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래빗 트랩-1화 (1/71)

Rabbit Trap (래빗 트랩)

1화

-0. prologue-

커피 머신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다 캡슐을 넣는 동작이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고결은 머신에서 샷이 추출되는 동안 두 개의 투명한 유리잔에다 얼음을 가득 채웠다. 날이 추워도 무조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우현을 따라 어느 순간부터인가 덩달아 차가운 것만 마시게 되어 버렸다. 의식할 새도 없이 그렇게 됐다.

입맛과 습관 같은 것들은 참 쉽게도 스며들었다. 우현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예 고결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굳어져 버리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고결은 완성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차우현에게로 다가갔다.

“형. 여기요.”

“응. 고마워. 결아.”

빙그레 웃은 차우현이 고결이 내민 커피를 가볍게 받아 들었다. 고결은 구태여 뭘요, 라든가 고맙긴요, 같은 낯간지러운 대꾸를 하는 대신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인 뒤 차우현의 옆에 착석했다. 차우현이 틀어 둔 TV에서는 웬 노란색 앵무새가 나오고 있었다.

-천재 앵무새 나나를 소개합니다!

스피커를 뚫고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가 경쾌하고 또 밝았다. 고결은 자신도 모르게 TV 화면에 가만히 시선을 고정했다.

천재 앵무새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나나는 정말 영리했다. 말을 잘하는 건 기본이고 춤을 추듯이 몸을 흔들며 노래도 불렀다. 사육사가 빗자루질 하는 모습을 보고 어딘가에서 나뭇가지를 물어와 그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기도 했다. 고결은 그런 나나를 보며 예전에 우현과 함께 화보를 찍은 ‘츄’라는 앵무새를 떠올렸다.

츄는 나나처럼 영리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화려하고 예쁘게 생긴 앵무새였다. 촬영에 익숙한 건지 츄는 그 긴 시간 동안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렇다 할 날갯짓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우현의 곁에 얌전히 붙어 있다 주인이 다가가면 그제야 몸을 움직여 어깨나 손 위에 살포시 앉았다. 잘 만든 인형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와. 츄 어쩜 이렇게 얌전해요? 촬영 때 엄청 날아다니면 어떡하나 저희끼리 걱정 많이 했거든요. 혹시 몰라서 채랑 망 같은 것도 따로 준비해 놨는데.”

당연하게도 츄는 그날 모든 스태프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다. 특히나 여자 스태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여자 스태프들은 기다렸다는 듯 츄한테로 다가갔다.

츄는 처음 만난 사람들의 손도 곧잘 탔다.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 위에 올라갔고, 머리나 몸을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었다. 고결은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관찰하듯 지켜보기만 했다. 신기하긴 한데 굳이 가까이 가서 츄를 만진다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이런 환경에 익숙한 새라고 한들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들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이 돼서 그랬다.

“아, 날개를 잘랐거든요. 그래서 그래요.”

어떻게 이리 얌전하냐는 물음에 츄의 주인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 덤덤한 말에 여자 스태프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이상한 소리가 마치 짠 것처럼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여자 스태프들이 저마다 입을 틀어막고서 불쌍하다는 눈으로 츄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주변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네? 날개요? 진짜요? 못 날게 하려고 일부러 날개를 자르는 거예요?”

“너무 놀랄 거 없는 게 원래 대부분의 애완조는 날개를 잘라요. 애들이 새장에만 있으면 답답해하니까 집에서는 풀어 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집 안 막 헤집고 다니다 다칠 수도 있고 또 열린 창문 틈으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거 예방하려고 날개를 자르는 거예요. 나만 좋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 같이 잘 지내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날개는 좀….”

츄를 손에 올리고 있던 여자 스태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츄의 주인이 자신이 직접 보여 주겠다며 여자 스태프한테 손을 내밀었다. 역시나 주인은 주인인 건지. 츄는 그 손길 한 번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인한테로 곧장 넘어갔다.

“새는 날개가 이런 식으로 위, 중간, 아래 총 세 겹으로 나뉘는데 딱 봐도 맨 아래에 있는 깃털이 확실히 얇죠? 길이도 길고요. 이걸 비행깃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을 중간 날개인 덮깃에 닿기 전까지만 잘라 주는 거예요. 사람으로 치면 머리카락 자르는 거랑 똑같아요. 너무 짧게 자르지만 않으면 아프지도 않고, 어차피 털이라 나중에 다시 자라요. 그냥 잘 날지를 못해서 그러는 거지. 비행깃을 많이 자르면 자를수록 새는 비행 능력이 떨어지거든요.”

츄의 주인이 츄의 한쪽 날개를 쫙 펼친 채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설명에 다시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다들 언제 기함했냐는 듯 또다시 츄의 이름을 부르며 너도나도 손에 올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주인의 설명에도 고결의 기분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날개를 자르는 데 통증이 동반되지 않는다고 해서 츄가 안쓰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비행은 새한테 있어 기본 능력이자 자질이었다. 애초 새의 몸에 달린 날개는 비행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날개를 잘라 일부러 날지 못하게 만든다니. 사람과 함께 지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츄도 그걸 원했을지 궁금했다.

만약 츄가 주인한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 고결은 잠시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기꺼이 내 날개를 잘라 가라고.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천명쯤은 쉽게 저버릴 수 있다고. 내 자유를 옭아매고 속박해도 좋다고. 그렇게 말했을까? 아니면 새장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조금 길어도 좋으니, 대신 밖으로 나갔을 때만큼은 자유롭게 날고 싶다고 말했을까?

고결은 츄가 아니니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츄는 이미 날개가 잘렸고 그 주인의 곁에 있는 동안은 아마 평생 그럴 거라는 점이었다. 주인의 손에 의해 매번 날개가 잘리는 것. 그래서 죽을 때까지 자유롭게 날 수 없는 것. 그게 츄의 숙명이었다.

‘나만 좋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 같이 잘 지내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그 말이 고결의 귀에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이기심으로 들렸다. 과연 날개를 잘린 새와 ‘잘 지낸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 그 문장 자체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새를 자신의 옆에 묶어 두기 위한 인간의 욕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쟤도 날개를 잘랐으려나.”

무의식중에 살짝 벌어진 고결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옆에 앉은 차우현이 듣기엔 별 무리가 없었다. 차우현이 고결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날개라니?”

옆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고결 역시 TV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차우현한테로 옮겼다. 고결을 바라보는 차우현의 얼굴에는 약간의 호기심과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우현은 모르는 내용인 게 당연했다. 고결이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그때 우현은 메이크업 수정을 받느라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결은 그날 츄의 주인한테 들은 이야기를 차우현한테 전달했다. 말하면서야 겨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긴 촬영 시간 내내 츄가 얌전했던 건, 어쩌면 그 환경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제대로 날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그러자 꼭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기분이 다시 씁쓸해졌다. 비록 고결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지만.

“그때 그 주인분이 자기 혼자만 좋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 새랑 같이 잘 지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그렇게 말했거든요. 근데… 저는 그 말 듣고 나서도 괜히 마음이 좀 불편하더라고요.”

“그래? 어떤 부분이?”

“그게….”

고결이 말끝을 흐렸다.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최대한 잘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원래 말하는 데 그렇게 소질이 있는 편이 아니라 생각한 바를 그나마 잘 전달하기 위해선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새한테 있어서 난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근데 그걸 인간의 편의를 위해 억압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렇게 새의 날개를 잘라서 자신의 옆에다 묶어 두는 게 진짜 서로를 위한 일일지.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이기심이나 욕심이란 단어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건 아닐지…. 뭐,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생각한 바를 잘 전달하긴 한 것 같은데 민망했다. 입을 다물고 나니 그제야 말할 땐 인식하지 못한 무안함과 쑥스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어쩌다 보니 대화 주제가 지나치게 무겁고 진중해져 버렸다. 천재 앵무새를 소개하는 동물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은 대화였다. 고결은 아닌 척 은근히 우현의 눈치를 살폈다.

“…….”

차우현은 별말이 없었다. 그저 눈을 아래로 살짝 내리깐 채 그새 결로가 생긴 유리잔의 표면을 느릿하게 엄지로 쓱 문지를 뿐이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아무리 열심히 눈치를 살펴봤자 고결은 차우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투명하고 깨끗한 차우현의 얼굴은 꼭 잘 만든 유리 공예품 같았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반짝 빛나지만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어서 그 안은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 단지 예쁘게 잘 다듬어져 있기만 한. 달그락. 녹은 얼음들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깼다.

“글쎄.”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든 차우현이 고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또 근사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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