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다음날 아침은 다행히 날씨가 맑았다. 겹겹으로 껴입고 밖을 나서는데 루츠 부인이 방한복을 입혀주었다. 거의 펭귄이 되다시피 해서 융프라우로 향하는 등산열차를 탔다. 목적지가 같은 열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향해 웃으며 검지를 치켜 세워보였다. 그 손가락에 담긴 조롱의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자고로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옛 말씀을 나는 믿고 있었다.
설원을 지나 점차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급경사의 암반 터널이 이어졌다. 눈부신 설원의 역광에 웃었던 사람들은 10km의 암반 터널을 지나며 목을 움츠린 채 저마다 손을 점퍼의 주머니에 깊이 쑤셔 넣었다. 암, 자다가도 떡이 생기고말고. 나는 낮은 코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해발 3454m, 드디어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설원이 눈이 부셨다. 아름다움이 너무나 크게 다가오면 감동보다는 슬픔이, 그리고 공포가 찾아온다. 소름이 돋았다. 추위는 오히려 햇빛 때문에 열차 안보다 덜했다. 고도차 때문인지 약간 현기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자 열차 안에서 내 펭귄 의상을 비웃었던 사람들이 ‘are u ok?’ 걱정하는 투로 물어왔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I'm ok' 나는 스스로에게 격려했다. 괜찮아.
1층 전망대 안의 매점에는 한국의 컵라면이 판매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아힘에게는, 이 라면을 먹으며 말하려고 했다. 여기 쓰여 있는 문자가 내 나라 한글이고, 우리나라 서민들이 가끔 먹는 인스턴트 음식이 라면이라고, 나는 한국 사람이고, 강민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뜨겁고 매운 컵라면을 호호 불어가며, 그렇게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모두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혼자인 나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들이 오랜만에 맛보는 한국식 라면에 환호하며 후루룩 소리 내며 젓가락질에 바빴다. 그 뜨겁고 알싸한 혀의 감각이 그리웠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빨리 나오느라 아침도 간단하게 먹었는데……. 배를 통통 두드리며 나는 곧바로 플라토 전망대로 나갔다. 최대 규모의 빙하, 알레치 빙하가 눈앞에 펼쳐졌다. 문득, 저 빙하의 한 가운데로 몸을 던지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통째로 꽁꽁 언 몸은, 아프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전망대 안으로 들어가 드디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우체국에서 우표를 사고,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던 두꺼운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첫사랑을 드디어 인정했고, 드디어 고백했고, 드디어 잊었다. 내 손을 떠난 사랑. 한국으로 돌아가선 또 꼼짝없이 D의 전화를 기다리며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두툼한 편지봉투를 우체통 안으로 넣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친구도 별로 없는데……. 이젠 D, 그의 몫이 남았을 뿐이다.
아힘, 바로 이 순간, 당신에게 이야기하려 했어. 20년 동안의 구구절절한 사랑이 이제 떠나간다고, 드디어 떠나보냈다고. 그러면 당신이 잘 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아주 용감하고 담담하게 D의 반응을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
다시 길을 돌아 기차역 왼쪽에 있는 긴 동굴로 향했다. 그리고 중간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표고 3571m의 스핑크스 전망대에 올랐다. 360도로 융프라우 주변의 경치가 펼쳐졌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신음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힘…….”
그리고 한숨처럼 그의 이름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감상이 어때요? 코가 빨개졌네, 많이 추웠어요?>
<방한복 덕분에 몸은 전혀 춥지 않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코가 얼던데요? 저 좀 들어가 쉴게요.>
<아니, 그전에 몸부터 녹여야지. 낮잠 푹 자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먼저 따뜻한 물로 좀 씻어요.>
나는 이번에도 역시 루츠 부인의 말을 착하게 잘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따뜻한 물로 몸을 먼저 녹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워서 몰랐는데 땀을 좀 흘렸는지 속옷이 젖어있었다. 샤워기로 단단해진 어깨 근육을 퉁, 퉁, 두드리자 긴장도 조금 풀리는 듯했다. 깨끗하게 세탁된 속옷과 편안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푹신한 침대로 기어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약간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지역의 특성상 해가 일찍 뜨고 일찍 지는 듯했다. 한결 가뿐해진 몸으로 거실로 나가보니 고소가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주방에선 루츠 부인이 치즈 퐁듀를 준비 중이었다.
<어서 앉아요. 내가 기가 막히게 시간을 계산했지? 지금쯤이면 배고파서 일어날 거라 생각했지.>
‘아아, 루츠 부인…’하며 뭔가 감사의 말을 전하려는데 때맞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테이블을 세팅하며 루츠 부인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알프스 마을에서 진짜 스위스식 전통 퐁듀를 먹었다. 부인은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입을 오물거리며 융프라우에서 느꼈던 아름다움과 그에 따른 슬픔과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자, 부인은 그렇지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건 마치 사랑과도 같은 거예요.>
커피잔을 기울이며 부인이 말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랑……. 아름답고 슬프고, 그래서 소름 돋도록 무서운 것. 나는 그렇네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조금 머뭇거리며, 아힘에게 들려주려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그 저녁, 부인은 내가 말하는 동안 함께 기뻐하기도 했고 또 함께 슬퍼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융프라우의 우체통에 편지를 집어넣은 순간까지 말하고 이야기를 끝맺었을 때, 부인은 가만히 내 곁으로 다가와 그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 했어요. 참 잘 견디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벽난로의 불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녀의 젊은 시절, 나의 유년 시절, 그리고 스위스의 신화와 한국의 신화들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잔뜩 몸을 웅크린 불편한 자세였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그리고 이른 새벽, 나는 그녀와의 약속대로 창고 청소를 했다.
땀에 흠뻑 젖어 집으로 들어오자 루츠 부인은 깨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청소 검사를 해도 좋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부인은 역시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후에는 산책 겸 슈타우바흐 폭포까지 걸어갔다. 폭포 중간지점까지는 인공적으로 구멍을 내고 만들어놓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갈 수도 있었다. 점점 귓가를 크게 두드리는 폭포소리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위에 올라가 내려다본 라우터브루넨은 마치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해 보였다.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루츠 부인의 집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제 정말 이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엔 반드시,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파리로 가야한다고 결심했다. 태아가 산모의 자궁에서 나와 처음 울음을 터뜨리는 건 이처럼, 캄캄한 곳에서 갑자기 밝은 세상을 보게 된 막막함 때문일까.
<저녁은 먹고 갈 거죠?>
집안으로 들어서자 루츠 부인이 라클렛을 준비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식탁에 앉았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자, 그것을 본 루츠 부인이 ‘나쁜 버릇!’하고 테이블을 탕 두드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물었던 손을 내려놓자,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어린애 같긴.>
<저… 여길 떠나기 싫어요.>
<이곳의 평화로움도 좋지만, 파리의 낭만에도 흠뻑 취해봐야죠. 혹시 알아요? 낭만의 도시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날지. 사랑을 겁내지 말아요. 융프라우를 정복했듯 사랑도 정복해야지.>
부인이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작게 웃었고, 부인도 작게 웃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그러나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식사 후 설거지는 내가 팔을 걷어붙였다.
<루츠 부인. 나오지 마세요. 이 집에서 제가 나가고, 루츠 부인은 문을 닫는 걸로 해요.>
내가 배낭 정리를 마무리 짓자 부인은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말렸다. 북적이는 역에서 나를 보내고 다시 멀고 어두운 길을 돌아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일상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잠시 머문 손님을 내보내는 것 정도로만 느끼게 하고 싶었다. 루츠 부인은 처음으로 내가 강하게 밀어붙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급히 안방으로 가더니 손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받아요, 행운을 가져다 줄 거야.>
소의 목에 거는 방울 모양의 작은 종이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깨끗한 수건에 말아 가방 안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나도 그녀에게 뭔가를 주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 없었다. 배낭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뭔가를 주기는커녕 한 가지 더 받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내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리자 루츠 부인은 온화하게 웃으며 ‘뭐가 필요한가?’하고 먼저 말을 터주었다.
<저… 하나 더 받고 싶은 게 있어요. …이곳 주소를 적어주시겠어요? 제가 힘들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혹은 아무런 일이 없을 때에도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오…… 아가.>
루츠 부인이 두 팔을 벌려 나를 껴안았다. ‘아가’라고 불린 것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아주 작은 아이가 된 것 같아 나는 키를 낮추어 그녀의 가슴에 꼭 안기었다. 그렇게, 갓난아이처럼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그러나 내 마지막 여행지로 향해 길을 떠났다. 걸을 때마다, 그녀가 준 작은 종이 배낭 안에서 맑은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탈리아 행 야간열차 못지않게 위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파리 행 야간열차에서는, 그러나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점잖은 노부부와 한 칸을 배정 받아 첫인사와 헤어질 때 눈인사를 나누었을 뿐 내내 아무런 대화가 없어 조금 따분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다니면서 참 바람 잘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단시간에 태풍의 중심에 빠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기분이었다.
귀국 일이 만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파리에서 숙소를 고르는 데에 가장 역점을 둔 점은 교통편이었다. 여유 있게 파리를 둘러볼 수는 없었다. 우선 체크인을 하고 방에 배낭을 던져두기만 하고 곧장 호텔을 나와 몽마르트르로 갔다. 평소 나는 파리에 대한 환상을 에펠탑이 아니라 몽마르트르에 품고 있었다.
호텔을 나서며 거리의 공중전화박스를 보며 문득 파리에 도착해서 전화하겠다는 엘씨오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러나 수화기를 두 번, 들었다가 다시 놓아두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아힘과 헤어졌다고 말할 자신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며 그를 독일로 돌려보냈다고 거짓말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수화기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결국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저분하고 쾌쾌한 냄새가 나는 파리의 지하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베스 역에서 내려 몽마르트르로 올라가는 중 아주 넓은 돌판처럼 색깔이 다른 벽에 무언가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전 세계의 언어로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 앞에 서서 한참을 한국어 세 개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랑해’, ‘나 너 사랑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해, 사랑해요.”
혼자 중얼거리는데 문득 남녀 한 커플이 옆에 와 섰다. 옷차림이 여행객의 것이었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가 문득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칠고 야만적이며 흉폭 하지만, 더없이 사랑스러운 언어,
<혹시 독일인이신가요?>
<네, 어떻게 아셨죠?>
내가 독일어를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반가운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친구…가 독일인이어서요. 저기, 독일어로 적힌 말이 어디에 있는지 좀 알려주시겠어요?>
얼굴을 붉히며 부탁하자 그들은 멋대로 ‘독일 여성과 사귀시는군요!’하고 흥분해 말했다. 그게 아니라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다고 쭈뼛거리며 변명했지만 커플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서로 앞다투어 자신들의 언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가 먼저 ‘찾았다!’하고 외쳤다.
<여기 있네요. ‘이히 리베 디히’라고 읽어요.>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었어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그들은 여전히 쾌활하게 웃으며 ‘행운을 빌어요’하고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으며, 독일인이 모두 아힘 슈미츠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낭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어 그들이 알려준 언어를 적었다.
- Ich liebe Dich. -
“이히 리베 디히. 사랑해요…. 이히 리베……”
그러다 문득,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허기가 졌다. 그래서 근처의 크레페 가게에서 생크림 크레페를 하나 사서 언덕을 올랐다. 입을 우물거리며 ‘이히 리베 디히’를 또 한번 외우다가, 문득, 이게 다 무슨 소용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입맛이 썼다. 결국 크레페를 다 먹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자 파란 하늘빛을 더욱 선명하게 밝혀주는 회백색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보였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이미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팬터마임 공연을 하는 무리도 있었고, 하프를 켜는 연주자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공연을 관람하거나 각자 자신들의 사진기에 그들을 포함하여 성당의 주변 광경을 찍고 있었다. 계단 위의 그렇게 다양한 인종의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문득 로마의 스페인 계단이 떠올랐다. 그때는 비가 왔었고, 아이스크림이 녹았고, 그리고 아힘이 나타났었는데……. 시큰거리는 눈가를 손등으로 아프게 쓱쓱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같은 광경이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미사 중이었다. 경건한 분위기에 젖어 있으면 기분이 더 울적해질 것 같아 곧바로 탑으로 올라갔다. 좁고 긴 나선형의 계단을 돌고 돌아 드디어 꼭대기에 오르자 파리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저 멀리 에펠탑도 보였지만, 멀리서도 한낮의 에펠탑은 그저 고철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는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바람이 찼지만 그렇게 한동안 이름 모를 연인들을 상상하며 ‘이히 리베 디히’를 속으로 외우고 있었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테르트르 광장에서 내가 품은 파리의 환상, 거리의 화가들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다. 여기저기서 손짓을 하며 가격을 흥정하는 그들의 모습이 예술가라기보다는 상업주의에 잔득 젖어있는 것처럼 보여 실망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캔버스를 앞에 두었을 때의 표정은 자못 진지해보여 그 둘 사이의 이질감에 조금 슬프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이 얼굴에 묻어났는지 내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화가가 빠른 손놀림을 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슬픈 일이 있어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아요. 그것까지 그려도 돼요?>
<아니요, 웃고 있는 것처럼 그려주세요.>
그러나 완성된 그림은, 그 속의 나는 정말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지치고 우울하고 외로운 표정이었다. 화가는 그림을 건네주며 ‘당신은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어요’하고 변명했다. 단 1유로도 깎지 못하고 나는 그 우울한 그림을 옆구리에 끼고 언덕을 내려와 다시 아베스 역의 ‘사랑합니다’ 돌판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들어가기 직전, 쓰레기통에 그것을 던져버렸다.
호텔로 돌아와 2시간 정도 잠시 눈을 붙였다. 더 이상 계속 움직였다간 길거리에서 뻗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다시 호텔을 나와 무작정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가로수의 파란색 작은 전등들이 마치 눈이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활기찬 거리를 걷다보니 또 금방 지쳐 작은 까페에 들어가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마셨다.
가게 안에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잠시 후 또 우르르 몰려 나갔다. 가게 점원이 그들을 향해 서비스용 미소를 띠며 ‘곤니치와’하고 말했다. 나가는 사람들에게 곤니치와라니. 나는 코코아 잔을 두 손으로 꼭 맞잡은 채 웃었다. 그리고, 재빨리 계산을 치르고 그들을 따라잡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한국인 관광객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그러나 한국인들과 한국어로 수다를 떨고 싶지 않았다. 조용하고, 새로 합류한 듯 보이는 처음 보는 사람-나-에게 절대 말을 걸지 않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편하게 파리의 밤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훌륭했다.
그들은 바토무슈라는 세느강을 따라 파리의 주요 관광지를 도는 유람선에 올라탔는데, 덕분에 나는 단 하룻밤 만에 진짜 파리를 볼 수 있었다. 어둡지만 화려하고 위험하지만 자유롭고, 열정적이지만 퇴폐적인 파리의 밤. 특히 조명을 밝힌 밤의 에펠탑은 낮에 보았던 고철덩어리가 아니었다. 조용하던 일본인들조차 에펠탑을 지나칠 때에는 ‘와아-’하고 환호했다. 높고 반짝이고 에펠탑을 보자 또 갑자기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건 마치 사랑과도 같은 거예요.’ 루츠 부인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높고 반짝이고,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온전히 가질 수 없는, 그저 눈에 담고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는 그 슬픔과 두려움.
모닝콜을 부탁해 놓았던 터라 늦지 않게 일어날 수 있었다. 밤의 찬 강바람을 맞았더니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것 같았지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간단한 요기를 한 뒤 얼른 호텔을 나서야 했다. 몽생미셸, 전날 밤 잠들기 직전, 마지막 남은 하루를 파리에서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문득 ‘몽생미셸’을 떠올렸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어느 항공사 CF에서 보았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정도로만 인식하던 곳을 왜 갑자기 떠올렸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모닝콜을 부탁하며 몽생미셸까지의 교통편을 알아봐 달라고 말해두었다.
그러나 호텔을 나서며 리셉셔너가 건네는 몽생미셸 관련 책자를 보곤 잠시 고민해야 했다. 왕복으로 넉넉하게 여덟 시간은 필요했다. 거기다 기차를 타고 또 버스를 갈아타고……. 어깨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리의 마지막 하루.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일정. 그러나 책자 중앙에 인쇄된 고독한 섬의 사진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는 지루한 시간 중에서 간간히 멀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어쩐지 시간이 굉장히 빨리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조급증을 일게 했다. 사람이 죽기 전에 생전의 일들이 한순간 필름처럼 지나간다는 말이 있던데, 멀리 보이는 몽생미셸을 보며 버스의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49일 동안의 일들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귀국하기 참 싫은가 보다, 생각하며 쿡쿡 웃는데 어느새 버스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거대한 수도원이 눈앞에 있었다.
하루 중 절반은 퍼석이는 모래 위에 아슬아슬하게, 나머지 절반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다행히 썰물 때라 그 퍼석이는 모래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섬의 입구를 통과해 수도원으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밀물이 되면 몽생미셸의 입구까지 바닷물이 차오를 것이다. 그야말로 진짜 바다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섬’이 되는 것이다. 나는 축축한 모래 위로 뒷발을 질질 끌면서 문득 그 ‘섬’에 갇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욕심도 욕망도 없는 수도사가 되고 싶었다.
육중해 보이는 성문을 통과하자 좁은 골목에 빼곡히 들어찬 상점들 때문에 마치 시장통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쁘고 아기자기한 상점의 간판들이 그것 또한 운치 있게 만들었다. 어딘가에 들어가 식사를 하기엔 별로 입맛이 당기지 않아 샌드위치를 사서 걸어 다니며 조금씩 베어 물었다. 그러나 역시 다 먹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야 했다.
성채로 올라가자 저 멀리 대서양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과 바다를 나누지 못할 만큼 아무런 방해물 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그 서늘한 풍경에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어둡고 엄숙한 사원과 수도원을 둘러보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수백 년에 걸쳐 지어진 건축물처럼 나도 마치 수백 년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스로가 성스럽게 느껴졌고, 위대하게 느껴졌지만, 초라하고 낡고 위태위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몽생미셸 안에서 보낸 시간은 세 시간을 채 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네 시간 가까이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며 파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샹젤리제 거리를 헤매었고, 샤이요 궁에서 맞은편의 화려한 에펠탑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었다. 점퍼의 안쪽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지만, 왠지 지포라이터가 아니면 불이 붙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사랑과도 같은 거예요.’ 여행 중 만났던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한꺼번에 귓가에 속삭였다.
“이히 리베…….”
그리고 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 *
[25]-1
일부러 모닝콜도 부탁하지 않고 늦잠을 잤다. 50일 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겨우 눈을 뜨고 더 이상 미적거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듣는 사람도 없이 혼자 투덜거리며 샤워를 했다. 호텔 안이나 주변에서 간단한 요기를 할까 했지만 바쁘게 이동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해져, 그냥 좀 빨리 공항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배낭을 어깨에 메는데 리셉셔너가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네. 아주… 많은 걸 보고 듣고, 얻은 여행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주 많은 걸 보고 듣고, 그리고 버릴 것은 버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체념하는 법을 배운 여행이었지. 씁쓸하게 웃으며 배낭을 마저 메고 등을 돌렸다. 늘어난 셔츠와 불필요한 짐들을 모두 버렸는데 어쩐지 배낭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샤를 드골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라서면서는 문득, 항공권의 리턴일을 변경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 봤자, 사표까지 쓴 마당에 할 일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오픈티켓으로 예약하지 않고 귀국일을 정했다는 것, 그리고 50일이라는 유예기간을 두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그러나 곧,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50일 간의 여행을 목적으로 한 것은, 귀국 후 일주일 후에 있을 D의 결혼식 날짜를 생각한 것이었으리라. 미련하긴, 강민하. 행여 이때까지 정리가 다 되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했을까. 설마 식장에서 추하게 엉엉 울면서 ‘가지마’를 외쳤을까? 그러나 이제 모두 지난 일이었다.
어쨌든 귀국일을 늦출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진정으로 축하해주며 D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일-물론 D가 자신을 음침하게 짝사랑해왔던 호모 친구를 받아들인다면-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20년 외사랑의 종지부를 찍는 것은 바로 그날이 될 것이다. 나는 덜컹이는 지하철 안에서 벽과 바닥에 그려진 화려한 폭죽처럼 다양한 색감과 번쩍이는 빛의 낙서-또는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공항에 도착하자 출국 시간까지 정확히 세 시간 전이었다. 마침 게이트도 오픈된 것 같기에 얼른 보딩패스를 발급받고 수화물을 부쳤다. 도중에, 배낭에 스티커를 부착하고 가져가려는 직원을 다시 불러 세워, 그 자리에서 배낭을 열고 깊숙이 헤집어 루츠 부인으로부터 받은 종을 꺼내는 추태도 부렸다. 그리고 곧바로 출국장을 들어가 면세점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려고 발길을 옮기는데, 무언가 뒤를 당기는 기분이었다.
“……아, 밥.”
밥, 하고 소리 내어 말하니 그제야 허기가 졌다. 그러고 보니 파리에 있는 동안 제대로 끼니를 채운 적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샌드위치나 크레페로 때우거나 그것도 다 먹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기내식이 있겠지만, 탑승 후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아직 남았으니 무언가 허한 뱃속을 달래야 했다. 루츠 부인의 말대로, 속을 따뜻하게 해야 하니까.
가뿐해진 어깨로 북적이는 공항을 둘러보며 뭔가 입맛을 당기는 메뉴를 생각해 내려 했다. 그러나 마땅히 먹을 만한 곳도 없고 생각나는 먹거리도 없어서 결국 또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골라야 했다. 계산을 치르고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뭐야, 하고 뒤를 돌아보자, 금발의 미녀였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충고해주려는데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아래를 손가락질했다. 그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내리자, 내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머쓱해하며 지갑을 주워들고 고맙다고 말하자 여자는 도도한 파리지앵처럼 고개를 까딱이곤 지나가버렸다.
공항 로비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무는데, 문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안내 방송과 북적이는 사람들의 말소리 때문에 시끌벅적했는데, 갑자기 소리만 off 된 것이다. 침을 꼴깍 삼켜도 보고, 두 손가락으로 양 귀를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스스로 ‘아, 아아아-’ 소리도 내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여전한테 소리만 사라져 버리자, 정말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혼자건 가짜로 혼자건, 하여튼 혼자인 것은 맞는데, 그게 유독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서, 외로웠다.
코를 훌쩍이며 감명 없이 의식적으로 샌드위치를 물고 씹고 삼키고를 반복하다, ‘더럽게 맛없다’는 못된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맛없는 것도 아니고 더럽게 맛없다. 특히 샌드위치 안의 베이컨은 마치 유통기한을 1년은 넘긴 것처럼 구역질나는 맛이었다. 우물거리던 입안의 샌드위치를 벌컥 들이킨 물과 함께 꿀꺽 삼켜버리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그냥 버리기로 했다. 이딴 걸 돈 주고 팔다니. 욕지기가 나왔다. 성큼성큼 걸어가 맞은편에 있는 쓰레기통에 그것을 홱 던져버리고 혼자 씩씩거렸다. 그런데 문득 무언가가 팔꿈치를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사나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저기, 이거 떨어졌어요.>
천사가 아닌가 싶을 만큼 예쁜 꼬마가 수줍게 무언가를 내밀고 있었다. 입을 헤 벌린 채 그것을 받아들었더니, 보딩패스였다. 지갑사이에 끼워놨는데 움직이는 사이 빠져나온 것이었다. 이런 멍청이. 스스로 이마를 때리며 그것을 지갑사이에 다시 끼워놓았다.
<고마워, 큰일 날 뻔 했네. 착하구나, 답례로 뭘 사줄까?>
<괜찮아요. 안녕.>
그 천사 같은 아이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자신의 부모에게 쪼르륵 달려가 버렸다. 그 부모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다시 터덜터덜 걸어가 로비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소리가 on 버튼에 맞추어져 있었다. 왕왕거리며 정신없이 울려 퍼지는 공항의 모든 소음이 정확하게 귓속으로 쏙쏙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조금 우울해졌다.
아이……. 불행하게도 나는 아이를 끔찍하게 좋아한다. 예쁜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온 정성을 다해서 아이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내가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은 온전히 그 아이를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경우엔 과연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할까.
이렇게 복잡한 곳에 있으니 더 울적해 진다, 안 되겠다, 면세점에서 선물이나 골라야겠다, 생각하고 끙-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그런데 자꾸만 황량한 바깥 풍경으로 시선이 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항버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내려놓고 다시 어딘가로 사람들을 태우러 떠나갔다. 잠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파리의 공기를 되새기고 싶었다.
이번엔 지갑을 꼭 움켜쥔 채 발걸음을 옮겼다. 바깥의 공기는 역시, 서늘했다. 파리의 공기라고 해서 와인처럼 알싸한 맛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괜히 혼자 감회에 젖어 콧물을 훌쩍이며 꽤 오랫동안 비구름으로 어두워진 파리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과 함께 머리도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됐다. 이걸로 됐어. D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겠다는 원래의 소원을 이루었으니, 아쉬울 건 없다.
사랑은… 루츠 부인의 말처럼 사랑을 하는 데에 겁을 내지 않게 됐으니,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그녀는 우스갯소리처럼 사랑은 융프라우처럼 정복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우스갯소리’일 뿐임을 알고 있다. 만약 사랑이 정말 정복의 대상이라면, 융프라우가 그렇듯 그 정상에서 추위와 산소 결핍으로 오래 견디지 못하고 언젠가는 내려와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의 내 사랑은 그 정복 기간이 유난히 짧았을 뿐이었다. 사소한 실수가 결국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었다.
점퍼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종을 꺼내어 눈앞에 들어보였다. 손을 흔들어 청명한 종소리를 울리자, 어느새 거세어진 빗소리에도 그 음이 맑게 주위를 밝혔다. 루츠 부인은 그것이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그것이 어쩐지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됐어, 이제 정말 됐다. 하얀 입김을 내보낸 뒤 다시 발을 돌려 공항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무언가가 찬바람을 몰고 뛰다시피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엔 또 뭘 떨어뜨린 건데! 주춤 물러서며 고개를 돌리는데,
<하아… 찾았다.>
<당신, 여기 왜…….>
그가 눈앞에 있었다.
* * *
-야.
-왜.
-…그냥, 심심해서.
-강민하 어린이, 왜 나이 들수록 이렇게 귀여워지실까?
D. 다시 널 불러볼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그냥 심심해서 네 이름을 부르면, 넌 아무렇지 않게 ‘왜’하고 대답해 줄까?
D. 널 잃기 싫어. 널 잃는다면 내 지난 20년이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거야. 널 잃을 순 없어. 하지만…… 넌 다시 날 보려고 할까?
이제 네게 달렸어. 이 고백은 아무 것도 아니야. 고해성사 정도로 생각해도 좋아. 난 지난 20년의 사랑을 안고 갈 거다. 하지만 이제 그것 또한 아무 것도 아니야. 앞으로도 널 사랑하겠지만, 그건 오로지 네가 날 사랑하는 방식만큼 일 거다.
D. 널 속였던 사랑을 용서해줘. 그리고, 지금의 나를 인정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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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하…하아… 따라오지 마!>
<그러니까 서란 말이야!>
달렸다. 전속력으로 달렸다. ‘당신, 여기 왜’에 대한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를 확 밀어뜨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말 냅다 달렸다. 공항 안의 득시글거리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그러나 간간히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며 달리다가 숨이 차올라 잠시 뒤를 돌아보자 그 역시 냅다 달려오고 있었다. 더럭 무섬증이 일어 또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왜 도망가는 거야!>
<쫓아오니까!>
<제길!>
맹세컨대, 체력장에서도 그렇게 온힘을 다해 뛰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를 밀치고 무작정 달리는 것일까. 그가 표현한 대로 ‘왜 도망가는’ 지에 대해서는 달리면서도 스스로 자문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보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저승사자를 본 것 마냥 무섬증이 일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시작으로 바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정답을 알고 있었다.
사랑, 나는 그것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정복해 본 적이 있었던가. 어설픈 외사랑이나 가벼운 원나잇이 아니라, 진짜 사랑. 그를 통해 겨우 그 진짜 사랑의 입구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돌연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나를 매춘부 취급하며, 잔뜩 증오한 채로. 곧바로 그를 찾아 나서지 않은 것은 지금 이렇게 무작정 이유도 모르고 달리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아름답고 슬프고, 그래서 소름 돋도록 무서운 것.
‘그건 마치 사랑과도 같은 거예요.’
처음 겪은 그 거대한 감정에 이러지러 휘둘려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무릎이 꺾인 채 강간하듯 뒤에서 뚫고 들어오는 그를 느끼며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선 이상한 안도감까지 느꼈었다. 아아, 이제 끝났다. 드디어 끝났다. 이제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회귀본능을 달래었다. 사랑은 평화가 아니다. 싸움이고 폭력이고 배반이며 포효하는 한 마리 사자다. 그가 떠난 텅 빈 방에서, 그에게 상처 입은 나는 그러나 얼마나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가.
미처 주머니에 넣지 못하고 아직 손에 꼭 쥐고 있던 종이 정신없이 흔들리며 울려대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아, 뒤에서는 아름다운 그가 나를 쫓아오고 있다. 목을 칼칼하게 감도는 슬픔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전력질주 하고 있는데 멀리 앞에서 공항경찰 두 명이 역시 빠르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살았다, 나 좀 살려줘요! 하고 두 손을 흔드는데, 점점 가까워올수록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아악! 뭐하는 겁니까!>
달리던 속도와 비례해 어마어마한 통증이 양팔로 가해져 왔다. 그 두 명의 경찰이 달려가는 나에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양 팔을 잡고는 꺾어 바닥으로 눕혀버린 것이다. 두 손이 엇갈린 채로 등 뒤로 겹쳐졌다. 나는 엎드린 상태로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위에서 누르는 힘은 더 세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거해 보려 했지만 문득, ‘앞에 가는 사람 도둑놈, 뒤에 가는 사람 경찰’이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저 쫓기고 있으니까 무작정 잡고 본 것인가?
<놔요! 놓으란 말이야! 당신들이 잡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지르는데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게 마치 오르가즘 시에 느끼는 쾌감과 비슷한 느낌이어서,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잡았어요! 누구죠? 소매치기 당했습니까?>
내 팔 다리를 꽉 눌러 잡고 있던 경찰이 위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나는 버둥거리는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맞댄 채 넙죽 엎드려버렸다. 위에서 볼을 맞댄 콘크리트 바닥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매치기 아닙니다. 놔 줘요.>
<네? 소매치기 아닙니까?>
<그 사람, 놔 줘.>
<네? 그럼…>
<…내 연인입니다. 놔 줘요.>
두 경찰이 동시에 ‘뭐라고요?’하고 황당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팔이 느슨해졌다. 공항에서는 장난을 쳐서는 안 됩니다, 공공장소에선 정숙하십시오, 어린아이도 하지 않는 짓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또 한 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진짜 소매치기건 말건 바로 연행할 겁니다,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으며 경찰은 따박따박 발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워진 팔과 다리를 여전히 바닥 위에 늘어놓은 채 엎어져 있었다. 그런데 순간 몸이 들렸다. 그에 의해 엉거주춤하게 바닥에 앉은 나는 그의 손을 내치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도망친 겁니까?>
<그러는 당신은 여기에 왜 왔죠?>
<…….>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자고 잡아끄는 것을 팔을 휘둘러 잡아 빼고, 시끄러운 로비의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여버렸다. 그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한숨을 훅 내쉬더니 그런 내 옆에 얌전히 앉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도 보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세 갈래로 나누어진 것 같았다. 체념을 배운 하나의 심장, 열정과 사랑에 들뜬 두 번째 심장, 그리고 분노와 원망으로 들끓는 세 번째 심장. 다행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심장이 관할하는 것 같았다. 나는 평소 그의 표정처럼 무뚝뚝하고 차가운 얼굴로 콘크리트 바닥의 어느 한 점을 노려보았다.
<부끄럽지도 않아요? 연인이라니. 하긴, 매춘부 취급은 면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아니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왔죠? 강간도 모자라 기어이 한 대 쳐야 속이 풀리겠어요?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은 생각 없어. 컬렉션? 원하는 게 뭐냐고? 뻔하잖아, 유럽 남자 컬렉션과 돈이었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내 얼굴 좀 안 볼래요?>
<당신은 날 보지 않았잖아, 내 이야길 들어주지 않았잖아.>
<민하…….>
<그 이름이 내 본명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미안하지만, 당신한테 내 여권을 보여주지 않을 거야. 당신 말대로 난 모두 다 속였으니까. >
<그만해요, 당신 목소리 떨리고 있어.>
떨리는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균형 잡혀 있던 세 조각의 심장이 마구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 매달려 키스를 하고 싶었다, 그의 따귀를 세게 치고 싶었다,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내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가벼운 믿음으로 차가운 바닥에서 나를 범하고 쓰러진 나를 내버려둔 채 사라져버린 그를 향한 원망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차츰 사그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세 번째 심장을 충동질했다. 일어나, 세차게 뛰어, 그에게 더욱 모멸감을 안겨줘야 해.
두 손으로 귀를 꾹 막았다. 모든 소음이 윙윙 거리는 진공 상태로 멀리서 날아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귀를 막고 있던 두 손 위로 따뜻한 것이 와 닿았다. 그는 내 두 손을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서로의 손을 겹쳐 놓은 것이었다. 그에게서 돌린 등으로 따뜻한 체온이 와 닿았다. 한쪽 볼에 그의 숨결이 와 닿았다. 나는 두 눈까지 질끈 감아버렸다.
<날 좀 봐요.>
이상하다. 모든 소음들이 날아가 버렸는데, 아니면 저 위 허공에서 정체도 없이 둥둥 떠 있는데, 어떻게 그의 목소리만은 두 겹으로 겹쳐진 손을 뚫고서 귓속으로 머릿속으로 그리고 가슴 속으로 화살처럼 뚫고 들어올 수 있을까.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그러하듯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귀에서 두 손을 떼어내고 그런 입술을 괜히 쓱쓱 비벼댔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딱 붙이는데 뒤에서 그가 어깨를 잡아왔다. 그리고, 미끄러운 의자와 두꺼운 면바지는 마찰도 일으키지 않고 너무나 쉽게 내 몸을 돌려버렸다. 낑낑거리며 힘을 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차오르는 눈물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찢어진 눈을 이용해 그의 얼굴을 홱 째려보는데,
<당신… 얼굴이 왜…….>
<날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좋아요. 하지만 오늘은 좀 봐줘요. 이쪽의 상처는 약을 제대로 바르지 않아서 덧나면 흉이 남을 것 같으니까.>
상처투성이였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에는,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 그저 돌아보는 순간 그라는 것을 ‘인식’했을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체향과, 어깨에 닿는 손의 느낌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 아힘 슈미츠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자세히 바라본 그의 얼굴은,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되어버린 걸까. 순간, 손이 움찔거렸지만 곧 힘주어 바로 잡았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싶었다.
<얼굴 왜…….>
<다릴 하나 부러뜨려주러 갔다가, 오히려 할큄을 당하고 나왔어요.>
<무슨 말이에요? 똑바로 말해요.>
<엘씨오 말입니다.>
<설마… 엘씨오랑 싸웠어요?!>
나도 모르게 버럭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멀리서 아까 그 두 명의 경찰이 요주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는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그들과 시선이 마주쳐 얌전히 다시 앉아야 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시뻘건 멍이 광대뼈 위에 들었고, 눈가가 찢어졌고, 입술이 터진 아힘은 그런 주제에 입을 꾹 다문 채 웃고 있었다. 당신, 당신, 당신. 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설마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당신을 그 방에 놔두고, 그냥 독일로 돌아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했잖아요, 난 이제 두 번 다시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당신, 다신 날 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처음엔. 하지만 독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데, 문득 분하더라고요. 이대로 헤어지면 당신이 엘씨오에게 다시 가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그를 찾아가 다리 하나라도 부러뜨려… 아니, 아예 평생을 못 쓰도록 잘라버릴 생각이었지.>
<당신은 나쁜 남자야.>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
<당신은 내 얘길 듣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믿음도 없었으니까 그랬겠지.>
<……미안해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계속 뭔가 석연치 않은 핑계를 대니까… 미안해요.>
어울리지 않게 불쌍한 척 하며 그가 덥썩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야멸차게 그 손을 털어버렸다. 그래서 엘씨오를 찾아가 치고받고 싸우고, 그래도 이야기는 들었단 말이지. 내 말은 듣지 않으면서, 믿지 않으면서, 싸우러 간 상대의 말은 들었단 말이지. 믿었단 말이지. 그래서 그런 얼굴로 불쌍한 척 하며 다시 용서를 빌러 왔단 말이지.
다시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가슴 속에서 뭔가 몽글몽글하게 끓어올랐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분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그런데도 그의 상처 난 얼굴이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혀로 정성스럽게 핥아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믿어줘요. 이탈리아로 가는 야간열차 안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면서, 결국 당신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엘씨오를 해하려 간 건 사실이지만, 또 한 번 다른 남자에게 내 사람을 빼앗길 순 없었어. 당신이 미나모토든 뭐든,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내가 몇 번째 남자라도, 설령 내게 뭔가를 원해서 접근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난…… 강민하에요. 한국인이고, 당신한테 원한 건…… 마음뿐이었어.>
아힘은 다시 슬그머니 내 손을 부여잡았다. 이번에는 나도 얌전히 손을 내어주었다. 아아, 요망한 마음 같으니. 나는 계속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앞니로 꽉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 손을 내 입술에 가져다대어 그것을 말렸다. 그러나 그것까진 허락할 수 없었다. 고개를 홱 돌려버리자 그는 한숨을 훅 내쉬었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에요. 하루아침에 분노가 질투로 바뀌고, 원망이 그리움으로 바뀌는 건 내가 아니에요.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 그리고 이제 난… 당신이 뭐든 상관없어. 나한테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어, 당신이 외계인이라도 괜찮아.>
<……난 지구인이에요.>
퉁명스레 대답해놓고도, 지금 이런 말 할 때냐, 싶었다. 아힘은 내가 완전히 화가 풀린 줄 알았는지 피식 웃었다. 나는 이번에야 말로 찢어진 눈으로 그를 확 노려봐 주었다. 그는 피식 웃다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한번만 봐 줘요. 앞으론 당신 말은 무조건 믿을게요.>
<…내 말보다 엘씨오 말을 더 믿을 것 아닌가요?>
<그에게선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얼굴을 보자마자 치고받고 싸웠으니까. 당신에 대해 들은 건 그… 안드레아라는 사람이 이야기해줬어요. ……당신이 둘 사이를 응원해줬다면서요?>
<둘이… 분위기 괜찮았어요? 당신은 그거 이해 돼요? 충격 안 받았어요?>
어느새 그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린 나는 얼굴을 쏙 내밀었다. 그의 입술이 둥근 호를 그렸다. 순간, 걸려들었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몸을 틀진 않았다. 세 번째 심장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는 열정과 사랑으로 채워졌다. 체념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불쌍한 척을 하든 말든, 일부러 보이려고 얼굴의 상처도 치료하지 않고 훈장처럼 달고 온 것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든 말든, 다시없을 달콤한 말로 토라진 아이 사탕 하나 쥐어주듯 달래는 말투와 행동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투덕거리는 게 사귀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해서 알았어요. 충격은… 26년을 이성애자로 살아온 남자가 동성에게 온 정신과 마음과 몸이 모두 홀려버렸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을까요?>
<그렇게 승자처럼 웃지 말아요. 난 당신 용서한 게 아니야.>
<승자처럼 웃지 않았어요, 맹세코. 봐요, 이렇게 힘없이 당신의 용서만 바라고 있잖아요.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는 정말 무릎을 꿇으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다가와 섰다. 한쪽 다리를 구부리는 그를, 나는 얼른 일어나 말렸다. 안 돼. 그는 내가 올라야 할 산이었다. 최대한 높아서 등정이 오래 걸리고, 아름다운 볼거리가 많아 오랫동안 마음을 빼앗겨 산새와 어울려 놀아야 할, 내 산이었다.
주저앉지 못하도록 말리면서 바짝 붙어 서자, 아힘은 그 틈에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신경질을 부리듯 그의 팔을 때리고 꼬집고 몸을 뒤척였지만, 그는 팔을 풀지 않았다. 결국 나도 얌전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체념은,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이었다. 간간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힘 슈미츠도 하는 것 강민하가 못할 리 없었다.
주저하듯 그의 품에 안긴 채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상처가 아픈 듯 움찔거리기도 했지만 나는 상관 않고 반듯한 이마와 시원스레 뻗은 콧날과 날렵하고 단단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그의 푸른 눈빛을 바라보는데, 그의 볼에 가늘게 그어진 여러 줄의 붉은 상처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설마,
<그거, 엘씨오가 할퀴었어요?>
<그와 치고 박고 싸우는 도중에, 안드레아가 끼어들어서 이렇게 만들었어요.>
아힘이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조용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며 분노를 삭였다.
안드레아 이 자식을.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예정대로 오늘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자 아힘은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하며 시간을 끌었다. 일본에서 개업할 호프브로이의 직원으로 스카웃 제의까지 받았다. 황당했지만, 어쨌든 그가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안 돼요, 아힘. 나한텐 한국에서의 일이 있어요. 물론 사표를 내긴 했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건 한국 안에서 해야 할 일이에요. 그건 내 일이에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니면… 나와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아힘……. 내 인생을 누군가에게 포함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난 꽤 우유부단한 인간이지만, 그런 식은 아니에요.>
<그럼, 장거리 연애를 하자구요?>
<그 방법밖에 없다면 할 수 없죠. 아힘, 날 못 믿어요? 아니면, 당신 자신을 못 믿어요?>
출국장 앞까지 걸어가면서 그는 내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음이 상한 걸까. 내심 걱정이 되어서 힐긋거리며 눈치를 살폈지만,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뿐 화가 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이상하게도, 이젠 그의 무표정에서도 단순히 생각 중인지 화가 난 건지를 구분할 수 있었다.
탑승권을 손에 쥔 채 바스락거리고 있자, 문득 아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손에서 탑승권을 빼내어 쥐어들었다. 한참을 뚫어져라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기에, 혹시 찢어버리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다행히 얌전히 다시 건네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긴 손가락이 볼을 다 덮고 눈가까지 와 닿아 눈을 깜빡거리자 얼굴을 바짝 붙였다.
<키스하고 싶은데요.>
<그렇게 상처 난 입술은 안 받아줘요.>
장난스레 되받아쳤는데 아힘은 진지한 얼굴을 풀지 않고 내 눈과 입술을 번갈아 보다가, 엄지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 느낌이 왠지 사랑스럽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해서 피식 웃었는데, 그래도 그는 웃지도 않고 빤히 내 입술을 쳐다보았다.
<키스해도 됩니까?>
<에? 정말요? 하지만 여기 사람들 많… 으읍!>
그리고 허락도 없이 입술이 와 닿았다. 급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아힘은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가락으로 힘을 줘 입을 열게 했다. 그리고 뜨겁고 축축한 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입술을 거칠게 빨고 도망가는 혀를 당겨 감았다. 입천장을 두드릴 때에는 주위의 시선을 잊고 잔뜩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나를 혼내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을 때에는 억지로 몸을 빼내려다가 오히려 더 깊이 묶이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호응하고 있었다. 상처가 터진 듯 비릿한 피맛이 났다. 나는 소원했던 대로 그것을 내 혀로 샅샅이 핥아 주었다. 순간, 정말 그를 따라 일본으로 가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미련하다지만, 사랑에 모든 것을 걸 만큼 나는 순수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 키스가 더 애절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아예 내 쪽에서 더 바짝 다가가 매달리자 그도 온 몸을 꼭 감싸 안아주었다. 그렇게,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우리는 오래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아지들처럼 혀로 입술을 꼼꼼히 핥으며, 그러나 여전히 입맛을 다시며 겨우 서로를 떼어낼 수 있었다.
<도쿄에서 서울까지 몇 시간이나 걸리죠?>
<아마… 두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 한 달.>
<네? 뭘 말이에요?>
<아마 처음 석 달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진 아예 꼼짝도 못할 거예요. 차차 일이 잘 돌아가면, 모든 휴무를 한 달에 한번, 당신한테 가는 날로 돌릴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 얌전하게 기다려요.>
그리고 그가 다시 한 번 나를 꽉 껴안았다. 나는 멍하니 안겼다. 팔을 둘러 그를 안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고맙고, 미안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코를 훌쩍였다. 아힘은 내가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흘리는 줄 알았는지 얼른 몸을 떼어내고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내가 빙긋 웃자, 이번에는 그도 빙긋 따라 웃었다.
<이제 들어가요. 더 지체하면 정말 놔주기 싫을 것 같아.>
그가 어깨를 밀었다. 나는 얼떨떨해서 그가 미는 대로 죽죽 밀려 출국장 앞까지 가 버렸다. 그리고 뭐라고 할 시간도 없이 사람들에게 밀려 직원에게 탑승권을 건네주었다. 직원은 한 면을 찢고 나머지를 다시 건네주었다. 이제 곧장 걸어 들어가 출국 심사와 보안 검색을 받고 탑승게이트를 찾고, 내 나라로 돌아갈 항공기를 타면 된다. 떠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어야 했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아힘이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또 한 번 빙긋 웃어주었다. 나는 얼른 그에게 뛰어갔다. 게이트 선을 가운데 두고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자꾸만 입만 달싹거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침을 꼴깍 삼키고, 드디어 목소리를 목청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저기… 저… 아힘, 이히 리… 이히 베…….>
<네?>
<그러니까… 이리 베리……>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뭐더라, 그러니까… 이히 리베 이디?>
<…….>
잘 기억나지 않는 그 문장을, 그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쩔쩔대며 겨우, 그러나 부정확하게 말해버리자, 그는 역시 못 알아드는 듯 조용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아닌가싶어 다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입을 달싹이는데, 그가 허리를 숙여 촉-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그리고 근사하게 웃었다.
<아… 그거, 네, 그거요…….>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만 맞잡을 손을 꽉 쥐어주고, 다시 손을 놓았다. ‘갈게요’하고 속삭이자 ‘기다려요’하고 그가 속삭였다. 나는 끝까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출국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산은 정복할 대상이 아니다. 어느 산악인이 말했듯, 다만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를 뿐이다. 사랑 또한 정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거기 있으니 나는 그에게 다가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내게로 온다고 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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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곤·안 외전)
-오, 안드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