한 러트라 생각했을 테다. 그게 우현의 옆에 있는 자신 때문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자신한테 괜한 걱정 끼치기 싫어서 혼자 몰래 러트 억제제를 먹으며 참아냈을 것이었다. 고결이 아는 우현은 그럴 사람이었다.
내가 나 살겠다고 형을 죽이고 있었구나. 나를 살려 준 형을 내가 죽이고 있었어. 내 이기심으로. 지독한 죄책감에 혀뿌리마저 썼다. 잘한 것도 없으면서 금방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난 울 자격 없는데. 울면 안 되는데. 고결은 눈물을 참기 위해 일부러 하늘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고인 눈물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가느다란 눈꼬리를 따라 옆으로 흘러내렸다. 고결이 주먹으로 제 눈가를 대충 훔쳤다.
우현이 자신을 살려 줬다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단순히 일자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현이 힘써 준 덕분에 연차에 비해 과분한 월급을 받고 다녔다. 엄마의 수술비도 다 우현이 대준 것이었다. 빌려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갚아. 그렇게 말하며 웃던 사람이었다. 그냥 준다고 하면 절대로 받지 않을 거 아니까 일부러 그런 거란 것쯤은 알았다. 도움받는 주제에 자존심 내세우는 자신이 답답할 만도 한데 오히려 우현은 배려를 해 줬다. 그렇게나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반짝이는 거에 끌리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삶에도 그런 게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나. 이 팍팍하고 질척이는. 가만히 있어도 때때로 숨이 차오르고 또 막히는 삶에 우현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것쯤. 그런 숨 쉴 구멍 하나쯤은 둬도 되는 거 아닐까. 되먹지 못한 자기 연민에 빠져 그렇게 자위했다. 근데 그래서는 안 됐던 거다. 결국에 제 과분한 욕심이 우현을 갉아먹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후.”
짧게 호흡을 고른 고결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찾는 손가락에선 망설임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손톱이 바짝 깎인 단정한 손끝이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신호음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저 고결입니다. 지금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아, 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가능하면 꼭 얼굴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지금 회사로 가도 괜찮을까요?”
갑작스러운 방문 요청이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휴대폰 너머에서 흔쾌한 허락이 떨어졌다. 고결은 그 길로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로 향했다. 뒤늦은 결심이 섰다. 이제야. 비로소.
***
“어, 결이 씨.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매니지먼트 본부를 총괄하는 남윤이 반가운 얼굴로 고결을 맞이했다. 고결은 예의 바르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아. 혹시 여기서 말하기 좀 그러면 회의실로 들어갈까? 들어가서 얘기할래?”
매니지먼트 본부는 다른 본부에 비해 현저히 책상 수가 적은 편이었다. 심지어 그 적은 책상마저도 반 이상이 비워져 있었다. 워낙에 바깥으로 도는 일이 많다 보니 애초 다들 자기 자리라고 할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열 개 남짓한 책상을 두고 필요하면 아무 데나 앉아서 잠깐 컴퓨터를 쓰는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