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필요하다면, 적과의 동침도… 아니, 적과의 통화도 가능하다.
“정말 엘씨오가 그렇게 말했어?”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괜히 화 돋우지 말고 잘 달래서, 은근슬쩍 말 꺼내봐요. 다짜고짜 같이 데려가 달라고 고집 피우면 안 되고.
“알아, 그 정도는. 그리고 당신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엘씨오는 근본이 제멋대로인 놈이야. 화를 돋우는 건 내가 아니란 말이야.”
-안드레아.
“알았어, 알았다고. 어쨌든 고마워. 그럼 끊어, 안녕. 참, 그 남자, 아힘 슈미츠와는 오래… 아니, 평생 가길 바랄게. 보니까 괜찮은 남자 같더라고.”
-참, 안드레아. 아힘 얼굴을 왜 그렇게…
“정말 끊을게, 안녕!”
엘씨오의 수첩을 뒤져 미나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간간히 미나에게서 안부 전화가 오긴 하지만, 그때마다 엘씨오가 먼저 받거나 내가 ‘안녕’을 미처 말하기도 전에 수화기를 뺏어드는 덕분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러니 몰래 알아낼 수밖에.
어쨌든 성공했다. 생긴 건 못된 고양이처럼 생겨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래도 의리 하난 잘 지키나 보다. 됐다, 엘씨오와 한국에 갈 수 있다. 한국이 아니라 어디라도 상관은 없다. 단 둘이서 여행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예전처럼 사이가 좋아질 거야.
휘파람을 불며 벌써 들뜬 마음에 창고의 캐리어를 꺼내었다. 배낭은 어깨가 아프니까 캐리어가 수월하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그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오며 재채기를 했다. 지긋지긋한 먼지 알레르기. 가만, 한국은 공기가 어떤가? 로마만큼 지저분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알레르기 약을 미리 좀 많이 사 놔야겠다. 또 뭐가 필요하지? 캐리어 위에 앉아 손가락을 하나씩 굽히며 챙겨갈 물건을 생각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또 뭔가 화낼 일이 있는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안드레아, 넌 대체 이 집에서 하는 게 뭐야?”
“뭐라고? 또 무슨 시비야?”
“들어보니, 너 걸핏하면 이런 저런 핑계대고 일을 빼먹는다면서? 부모님들도 힘드신데 네가 알아서 먼저 일하면 안 돼?”
“하지만 난 손기술이 없잖아. 대신 판매는 나도 돕는단 말이야.”
“너 지금 놀고 있잖아!”
제길. 편하게 쉬는 꼴을 못 보지. 툴툴거리며 손을 털고 일어나자 엘씨오가 문득 내가 깔고 앉았던 캐리어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쓴다. 또 뭘!
“어디 가려고?”
“…2주 후에 너 한국 들어가잖아.”
“그래서?”
이게 또 무슨 말인가. 그래서라니. 뻔뻔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설마 미나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이 자식이 미나에겐 약속해 놓고 내겐 발을 빼려는 속셈이 틀림없다. 화나. 캐리어를 뻥 차며 그를 위협했다. 나도 화나면 무섭다.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게 제일 싫다.
“미나가 나도 같이 오랬어!”
“…통화했어?”
“어… 전화 왔었어.”
“근데 왜 나한테 안 돌렸어?”
“그게…… 야! 말 바꾸지 마! 어쨌든 난 너랑 같이 갈 거야! 미나한테도 그렇게 약속했다며, 나 데리고 와야 밥도 사주고, 만나도 준다고 했다며!”
“……. 그건 밥 한 끼 같이 먹는다는 약속이었어. 넌 그런 큰 캐리어 가방 필요 없어. 길어봤자 삼일 정도만 있을 거 아냐?”
로마에서 서울이 무슨 지하철 타고 30분 걸리는 거린가? 비행기 값이 얼마야. 그걸 다 빼려면 최소한, 정말 최소한 석 달은 머물러야 할 것 아닌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작은 집을 빌린다고 했으니까, 그 집에서 단 둘이서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 놀면 정말 좋을 텐데. 오순도순하게 잘 지내보려고 했는데!
“그럼 난 미나가 널 만날 때, 딱 하루 필요한 거야?”
“…넌 여기 일도 있잖아. 오래 비워두면 부모님들이 그만큼 힘들 것 아냐. 다른 사람 생각도 좀 하고 살아.”
“넌 내 생각은 안 해?”
“넌 누가 생각 안 해 줘도 네 스스로 챙기잖아.”
“빌어먹을 개자식.”
욕을 퍼부어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가 버렸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개자식은, 뒤쫓아 나와 주지도 않았다. 혹시 몰라, 조금 한산한 도로에 뛰어들어 버렸는데, 나를 칠 뻔한 운전자에게 욕이나 왕창 얻어먹었다. 제길, 미나가 이 방법이 제일 효과 좋다고 그랬는데. 하긴, 따라 나오지도 않는 인간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랬지.
일도 하지 않고, 욕도 하고, 캐리어도 확확 걷어찼으니 들어가면 반드시 또 혼날 것이었다. 주머니에는 돈도 얼마 없어서 들어간 까페에서 가장 싼 음료를 시켜 몇 시간이나 멍하니 앉아 시간을 때웠다. 삐질삐질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이런 걸로 울면 안드레아가 아니지. 고작 이런 걸로 울면, 자존심 상한다. 까짓, 구박 한 두 번 받아보나. 주먹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함께 앉았던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자리를 뜨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자리에 앉고, 그들도 떠났다. 어느새 창밖으로 거리는 어둑어둑해졌다. 이제 어떻게 하나, 몰래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가버려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꽉 눌러 다시 앉혔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봤더니, 역시나 엘씨오는 아니었다. 낯은 익은데-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기억 못해?”
“누군데?”
“서서 했잖아, 네 방에서, 문고리를 붙잡고. 그런데 갑자기 네가 후다닥 뛰쳐 내려가고, 이상한 남자들 앞에서 다정하게 날 붙잡고 올라가더니, 그걸로 끝. 냉큼 내쫓았지. 아아, 그날 나 좀 상처 받았는데, 이런- 기억도 못하네?”
생각났다. 그러니까… 미나와 엘씨오가 로마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일부러 그를 자극하려고 데리고 온 남자였다. 서서 했다고? 문고리를 붙잡고? 몰라, 기억 안 나. 알게 뭐야, 하룻밤 그냥 놀았던 녀석인데.
고개를 홱 돌리는데 남자가 허락도 없이 옆자리에 앉았다. ‘난 이만’ 손을 흔들며 일어나는데, 다시 잡혔다. 괜히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아서 얌전히 앉았지만, 이 녀석 좀 위험한건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그래도 뭐 큰 일 있겠어, 애송이처럼 보이는데.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가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별 의미도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녀석, 계속 잠자리 얘기로만 몰고 가는 게 아닌가.
“너 말이야,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사람이 있어? 너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거든. 혹시 생각 있으면…”
“없어. 그런 얘기 그만하면 안 돼? 너 변태 같아.”
나름 무시무시한 얼굴로 톡 쏘아주었는데, 남자는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렸다. 내가 만만하게 보이나. 기분이 나빠져서 발로 의자를 툭툭 차는데, 남자가 팔을 꾹 눌러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하고 노려보자 빙긋 웃는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 프란젤리코, 알아? 분위기가 좋아. 칵테일 살게, 갈래?”
오, 프란젤리코. 알지. 잘 알지. 그래, 분위기가 꽤 좋지. 칵테일 맛도 근사하고. 내 취향을 알고 있구나. 기특한 녀석. 오늘 기분도 영 안 좋은데,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도 민망한데, 거기다 공짜 술이라니, 잘 됐다! 재빨리 의자 위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껴입었다.
그런데 이거, 칵테일 마시기 전에 무슨 단합대화라도 하는 걸까?
“친구들이야, 인사해.”
독특하고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을 자랑하는 프란젤리코의 입구로 들어가기 직전, 남자는 내 팔을 끌고 건물을 돌았다. 그리고 어두침침한 뒷골목으로 나를 이끌었다. 한 무더기의 남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나는 계속 프란젤리코의 입구 쪽으로 힐긋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이봐, 좋은 걸 줄까?”
“칵테일?”
“아니, 칵테일보다 더 맛있는 거야.”
“난 그냥 칵테일이 좋은데.”
진심을 담아 말했는데, 녀석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야, 내 고상한 취미를 무시하는 거냐? 됐다는 표시로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빼꼼 내밀어 계속 프란젤리코의 입구를 응시했다. 추운데, 빨리 들어가서 칵테일로 몸속을 좀 데우면 안 될까? ‘먼저 들어가 있을게’ 말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뒷덜미가 잡혔다. 뭐야, 스타일 구기게. 구겨진 재킷을 탁탁 털며 노려보자 녀석이 빙글거리며 웃는다.
“이걸 하고 칵테일을 마시면 더 기분이 좋아져.”
“뭐야, 난 됐다니까.”
녀석이 내미는 걸 쳐다보지도 않고 내쳐버리자, 표정이 굳어졌다. 조금 뜨끔해져 눈알을 굴렸다. 벽을 툭툭 차며, 그러나 여전히 입맛을 다시며 입구를 빼꼼 쳐다보았다. 마침 누군가의 그림자가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좋겠다. 입을 삐죽였다. 왜 얼른 안 들어가는 거야? 홱 노려보자, 아직도 무서운 표정이다.
“성의를 무시하는 거야?”
“아닌데.”
이런 놈하고 괜히 시비가 붙어봤자 끈질기게 달라붙지. 은근슬쩍 꼬리를 빼며 아예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러니까 녀석들에게 등을 돌린 채 꼿꼿하게 서 있자, 뒤에서 또 재킷을 잡아끄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에 힘을 주고 끌려가지 않으려 지탱하는데, 프란젤리코의 입구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쪽 골목을 스쳐 지나갔다. 지나갔다가, 다시 나타났다. 뒤에서 비춘 가로등 때문에 골목 어귀에 선 커다란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내렸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안드레아.”
“…엘씨오?”
저 놈이 여긴 웬일인가 싶어 얼떨떨하게 이름을 부르자, 그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그림자에서 벗어난 그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아, 너 맞구나. 혼이 날 것이 걱정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론 몇 시간 만에 보는데도 반갑기도 해서 가까이 다가갈까, 아니 이쪽으로 더 물러날까 주뼛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녀석이 한 걸음 다가서 내 옆에 와 섰다.
“누구야?”
“네가 알 게 뭐야? 이리 와, 안드레아. 너무 늦어서 어른들이 걱정하시잖아.”
오라면 가야지. 나는 재킷을 붙잡은 남자의 손을 매정하게 쳐내고 그에게 다가갔다.
“벗어.”
“뭐?”
“벗으라고.”
“…하고 싶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기 방으로 억지로 끌고 가선 다짜고짜 벗으란 명령은 그 뜻이 아닌가? 그래놓고 ‘참나!’ 하면서 한심하게 쳐다본다. 그럼 대체 뭐야. 옷은 왜 벗은 거야,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하나씩 옷을 벗었다. 그런데 엘씨오는 그 미적거리는 게 답답했던지 직접 홀랑홀랑 벗기고 나섰다. 왜 이래, 왜 이래, 손을 파닥거리면서도 딱히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인간, 완전히 발가벗고 놓고선 무슨 감상을 하는지 팔부터 시작해서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는 게 아닌가.
“뭐 하는 거야?”
“찾는 거야.”
“그러니까 뭘 찾는 거냐고.”
“주사 자국!”
“…나 오늘 병원 안 갔는데?”
정말 황당한 놈이다. 난데없이 무슨 주사자국? 내가 자기 몰래 병원 가서 영양 주사라도 맞고 온 줄 아는 거 아냐? 내가 그렇게 치사한 놈으로 보였던가. 어쨌든 억울하고 황당해서 정강이를 발로 까 주었다.
“아!”
“내가 그렇게 의리 없게 보이냐?”
“너 대체 언제 정신 차릴 거야?!”
“내가 뭘!”
“그런 데서 그런 놈들이랑 어울려 노는 것 말이다! 너도 이제 어리지 않잖아. 어른스럽게 좀 굴어.”
뭐야, 뭐. 네가 프란젤리코의 칵테일 맛을 아냐? 그런 놈들이라면 나도 사양이지만, 오늘은 심심한데 말상대도 해주고 그래서 같이 놀아준 건데. 별 상관을 다 한다. 그저 내가 일 안하고 빈둥거리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말이잖아. 하여튼, 저 놈은 날 괴롭히는 맛에 사는 게 틀림없다. 내가 미쳤지, 저런 놈을 왜 좋아하는 걸까?
에라, 기분도 더러운데 그냥 빨리 씻고 자버려야겠다, 생각하며 녀석이 흩어놓은 내 옷을 주워드는데 엘씨오가 어깨를 확 낚아챘다. 또 왜! 바락 성질을 내며 노려보자, 얼굴이 붉다. 뭐야, 감긴가. 가까이 다가가 이마를 맞대어 체온을 재는데, 아래에 뭔가가 와 닿는다. 이건 또 뭐야, 고개를 내려보니, 녀석이 황급히 몸을 떼어낸다. 그리고 손으로 자신의 아래를 가린다. ……. 바지 위로 불룩한 게, 가려도 다 보이거든?
웃긴다. 별 알 수도 없는 주사자국 따위를 찾는다고 홀랑 벗겨놓곤, 거기에 흥분한 거냐? 너는 퍽도 어른스럽구나. 픽 웃으며, 그러나 얼른 옷을 집어 들고 뒤로 물러났다. 잡히면 안 된다, 오늘은. 일도 하지 않고, 욕도 했고, 캐리어도 걷어찼고, 거기다 정강이도 걷어찼으니, 오늘은 위험하다. 몸을 사려야지. 주춤 물러서자, 애써 붙잡지 않고 그냥 침대에 털썩 앉아버린다. 포기 한 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손을 내민다.
“이리와.”
“싫어.”
“…안드레아.”
“……. 그럼, 나 한국에 데리고 간다고 약속해. 한국에서 오래 머물 거야. 네가 미나 만날 때 동석하는 건 물론이고, 한가할 때는 나랑 놀아줘야 돼.”
“하…….”
“응?”
“……알았어.”
됐다! 승리의 기쁨에 환호하며 침대 위로 뛰쳐 올라갔다. 그리고, 앉아있는 그를 먼저 넘어뜨려 버렸다. 내가 먼저 그의 옷을 훌훌 벗겨버리자, 엘씨오는 먼지 난다며 인상을 쓴 채 또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엘씨오, 내 생각을 조금은 하는 거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