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우현의 허술함은 눈에 안약을 넣는 아주 사소한 행동에서마저도 두드러졌다. 우현은 안약을 잘 넣지 못했다. 약 떨어지는 타이밍을 어찌나 못 맞추는지. 안약을 눈에 넣는 게 아니라 눈꺼풀 주위로 대충 떨어트리는 수준이었다. 그런 이유로 차우현의 눈에 안약을 넣어 주는 건 언제나 고결의 몫이었다.
안약을 넣기 위해선 어느 정도 높이 차이가 나야 수월했다. 고결은 소파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평소처럼 우현을 앉혀 두고 그 앞에 서서 안약을 넣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우현이 어깨를 붙잡아 왔다. 그것도 모자라 그대로 힘을 실어 어깨를 지그시 내리누르기까지 했다. 고결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고결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차우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고결을 향해 차우현이 조금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뭐 하러 일어나. 여기는 대기실도 아니니까 굳이 그렇게 넣을 필요 없잖아.”
“…그럼요?”
고결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돌아온 건 말이 아닌 행동이었다. 차우현이 기다렸다는 듯 소파 위로 길게 누웠다. 그것도 고결의 허벅지를 베고서. 졸지에 우현한테 한쪽 허벅지를 내어 주게 된 고결은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약만 꾹 쥐고 있는 손이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웠다.
“내가 누우면 되지. 그럼 결이 너도 안약 넣기 훨씬 편하잖아. 안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현이 이렇게 누워 주면 안약을 넣기가 한결 수월해지긴 했다. 비록 고결의 마음은 불편할지언정. 고결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차우현이 그 상태로 고개를 이리저리 살짝 움직였다. 눕기에 가장 좋은 최적의 자세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차우현이 너무 편하고 또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고결은 순간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졌다.
‘내가 원래 우현이 형한테 다리 베개를 많이 해 줬던가?’
아니. 그럴 리가. 자신이 우현한테 그런 걸 해 줬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이렇게 남의 다리를 베고 눕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남의 눈에 매번 안약을 대신 넣어 준다는 것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일이긴 했지만.
“결아.”
차우현 자신의 왼쪽 눈꼬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저 안약을 넣어 달라고 하는 간단한 동작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조차도 우현이 하니 지나치게 근사했다. 꼭 CF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멍하니 우현을 내려다보고 있던 고결이 그제야 허둥지둥 안약 뚜껑을 열었다.
“그, 그럼 넣을게요.”
“응.”
넣겠다고 말은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누운 상태에서 안약을 넣어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가 필요 이상으로 떨리고 긴장이 됐다. 잠시 머뭇거리던 고결이 주춤주춤 아래로 손을 내렸다.
‘내가 원래 손을 어디다 뒀더라.’
겨우 자세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별게 다 헷갈렸다. 우현의 얼굴 어디를 붙잡았는지. 아니, 그 전에 붙잡긴 했던 건지. 정말 단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고결은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우현의 눈꺼풀 위에다 엄지만 살짝 올려 두었다. 일단은 눈을 감지 못하도록 하는 게 우선이겠지 싶어서. 우현의 쪽으로 상체를 조금 숙인 고결이 신중하게 안약을 떨어트렸다. 톡. 이게 뭐라고 무의식중에 숨까지 참게 됐다.
“…다 됐어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왠지 모를 긴장감 때문이었다. 차우현이 고결을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결아. 너 허벅지 진짜 편하다. 네 허벅지 베고 있으니까 잠이 막 와. 대본 연습하지 말고 이대로 한숨 잘까 봐.”
차우현은 아예 고결의 쪽으로 돌아누웠다. 고결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으나 차우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고결의 가는 허리를 두 팔로 가두듯 끌어안은 차우현이 그 상태로 가볍게 이마를 비볐다. 마치 잠투정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골반과 아랫배, 그 사이로 우현의 이마가 문질러졌다. 긴장감에 고결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차우현이 그런 결을 달래듯 등허리를 감싼 손을 위아래로 살살 움직였다. 그러다 이내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차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푹 들어간 고결의 척추뼈를 하나하나 손끝으로 더듬어 그리는 것처럼, 느릿느릿 천천히. 감당이 안 되는 그 행동에 고결은 애꿎은 입술만 안으로 말아 물었다. 우현과 맞닿아 있는 곳마다 뜨겁게 열이 번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런 온도라면 화상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저기. 형.”
고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차우현을 불렀다. 그 부름에도 차우현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고결은 아예 뒤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 여전히 제 등에다 손가락 장난을 하고 있는 우현의 손을 다급하게 겹쳐 잡았다. 그제야 차우현이 고결의 골반 쪽에 딱 붙이고 있던 이마를 떼고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방금 전에 넣은 안약 때문인지 뭔지 마주친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깊은 것도 같았다.
“그래도 연습…. 대본 연습은 해야 하지 않아요?”
“우리 결이가 웬일로 연습을 하라고 하지? 원래는 툭하면 쉬라고 하잖아.”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에서 숨지지 못할 장난기가 묻어났다. 그제야 고결은 깨달았다. 이대로 한숨 잔다는 우현의 말이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는 걸. 우현한테 안약 넣어 주는 건 가능해도 베개를 대신해 제 허벅지를 빌려줄 자신은 없었다. 고결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형이야말로 진짜 쉴 생각 없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제 일어나요. 그리고 형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밥 먹고 바로 자면 몸에 안 좋아요.”
고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태연하게 대꾸했다. 고결의 구박 아닌 구박에 차우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와 동시에 허벅지와 골반. 그리고 허리에서 느껴지던 무게감과 온기 역시 사라졌다. 이제야 비로소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고결은 미처 닫지 못한 안약 뚜껑을 꽉 닫은 뒤 원래 있던 백팩 앞주머니에다 집어넣었다.
“안 되겠다. 결이 무서워서라도 얼른 일어나서 연습해야지.”
차우현이 항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바닥이 보이게끔 양팔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 싱거운 행동에 고결은 픽 헛웃음을 흘리며 옆에 놔 뒀던 대본을 다시 들었다.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 고결의 눈동자가 대본 겉장에 크게 인쇄된 글씨를 느리게 훑었다.
<우리 내일부터 사랑할까요?>가 끝났지만 차우현은 쉴 수 없었다. 이미 그 전부터 케이블 채널에서 심야에 방송될 예정인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의 출연을 확정 짓고 촬영에 들어간 탓이었다.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는 차우현의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큰 화제를 모았다. 스타 작가 김보연과 믿고 보는 배우 차우현. 흔히들 말하는 흥행 보증 수표 두 명이 모였으니 대중들의 기대치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스릴러와 추리물, 의학물 등 장르 드라마 쪽으로 강세를 보이는 김보연 작가는 독특한 소재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를 그려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김보연 작가와 함께 작품을 한 배우는 무조건 인생 캐릭터가 생긴다는 말이 드라마 판에서 암암리에 쓰일 정도였다.
그 드라마에서 차우현이 맡은 배역은 여러 인격을 가진 천재 외과 의사 ‘현재’였다. 제목의 ‘해리(Harry)’는 해리성 정체 장애의 ‘해리’와 악마 혹은 악귀를 지칭하는 ‘Harry’를 뜻하는,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드라마의 주요 골자는 이랬다. 출중한 외모에 천재성까지 갖춘 외과 의사 ‘현재’는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완벽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는 1년 전에 겪은 한 사고 때문에 해리성 정체 장애를 겪고 있다.
‘현재’는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지만 그것을 ‘해리’라는 한 인격이 방해한다. 심지어 ‘해리’는 계속 그렇게 자신을 없애려고 든다면 더는 참지 않겠다며 몸의 주인인 ‘현재’한테 경고를 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현재’는 그걸 철저히 무시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해리’가 살인을 저지르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현재’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증거를 조작한다.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끝도 없이 불어나 점점 ‘현재’를 압박해 오고, ‘해리’는 그 기회를 틈타 그를 아예 나락으로 떨어트리고자 한다. ‘현재’에 의해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흠집이라곤 하나 없던 그의 인생이라도 망가트려 놔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아서. ‘현재’는 그런 ‘해리’로부터 자신의 인생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즉 차우현이 연기해야 할 것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살인마 ‘해리’와 차갑고, 냉철하며 이지적인 천재 외과 의사 ‘현재’. 이렇게 두 명이었다.
‘해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다. 그는 화려한 연변과 빼어난 외모 등 자신이 가진 매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한 뒤 쓸모를 다하면 가차 없이 죽였다. ‘현재’는 외모, 머리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완벽하지만 지극히 염세적인 인물로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 않게 타인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정도의 냉혈한이다. 두 역할 다 그동안 차우현이 맡아 오던 배역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지난 5년간 차우현이 맡아 온 배역은 대체로 선하고, 착했다. 논란 없는 연예인으로 이미지 자체가 워낙에 좋고 반듯하다 보니 악역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차우현이 <친애하는 해리에게(My Harry)>를 차기작으로 선택한 건 엄청나게 큰 도전이었다. 드라마만 잘된다면 차우현의 연기 인생에 큰 획을 그을 전환점이 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