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A? MIN HA!]
“조금만 빨리 말하지 그랬어, 너 같은 백점짜리 색시는 남자라도 환영했을 거야.”
“……동성애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색시’라는 말과 ‘임신’이거든?”
“아, 미안.”
공항으로 마중 나와 준 D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D는 그 허튼 소리로 나를 인정했고, 위로했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어색해져 버린 공기를 어설프게나마 풀어보려 애썼다. 그리고 D는 얼마 후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조금은 무덤덤하게 그 모든 것을 대할 수 있었다.
결혼식에서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신부가 던진 부케를 내가 받아버린 것이다. 사람들 모두 박수를 치며 ‘6개월 안에 시집가야 된다!’ 놀리고 웃었다. 하지만 D만은 뻣뻣하게 굳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보이자, 그제야 D도 환하게 웃었다. 신혼여행에 다녀온 D와는 간간히 만나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자주는 아니었다. 나는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퇴근 후에 집에서 예쁜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20년 지기 친구가 보이기나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다시 나가게 되었다. 사표 처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대신 한 해 동안 모든 휴가를 쓸 수 없다는 협박과 함께 사장에게 욕을 엄청 먹었고, 빈자리를 메워준 동료들에게 보름이 넘도록 점심을 사야했다. 그래도 다행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박봉이지만 회사 규모가 작아서인지 일이 그리 고되지 않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 정도면 큰 것을 바라지 않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을 뒤집으니, 좋은 것만 보였다.
엘씨오는 안드레아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 여전히 투덕거리긴 했지만, 서로 이것저것 챙겨주는 걸 보아, 그리 가망성이 없어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두 달 후, 안드레아가 먼저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석 달 후에는 교환학생으로서 학기를 마친 후 엘씨오도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간간히 전화통화를 하는데, 엘씨오가 이야기 하는 안부 중에는 안드레아에 관한 것이 점점 더 늘어져 갔다.
언젠가 안드레아가 전화를 받아, 넌지시 ‘축하한다’고 말해주었지만 역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어쩌면 평생 둘 다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그럼 또 어떤가. 때로는 깨닫지 못한 감정이 버릇이 되어 더 오래가기도 한다.
그리고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 헤어진 후, 정확히 한 달 하고 보름 만에 아힘이 한국으로 왔다. 입국장에서 나온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러나 얼굴을 조금 붉히며 한쪽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아…안녕.”
어설픈 발음으로, 그러나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한국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틀 만에 다시 헤어졌다. 도쿄에서 개장하는 호프브로이 분점 때문에 일본에 가기 전에 잠시 들른 것이었다. 그 이틀 동안, 잔뜩 했다. 덕분에 회사에서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또 욕을 왕창 먹었다.
도쿄에 있는 아힘은 매일 밤, 정확한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덕분에 회식 도중에 몰래 빠져나오다가 역시 욕을 왕창 먹었다. 개장 후 한창 바쁜지 그 후로 석 달이 지나서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약(?)해 뒀던 휴가일인 일주일을 꼬박 채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일주일 동안은 칼 퇴근을 지키느라 모든 업무를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해치운 덕분에, 이번에는 ‘대단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 후부터는 분점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한 달에 한번은 서울에서 사오일은 지내다 가곤 했다. 그렇게, 다시 겨울이 왔다. 나는 휴가도 없고 일본으로 자주 갈 수 있는 자금적인 여유도 없어서, 매번 그가 움직여야 했다. 미안한 마음에 금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힘들지 않냐고 넌지시 물은 적이 있는데, 아힘은 예의 그 표정 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보였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분점을 내면서 어느 정도 경영권을 인계받았고, 그래서 가게에 나가서도 특별히 바쁘지 않은 이상 체력을 쓰는 일은 하지 않아요. 금전적인 문제는… 평소엔 일 때문에 밖에 나가는 일도 거의 없고 덕분에 돈 쓸 일도 없으니까, 부담 느끼진 않아요.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괜찮다니까요. 그건 됐고, 그만 쉬었으면 허리 좀 들어봐요.>
하지만 문제는, 내가 별로 괜찮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쌓인 것은 잘 알겠는데, 그리고 그건 이쪽 사정도 마찬가지지만, 사오일을 내내 시달리다보면 그가 떠나는 날에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써 시간과 돈을 퍼부어 달려오는 그를 두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시달리다 겨우 마음을 다잡으면 또 그가 온다. 같은 패턴, 또 같은 패턴.
주말정도라면 괜찮겠지만, 평일, 다음날 또 출근해야 하는 날에는 정말 울고만 싶어진다. 힘들다고 눈치를 줘보기도 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봐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상황 말이다.
<아힘, 뭐……하는 거예요?>
<보면 모릅니까? 양치하는 중이잖아요.>
<지금 나 샤워 중인데요?>
<해요.>
<하지만…….>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하라구요.>
여지없이 한 달이 지나고 그가 왔다. 이제는 마중 나가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잘 찾아오고, 복사해 준 열쇠로 미리 집에 들어가 퇴근하는 나를 맞아주기도 한다. 그리고 오는 길에 장도 봐와선 훌륭한 요리솜씨를 발휘해 식탁에는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기도 한다. 여기까지, 여기까지는 정말 어느 깨소금 부부 부럽지 않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깨소금이, 타들어간다.
좁은 욕실에서 혼자 샤워하기도 버거운데, 굳이 들어와 양치를 해야만 하는 이유 따위, 없을 것이다. 아힘은 무뚝뚝한 얼굴로 거울에 자신의 구강 상태를 점검하며 열심히 칫솔질을 하고야 있지만, 나는 그를 옆에 두고 홀딱 벗은 젖은 몸에 비누칠을 하고 그걸 다시 씻겨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사귄지 일 년이 넘었다 하더라도, 일(日)로 치자면 며칠 되지도 않는다. 옷을 벗고 살을 맞댈 때마다 새삼 부끄럽고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아힘이 내 그런 반응을 즐긴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창피한 것이다.
<뭐하는 겁니까? 왜 제대로 씻지 않고 그냥 나와요?>
<씻었는데요.>
<물만 적셨잖아요. 꼼꼼하게 비누칠해요, 모두 다.>
어쩡쩡하게 몸을 구부린 채 미적거리다가 그냥 물로만 행구고 얼른 수건으로 허리를 감싸 아래를 가려버렸다. 그리고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는데, 잡혀버렸다. 아힘은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보면, 연인의 청결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결벽증환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요, 내가 씻겨줘요?>
<아, 아니요!>
얼른 욕조 위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외국에선 욕실에 따로 배수구가 없어서 욕조나 샤워부스에 커튼을 설치해 물이 튀지 않도록 한다. 한국에서는, 모든 욕실에는 웬만해서는 잘 막히지도 않는 배수구가 뚫려 있다.
쓸데없지만, 그래도, 커튼 달 걸.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힘은 아예 내가 꼼꼼하게 모두 잘 씻나 못 씻나 감시라도 하는 듯 뚜껑을 내린 변기 위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비누칠을 하다가, 세면대를 똑똑- 노크하듯 두드리는 의미 모를 행동에 괜히 소심해져선 결국 옆으로 선 채 묵묵히 앞으로 보며 비누칠을 했다.
샤워볼로 피부를 문지르는 소리만 작은 욕실을 가득 울렸다. 간간히 오래된 샤워기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깨를 흠칫 떨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아힘은 샤워볼이 닦고 있는 부위만을 고집스럽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몽글몽글한 거품으로 피부를 덮자, 그나마 가려주는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거품을 씻어낼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거품을 씻겨 내다니, 거품이 없어지다니. 그건 차라리 옷을 벗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각오를 다졌다. 휘둘리면 안 돼. 그리고 눈에 힘을 주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힘, 그만 나가줘요.>
<왜요?>
<그… 물이 튈까봐…….>
너무 당당하게 ‘왜요?’하고 되묻는 그를 보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쪽이었다. 불끈 쥐었던 주먹을 풀고 두 손 가득 샤워볼을 주물럭거리며 어설픈 핑계를 대자, 아힘은 예의 그 건방진 미소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외로 순순히 말을 들어주는 그에게 또 한 번 당황해서 멍청하게 ‘고마워요’ 인사까지 했다. 그런데, 문밖으로 퇴장해야 할 그가 단 세 걸음만에 바짝 다가온 것이다.
<왜…왜, 왜…왜->
<뭘 그렇게 당황해요? 손 씻으려고요. 샤워기 좀 이리 줘요.>
가까이 세면대가 있는데 왜 굳이 욕조의 샤워기로 손을 씻어야 하는 건지, 타당한 이유 따위 없을 게 뻔했다. 그저 내가 당황하고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고 어깨를 흠칫 떨어대는 게 우스운 거겠지. 대체 뭘로 보는 거냐. 해(年)도 지났고, 이제 정말, 진짜, 확실한 30대로 진입했단 말이다.
<하루하루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낀단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고함은 왜 질러요?>
바락 소리를 질러버렸다. 했으면서, 삼일 연속 계속 했으면서. 것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놔주지 않고 했으면서, 내 사정은 봐주지도 않고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그렇게도 했으면서. 갑자기 내일 또 회사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상사에게 구박 받을 생각을 하니 억울하고 또 억울해졌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아니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뭣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씻어요. 너무 오래 물을 적시고 있어, 당신.>
그리고 샤워기를 틀어 수압이 약한 물로 내 몸의 거품을 씻겨 내렸다. 순식간에, 당황하고 화나고 억울한 감정에 어찌할 바 몰라 멈칫하는 동안 그의 손에 의해 거품이 사라져 버렸다. 물이 아니라, 물과 합작한 그의 손에 의해서. 샤워기로 물을 뿌린 것뿐만 아니라 다른 한 손으로 직접 몸을 문지르는 것이었다.
<읏…하, 하지 말아요!>
<흥분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일단 나가서 얘기해요.>
<그러니까… 으흣… 만지지…….>
거품을 씻겨준다는 건 핑계일 뿐이었다. 물을 뿌리며, 손으로 마저 씻겨주며 여기저기 문지르고 쓰다듬는 손길은 명백히 특정한 의도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그의 손끝이 가슴을 문지르며 유두를 자극했다. 그것이, 꼿꼿해졌다.
<만지지 말란 말이야!>
<자, 잠깐…>
<으악!!>
순식간이었다. 그의 손을 물리치며 버둥거리다가 미끄러운 바닥에 발을 헛디뎌버렸다. 결국 콰당탕- 소리와 함께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힘이 재빨리 머리를 감싸줘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엉덩이가 뜨끈뜨끈했다. 게다가, 너무 놀라서인지 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러나 입을 헤 벌린 채 멍청한 표정으로 욕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힘도 놀랐는지 한동안 구부정한 자세로 굳은 채로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눈을 깜박이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더니 눈앞으로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멀쩡해요? 이거 보여요?>
<…응…>
웅얼거리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에게 달랑 안긴 채 밖으로 나와 침대 위에 눕혀졌다. 그에게 안겨 있는 동안, 얼굴과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 심장이 세차게 그리고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의 놀란 심장이 내 심장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듯했다.
아힘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평소 그답지 않게 수선을 떨기는 했지만, 내가 구구단 7단을 외워 보이며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자 긴 한숨과 함께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진통소염제를 권했지만 나는 찜질을 원했다. 결국 아힘은 두말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내가 설명한 데로, 그로서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찜질팩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나 보여주기를 꺼려했던 알몸으로 그러나 다행히 엎드린 채로 엉덩이를 그에게 맡겨야 했다.
<아뜨, 아뜨, 아, 아, 아으으으…….>
<아파요? 뜨겁죠? 뗄까요?>
<아니,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시원해, 그냥 놔둬요.>
<…시원하다고요? ……안 되겠어, 병원 가요. 당신 확실히 좀 안 좋은 것 같아.>
<아니에요, 아힘. 그러니까 그건… 아픈 곳이 풀린다는 말이에요.>
나는 그에게 ‘시원하다’의 말뜻을 설명했지만,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머리를 다친 게 아니냐며 의심을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구구단 8단을 외워야 했다.
<미안해요, 놀려서.>
후끈후끈한 엉덩이에 따뜻한 기운이 돌자 그 와중에도 솔솔 졸음이 쏟아졌다. 고개를 반대로 돌린 채 눈을 감는데, 그가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긴 속눈썹을 드리우며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그런 모습을 보자, 앞뒤 가리지 않고 모두 용서해주고 싶었다.
<뭘 말이에요?>
<……. 당신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본에 있을 땐,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당신을 못 믿는 건 아니야. 그런데 그냥… 그냥 그래요. 한 달에 한번, 당신을 만날 때마다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어요. 내가 당신을 놀리고 괴롭힌다고 여겨도, 할 말 없어요.>
<이상해. 당신도 그런 불안을 느껴요? 당신도 안절부절 못할 때가 있어? 당신도 ‘그냥’이라는 말을 사용해요?>
비식 웃음이 나왔다. 손을 들어 그의 속눈썹을 쓰다듬었다. 아힘이 눈을 깜박였다. 예쁘다. 상관 않고 계속 눈가를 어루만지자 그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괴롭히고 싶어. 손끝으로 마음껏 그의 얼굴을 더듬으며 코를 누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조금 당겨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약간씩 찡그리기만 할 뿐, 그만하라고 말하거나 내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얼굴을 돌리지도 않았다.
마음대로 가지고 놀던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문득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과 손톱의 큐티클이 거칠거칠했다. 힘쓰는 일은 하지 않는다니, 거짓말. 운동을 해서 생기는 근육과 육체적인 노동을 해서 생기는 근육은 다르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나를 안을 때마다, 그 단단하고 고단한 근육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큐티클을 앞니로 물어뜯는데 그가 문득 손을 빼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식은 찜질팩을 다시 데워왔다. 엉덩이에 다시 뜨끈뜨끈한 찜질팩이 올려졌다. 그 손길이 너무 조심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또 ‘아아아’ 소리 내며 엄살을 피우자 아힘은 빙긋 웃으며 새로 배운 한국 문화어법을 사용했다.
<시원해요?>
<뜨거워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자 아힘은 또 불량스레 한쪽 입꼬리만을 올린 채 내 볼을 꼬집었다. 역시, 절대 연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게 틀림없다. 뭐, 어쩌면 그게 더 좋을 지도 모르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들겨 ‘여기 누워요’ 명령했다. 그러자 아힘은 얌전한, 그러나 인상을 풀지 않는 셰퍼드처럼 어슬렁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앉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엎드린 자세로 나란히 누웠다. 이마를 맞댄 채 얼굴을 마주하자 그의 숨결이 입술에 와 닿았다.
<아힘, 나도 미안해요.>
<내 머리카락 잡아당겨서?>
<아니, 당신 마음을 잡아당겨서. 당신이 그렇게 불안했던 건 내 책임도 있어요. 내가 아직 당신과 함께 있는 걸 어색해 하니까, 그게 무의식적으로 당신한테 가 닿았을 거야.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난 지난 1년 동안, 지났다고 생각했던 사춘기를 다시 겪고 있어. 당신만 보면, 당신과 닿을 때마다 떨려요. 그리고 저기… 너무 애쓰지 말아요. 다음부턴 나도, 자주는 안 되겠지만, 석 달에 한 번 정도는 내가 일본으로 갈게요. 오래 머물진 못…>
“민하.”
그가 입술을 살짝 눌렀다 떼며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한국사람들도 대충 ‘미나’라고 발음해 버리고 마는 것을, 그는 기어코 ‘민.하’라고 정확하게 발음을 하려한다. 그는 알까? 그가 그렇게 힘들여 내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할 때마다 정신이 어찔해진다는 것을. 나는 이번에도 눈앞이 빙글 도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이번엔 그가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에 비하면 턱없이 짧고 빈약한 속눈썹이 그의 손끝에 의해 간질간질했다. 눈을 깜빡깜빡 거리자 그가 소리도 없이 웃었다.
<당신도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아직 너무 일러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음 호프브로이 분점은 한국에서 내기로 했어요. 일본에서 개장하기 전까지 3년이 넘게 준비했어요. 한번 경험이 있으니 좀 더 단축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최소 2년이에요. 2년이면 우리가 스물두 번을 만나는 동안이에요. ……어때요, 그때까지 참아줄래요?>
이번엔 내가 먼저 얼굴을 내밀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꾹 눌렀다. 그리고 슬쩍 입술이 열리려는 것을 얼른 거두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재빨리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오늘 손만 잡고 자면, 생각해 볼게요.>
<설마, 당신 엉덩이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내가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난 그렇게까지 나쁜 남자는 아니에요.>
뒤통수에 그의 긴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오싹오싹한 기분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뒤에서 질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쪽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잘 자요.”
“Gute Nacht.”
그리고 서로 각자의 언어로 굳나잇 인사를 하고, 정말 손만 잡고 잠들었다.
다음날 회사에서는 역시 꾸벅꾸벅 졸다가 상사에게 해고 협박을 받았다. 당장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에도 나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저 먼저’를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는 아힘을 배웅 나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난 열한 번의 ‘공항에서의 헤어짐’과 마찬가지로 출국장 앞에서 오랫동안 미적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그에게 강제로 키스, 당했다.
<키스해도 됩니까?>
<안 돼요, 여긴 한국…우웁!>
항상 이런 패턴이다. 그리고 그가 들어간 출국장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돌아서선 수상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향해 멍청하게 웃으며 ‘친구에요, 우정의 표시로……’ 혼자 변명하며 재빨리 공항을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다음 달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루츠 부인. 어제 이곳에선 첫눈이 왔습니다. 라우터브루넨도 지금쯤은 온통 설원이겠지요? 알프스 산맥을 아우르는 만년설과 함께 새하얀 세상으로 변한 라우터브루넨을 상상하니 마음까지 다 시려옵니다. 아름다운 풍광이야 말할 것 없겠지만, 추위에 건강은 괜찮으신지 걱정되네요.
루츠 부인, 저는 오늘 열두 번째 이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세 번째 만남을 기다리고 있지요. 그런데 잠들기 직전 문득, 그가 제게 참 많은 것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저를 온화하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또 가끔은 부끄럽게도 만들지만, 그는 또한 저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루츠 부인. 언젠가 제가 소개해 드렸던 한국 영화가 기억나시나요? 그 영화의 주인공이 그런 말을 하지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저는 이렇게 사랑만 하기에도 벅찬 나날에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랑은, 정말 변할까요? 제 경험에 미루어봐선, 대답은 ‘yes’입니다. 잘라내면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랑을 잘라내고 나니, 새 살이 돋던데요?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이지요. 그렇게 사랑은 가끔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루츠 부인, 상처 위에 덧나듯 생겨난 사랑일지라도, 아름답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순진한 아이의 첫사랑이 아닌 이상에야, 우리 모두의 사랑은 조금씩은 아픈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할 때마다 저마다 강해져야만 하지요. 단단한 사람만이 ‘언젠가는 변할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 둘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떠나보낼 때마다 안타까움과 함께 고마움을 느낍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공항에서도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 번도 운 적이 없습니다. 루츠 부인 앞에서 몇 번이나 울었던 저를 기억하고 계신다면, 제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 줄 아시겠지요?
루츠 부인,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와 함께 라우터브루넨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단단해진 두 사람이 함께 융프라우에 오르고 싶어요. 물론, 내려올 때도 함께일 것입니다. 그때, 라우터브루넨에서는 또 한 번 루츠 부인의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요?
언제나 아름다운 풍광 사진을 찍어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묵었던 방의 창문을 통해 찍은 사진을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기쁜 마음으로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추신. 아드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혹 돌아오신다면, 가장 먼저 제게 편지 주세요. 이곳에서 항상 부인의 건강과 아드님의 안위를 기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