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로우, 곤니치와, 안녕-23화 (23/29)

[23]

호스텔 안으로 들어가 버릴 줄 알았던 아힘은 그러나 현관을 돌아 건물 뒤쪽의 자전거 전용 주차장이 있는 어두운 정원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건물의 모퉁이를 돌자 아힘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담배를 빼 무는 것이 보였다. 피렌체의 호스텔에서 잠든 엘씨오를 방안에 남겨두고 그의 방에 무작정 쳐들어가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달라고, 그리고 로마에서 만나자고 일방적으로 약속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같은 담배, 그리고 지포라이터였다.

<당신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하지만 그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예요. 속이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가 문 담배 끝이 빨갛게 점화되어 그가 볼을 빨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급속히 타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불붙은 담배 끝으로 심장을 지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힘은 아무런 표정 없이 담배를 몇 번 더 빨았다가 싸늘한 눈빛으로 텅 빈 정원을 쏘아보았다.

<계속 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럴 때마다 상황이……. 아니, 내일 모두 말하려고 했어요. 융프라우 정상에 있는 우체국에서, 그러니까, 편지를 쓰고 있거든요, 매일 밤. 그래서 그 편지를 보내면서 당신한테 모든 걸 말하려고 했어요. 아힘, 아힘. 제발 날 좀 봐요.>

나는 주춤주춤 걸어가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의 팔을 흔들며 애원했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팔백 미터 계주를 혼자 달리고 있는 것처럼 숨이 찼다. 아힘은 여전히 어둠을 응시하며 담배를 빨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담배 끝만이 빨갛게 작은 불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내뿜어지는 담배연기가 눈을 맵게 했다.

<지금, 지금 말할게요. 별 것 아니에요, 지금 모두 말할 수 있어요, 아힘. 그러니까…>

<본명이 뭐지?>

그가 문득 말을 잘랐다. 그리고 여전히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이름을 물었다. 본명, 본명, 본명이 뭐더라.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것 같았다. 심장이 뛰고, 자꾸만 숨이 차고, 딸꾹질은 멈추지 않고, 다급하기만 했다.

<미, 민하에요. 성은 강이구요. 강민하라고 해요. 그런데 발음하기 어려워서 엘씨오에게는 그냥 ‘미나’라고 부르라고 해서…>

<국적은?>

<하, 한국이요. 정확하게 말자하면 남한…>

<직업은 뭐였지? 그리고 진짜 나이는?>

<나이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게 맞아요. 직업은… 작은 회사에서, 직원이 열 명도 안 되는 작은 무역회사에서 재무 관리를 맡았었어요. 하지만 여행을 오면서 사표를 내…>

<어차피 그것도 다 거짓말이겠지.>

<아…아니야! 여권을 보여줄 수도 있어요!>

픽, 웃으며 아힘은 담뱃불을 껐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얼굴로, 아힘은 금방 꺼진 담뱃불보다 더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의 손끝 하나로 나는 얼굴이 들렸다. 코끝으로 바라본 아힘은 이를 악물고 있는 듯, 턱 근육이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대단한 솜씨였어. 깜빡 속았지 뭐야.>

<모두 말하려고…>

<그런 이야길 들었어. 동양인들이 여행이나 유학을 와선 현지 유럽인들을 몇 명이나 사귀다가 귀국할 때엔 온갖 핑계를 만들어 떼어놓는다고. 그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선 그걸 자랑거리로 삼는다더군. 하! 20년 외사랑? 웃기군. 스무 명을 농락한 게 아니라? 어때, 이번 여행에선 몇 명의 컬렉션이 생겼지? 나, 엘씨오, 그리고 호텔에서 봤던 그 남자까지. 유감이군. 겨우 세 명. 아니,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이 정도니까 혹시 더 있을 지도 모르겠어. 어쩐지, 계속 뭔가를 숨겼지.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렇게나 암컷 냄새를 풍기면서 꼬리를 흔들었었는데. 그런 주제에 순정파인 척, 잘도 연기했어.>

<아, 아니야. 아힘, 내 얘길 들어요…>

<그 작은 입을 찢어놓기 전에 그만 닥쳐.>

그리고 아힘은 한 손으로 갑자기 내 얼굴을 덮었다. 양 볼을 손가락으로 힘주어 쥐고,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가 뒤로 확 꺾였다. 이빨 사이로 입술이 찢기는 것이 느껴졌다. 시큼한 피 맛이 혀끝에 와 닿았다.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아힘은 나머지 손으로 간단하게 그것을 저지했다.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낯설었다. 이제껏 그가 화를 내고 퉁명스럽게 구는 것은 많이 봐 왔지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무서워. 나는 꽉 틀어 잡힌 얼굴이 아프다는 것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더 와 닿았다. 그래서 아픈 줄도 모르고 자꾸만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몇 번 뒤척이는 것을 봐주는 듯싶더니 갑자기 어깨를 움켜쥔 채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쿵, 하고 소리가 났지만, 머리와 등과 엉덩이뼈가 부딪쳐 아팠지만, 입이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에 재빨리 무슨 말이라도 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내 몸을 뒤집게 했다. 아힘은 내 머리카락을 휘감은 채 바닥에 얼굴을 묻게 했다. 입안으로 추운 땅의 잡풀과 씁쓸한 맛의 흙이 들어왔다.

<아…아힘… 놔 줘요, 놔…>

<입 닥치라고 했어.>

그리고 허리가 달랑 들렸다. 악,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편하게 입고 있었던 트레이닝복과 팬티가 함께 그의 손에 끌려 내려갔다. 고개를 돌려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아힘은 다시 내 뒤통수를 움켜잡고 바닥에 처박았다. 허리가 꽉 잡혀 움직임도 쉽지 않았다. 팔로 상체를 받친 채 허우적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차가운 공기에 드러난 맨살이 오스스 떨려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자신의 아래를 가까이 가져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이런 꼴을 들키기 싫으면 이 악물어.>

<아…아아아아아악!>

단숨에, 찔러 들어왔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충격이 심했다. 경직된 상태에서 뒤에서 곧바로 꿰뚫리자 하반신과 상반신이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처음의 비명 이후에는 그의 말대로 자연스레 이를 악물게 되었다. 들키기 싫은 게 아니라, 너무 고통스러워 차마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목 안에서 욱, 욱, 하고 무언가 올라왔다. 그러나 아힘은 거칠게 내 머리를 붙잡은 채 자꾸만 푹푹 꺾이는 무릎을 억지로 세워가며 허리를 움직였다.

<으…흐으…흣!>

<시끄러워, 울지도 마. 익숙할 거 아냐?>

경직된 몸 때문에 끝까지 삽입이 되지 않는지 아힘은 내 허리를 좀 더 띄운 채 난폭하게 끌어당겼다. 깊이 들어오고 빠르게 나가면서, 무언가 아찔한 격통이 아래에서 올라왔다. 내부가 찢어진 것이었다. 비릿한 것이 엉덩이 사이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피스톤질은 좀 더 쉬워졌는지 아힘은 더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다. 몸이 죽죽 밀리면서 무릎이 까였다. 그 와중에도 얼굴에 흉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이마와 광대뼈 위가 따끔한 것이, 이미 조금 찢긴 모양이었다.

<흣…으으…아힘, 제발…… 아니야, 아니야…….>

울음과 고통과 거칠게 움직이는 그에 의해 변명도 쉽지 않았다. 몸이 덜커덕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뺨에 와 닿는 잡풀이 축축한 것이 내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밤이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손톱 사이로 흙이 파고들었다. 윽윽 소리를 내며 나는 어서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살끼리 맞닿았다가 떨어지고 또 맞닿고 하는 소리가 철벅거리며 멀리서 들려왔다. 그리고 정신이 까무룩해지기 직전, 그가 몸 안 깊숙이 자신을 밀어 넣은 채 사정을 했다. 엉덩이 아래로 뜨뜨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렸다. 한숨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또, 새로운 게 시작되는 줄 알았지. 그게 다 거짓말이라니. 그것도 모르고 난 멍청하게 당신과의 미래까지 계획했지 뭐야. 정신없이 흔들어 놓고 뭘 얻으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됐어.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테니까.>

<아…아힘…>

그리고 아힘은 바지를 추스르며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문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땅바닥에 추하게 엎어진 채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을 돌아가 버렸다.

얼마나 그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대로는 얼어 죽겠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겨우 방으로 올라왔다. 땅에 긁혀 형편없어진 얼굴과 손등, 그리고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보며 호스텔의 야간 경비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이죠? 다쳤습니까? 강도를 만났어요?>

<아니… 괜찮아요. 그냥 조금…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어요. 멍청하게… 넘어졌어요….>

그리고 정말 멍청하게 웃어보이자 남자는 내가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지 머뭇거리면서도 물러섰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시민답게 얼른 붕대와 반창고, 그리고 상처에 쓰는 연고 등을 가져다주었다. 경찰을 불러야 하냐는 물음에 나는 또 한 번 멍청하게 웃어버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힘도, 그의 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내려가 관리인에게 혹 방금 호스텔을 나갔거나 방을 바꾼 사람이 있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도저히 다시 계단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삐죽삐죽 흘러내렸다. 더러운 손등으로 역시 더러운 얼굴을 닦았다. 그래도 뜨거운 눈물은 금방금방 차올랐다.

<아힘…….>

그리고 쓰러지듯 침대에 풀썩 기대어 잠들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것은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청소부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어요? 경찰을 불러줄까요?>

<아니에요. 어젯밤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우선 좀 씻고 정리한 뒤 나갈 테니까, 한 시간이면 될 거에요.>

<한 시간. 알았어요.>

청소부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끄응, 힘든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밤새도록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찬 기운이 가득한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던 것이 감기를 더 돋우었는지 이마가 지끈지끈하고 코가 맹맹했다.

기듯 걸으며 겨우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무릎이 엉망이었다. 뜨거운 물을 틀어 머리부터 적시자 물이 닿은 무릎이 다시 한 번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정액을 미처 빼내지 않아 뱃속이 부글거렸다. 변기와 샤워기 아래를 왔다갔다 거리며, 또 눈물이 질끔질끔 나왔다. 속을 완전히 비운 후에야 오랫동안 따뜻한 물 아래서 몸을 좀 녹일 수 있었다.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라구요.’

바로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괜찮아요?>

<네…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어요.>

<저런.>

운이 좋게도 시간이 맞아떨어져 인터라켄까지는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천장까지 크게 난 창문으로 시원스레 펼쳐진 스위스의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넋을 빼놓고 창가에 찰싹 달라붙어 물감을 뿌려놓은 듯 선명한 푸른빛의 호수와 저 멀리 만년설에 뒤덮인 알프스 산맥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는 눈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건너편에 앉은 노부인이었다. 노부인은 흉이 진 내 얼굴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나는 괜찮다고 씨익 웃어보였다.

<이곳에서 내리지 않겠어요?>

아직 좀 더 남은 것 같은데 문득 노부인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열차에 맞춰 역 간판을 확인하니 인터라켄 역이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멍청해 보이지 않도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전 인터라켄에서 내려요.>

<그리 급한 게 아니라면 1시간 정도 여유를 좀 부려요. 여기서 내리면 유람선을 타고 인터라켄까지 갈 수 있어요. 스위스까지 왔으면 브리엔쯔 호수를 꼭 봐야하지.>

그녀가 말하는 브리엔쯔 호수보다도, 나는 그녀의 온화한 미소에 끌려 배낭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부인은 잘 생각했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부인의 뒤를 따라 열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우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보이는 유람선 선착장과 배경이 되는 호수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햇볕이 좋은지, 호수에서 비치는 역광에 눈이 부셨다.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앞서 걷던 노부인이 내 탄성을 들었는지 웃으며 다가왔다.

<내리길 잘했죠?>

<네, 고맙습니다. 이걸 놓치면 정말 안타까울 뻔 했어요.>

잠시 후 새하얀 유람선이 도착했다. 나는 노부인을 에스코트하며 유람선에 올랐다. 자리에 나란히 앉자 경치를 감상하라며 고갯짓을 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손주처럼 나는 그녀의 눈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이리저리 눈을 움직였다.

호수 주변의 낮은 산과 그 위에 걸린 구름이 거울처럼 호수 위에 그대로 비쳤다. 물이 너무 맑아 섬뜩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 선연한 색상에 이가 시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 맑은 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곳이 갑자기 아픈가요?>

노부인이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돌려보자 온화하게 웃으며 작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한 장 건네주었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이미 또 한 방울의 눈물이 턱 끝으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건네준 손수건을 받아들고 얼굴을 닦았다. 가슴이 떨렸다.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었다.

<많이 다쳤어요? 하긴, 얼굴을 보니 심하게 넘어졌구먼.>

<네, 아주 쌩쌩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높이 날아 떨어졌어요.>

<자전거를 처음 타 본 건가요?>

<아니요. 여러 번 타 본 적 있는데… 이번엔 가장 기본적인 걸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방심하는 사이, 쿠당탕!>

<그렇지. 아무리 잘 하는 거라도 잠시만 방심하면 넘어져버리지. 그래서 언제나 긴장을 늦추면 안 돼요. 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 넘어져보면, 다음번엔 좀 더 수월해. 균형을 잡는 것도, 그리고 설혹 넘어졌다 하더라도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것도.>

노부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무숲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작은 폭포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마치 꿈결 같아 다시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창가에 이마를 기댄 채 잠깐 눈을 감았다. 산새 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가까이에선 각국의 언어가 작게 소근거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인터라켄 동역에 도착해 있었다.

<상처 치료는 제대로 한 거예요?>

유람선에서 내리며 노부인이 좀 더 바짝 다가와 얼굴의 상처를 살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상처 난 데 바르는 연고만 발랐어요.>

<그럼 안 돼. 소독부터 확실히 하고, 깊은 상처엔 연고는 물론 반창고까지 붙여야지. 보기에 좀 흉해보이겠지만 나중에 평생 흉으로 남을 수도 있어요.>

<네에……>

다정한 걱정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런 따뜻한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촌 형에게 아웃팅 당하고, 친척들은 물론 부모님과 형제들까지 나를 병자 취급했다. 몸에 나쁜 바이러스가 있거나,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인정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가장 예민한 시절 겪었던 상처 때문에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이 가장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융프라우요흐에 오를 건가요?>

멍하니 딴생각에 잠겨있는데 노부인이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나는 최대한 유순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금방 잊겠지만,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럼 오늘은 안 되겠어. 너무 늦은데다, 날씨도 별로 좋지 않아요. ……라우터브루넨으로 가지 않겠어요? 인터라켄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라고 내 장담하지.>

<라우터브루넨이요?>

<여기서 등산열차를 타고 30분 정도만 가면 돼요. 그곳에서 하루만 쉬면 그 정도 상처는 말끔해질 거야.>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앞장서 걸었다.

라우터브루넨은 빙하에 의해 파여진 U자 계곡의 하부에 위치한 작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인터라켄 역에서 내려 잠시 둘러봤을 때, 관광명소인 만큼 그나마 고가 상품점 등이 즐비해 있었던 것과 다르게 라우터브루넨은 오로지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평야와 그 위에 드문드문 위치한 동화 같은 집과 산맥이 어우러져 있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배낭이 조금 무거웠지만, 그 평화로움에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이런 곳이라면, 그래 이런 곳에서라면 상처 따위 말끔히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폭포의 마을이에요. 작고 예쁜, 그리고 또 크고 웅장한 폭포가 여럿 있지.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울려 퍼지는 샘’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작고 예쁜 폭포를 지나면서 노부인은 설명했다. 계곡에 둘러싸인 지형이어서 그런지 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덕분에 정신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걷자 역시 작고 예쁜 통나무집이 보였다. 노부인은 ‘저기야’하고 손짓했다.

문을 열고, 노부인의 안내로 한 발자국 발을 내딛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어깨를 움찔거리자 그녀는 장난스레 웃으며 ‘무너지진 않아요’하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내가 머물 방을 안내해주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쓰던 방처럼 이불이며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노부인은 혼자 살고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여행자들의 숙소로 종종 쓰이는 방인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며 방을 나서는 노부인을 붙잡았다.

<저, 숙박비는 먼저 내도록 하겠습니다.>

<응? 숙박비라니. 그런 건 받지 않아요. 정 그러면 창고 청소를 좀 해 줘. 거긴 나도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계속 방치해두고 있거든.>

그리고 그녀는 두꺼운 점퍼를 벗으라며 손짓을 하곤 문을 닫았다. 배낭을 바닥에 놓아두고, 점퍼를 벗었다. 빗장을 풀고 창문을 열자 만년설에 폭 쌓인 알프스 산이 저 멀리 보였다. 눈이 부셨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름다움에 심취해 눈물이 나왔다.

<상처를 치료하라고 데려왔더니 또 울었구먼.>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자 노부인이 내 얼굴을 보곤 쯧쯧 혀를 찼다. 나는 또 머쓱하게 웃으며 코를 훌쩍였다.

<아니에요. 이번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멋대로 눈물이 흘렀어요.>

<그런 눈물이라면 마음껏 흘려요. 그런 눈물이야말로 상처를 치유해주지. 손을 씻고 와요. 스프를 끓이고 있어.>

<아니, 괜찮아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데……>

<속이 따뜻해야 돼. 겉을 아무리 든든히 입고 따뜻한 불볕을 쬐고 있다 하더라도, 속이 든든해야 돼.>

무섭게 훈계하는 투에 나는 또 슬핏 웃음이 나왔다. 이런 것이 좋았다. 이런 것이 그리웠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리광 부리는 투로 ‘빨리 주세요’하고 칭얼거렸다. 노부인은 유쾌하게 웃었다.

<이런 곳에 살면 모두 부인처럼 넉넉해지나요? 스위스 사람들이 여행객들에게 친절한 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이 경우는 너무 황송한데요? 정말 창고 청소만으로도 다 갚아질까요?>

<…청년만한 아들이 있어요.>

등을 보인 채 스프를 저으며 노부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 손자가 아니라?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저 방은 아드님 방이군요?>

다 되었는지 노부인은 스프 접시에 가득 스프를 담아 식탁에 내려놓았다. 미리 깔려 있는 냅킨을 펼쳐들고 나는 스푼을 들었다. 고소한 옥수수 스프였다. 접시 위로 고개를 들이밀자 따끈한 김이 얼굴로 확 끼쳤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부인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나는 얼른 스프를 떴다.

<그 아드님은 어디 다른 곳에 계신가 봐요.>

<응, 그랬으면 좋겠어. 어디 다른 곳에서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어. 저런, 스프가 떨어져. 얼른 들어요. 괜찮으니까 계속 먹어요.>

<집을… 나갔나요? 안타깝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버리고 가다니.>

<아니. 우린 원래 취리히에서 살았어요. 그리고… 모르겠어. 뭐가 문제였는지. 남편과 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이한테는 잘 전해지지 않았나봐. 크게 다투고 집을 나갔지. 이곳엔 남편이 죽고 난 후 혼자 온 거에요. 아들은 생태학자가 되고자 했었어. 보다시피 이곳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니까… 언젠가 지나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애써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스프를 입 안으로 떠 넣기만 했다. 그녀의 눈을 보면 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부모들은 그런 걸까. 그리고 자식들은 또 그런 걸까. 전해지지 않아서… 그게 문제인 걸까.

<그만한 나이의 청년들을 보면 아들이 떠올라. 혹 당신처럼 상처를 입진 않았을까. 추운 곳에서 떨고 있진 않을까. 배가 고프진 않을까. ……. 언제 귀국하죠?>

<며칠 남지 않았어요.>

<그럼 그 전에 꼭 상처를 낫도록 해요. 귀국해서 부모님들이 보면 속상해 하실 거야.>

나는 뜨거운 스프를 입 안에 우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부인은 얼굴보다 더 엉망인 내 손등을 보곤 ‘이런!’하고 소리를 질렀다. 끼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쿵,쿵, 하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급하게 났다. 그 사이 나는 얼른 눈을 꾹 눌러 맺혔던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곧 부인이 약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 먹었어요? 그럼 얼른 씻어요. 얼굴이랑 손등만이라도. 아니, 혹시 다른 곳도 다쳤어요? 무릎이나 팔꿈치. 물에 너무 오래 닿게 하진 말고, 더러운 것만 씻어낼 정도로, 알았죠?>

노부인의 손에 등을 떠밀려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말대로 더러운 것을 씻어낼 정도로만 물을 축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부인의 손에 달랑 잡혀 방으로 들어가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였다. 바지를 억지로 허벅지까지 걷어 무릎에도 똑같이 소독제와 연고를 바른 후 분대를 감았다. 부인은 그제야 개운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짝, 짝, 쳤다.

그날 밤, 나는 D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와 함께 부모님에게도 짤막한 편지를 썼다.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하다고. 좋은 곳을 둘러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고. 옷은 아주 두꺼운 점퍼를 가지고 와서 오히려 더울 지경이라고, 잠도 아주 잘 자고 있다고. 전날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는 바람에 조금 다쳤지만, 크게 흉이 남지는 않을 정도의 상처라고. 그리고,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당신들이 나를 용서하듯 나도 당신들을 용서한다고. 무엇보다도, 사랑한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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