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커튼 사이로 정오의 햇살이 강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불을 돌돌 말아 다리 사이에 끼운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힘은 옆자리에도 룸 어디에도 없었다.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쓰다듬어보자 아직 미적지근하게 그의 체온이 남아있었다.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앉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쉴 틈 없이 연속으로 해댄 탓도 있지만, 하면서 계속 울었기 때문이었다. 둘 다 취해있었기 때문에, 서로 숨길 것 없이 마음껏 욕망을 발산했던 것 같다. 전날 밤을 생각하자 뒤늦게 부끄러웠다. 뭉쳐진 이불 위에 고개를 확 숙였는데, 악 소리가 났다. 허리가 당겨지며 허벅지부터 꼬리뼈와 척추까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저릿하게 아팠다.
“이게 뭐야….”
샤워를 하다가 문득 몸 아래를 내려다 봤더니, 가관이었다. 온 몸이 울긋불긋한 데다 종아리와 허벅지 안쪽, 그리고 팔목은 선명하게 손자국의 멍이 들어있었다. 강한 자극에 못 이겨 몇 번 몸을 빼고 도망가려다 매번 그의 강한 손에 붙잡혀 다시 이끌리고 말았는데, 그때 생긴 멍인 것 같았다. 설마 진짜 도망가려 했을까. 작작 좀 하지. 머리 위로 세찬 물줄기를 맞으면서도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샤워했어요?>
샤워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마침 아힘도 방문을 닫고 들어서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는 어제 맡긴 세탁물이 들려 있었다. 숫처녀도 아니고 새색시는 더더욱 아닌데 어쩐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것이 창피해 얼른 세탁물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우물쭈물 말하고 다시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입었다. 알맹이까지 모두 보였는데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게, 조금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내숭도 떨 줄 알다니, 강민하, 서른의 새로운 발견이야. 단추를 하나 하나 채우며 또 웃음이 비식비식 비어져 나왔다.
깔끔하게 옷을 갖춰 입고 나오자 아힘이 침대 한쪽에 앉아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종종 걸음으로 가 앉았지만, 역시 얼굴을 마주볼 자신은 없었다. 죄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폭 수그리고 있었더니 아힘 역시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내가 정말 나쁜 짓 한 것 같잖아요. 어제는… 미안했어요.>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숙였던 고개를 다시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미안했다니. 그렇다면, 역시 그건-
<실수였다고 말하는 거예요?>
<아닌데요.>
<그럼, 술기운에 충동적으로 그랬던 거예요?>
<그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전… 당연히 아니죠.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죠?>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여유작작하게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짐을 정리했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침묵을 깨뜨리는 건 오로지 내가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소리뿐이었다. 그가 걷는 소리, 배낭을 열고 닫는 소리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아힘이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다고 느꼈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빛나는 그의 금발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확실시되는 것 같았다. 눈이 부신 것 같아 손등으로 이마 밑을 가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힘은 옷을 정리하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실수도 조금 있었고 술기운에 충동적이었던 것도 어느 정도는 맞아요. 하지만 내가 미안한건… 그런 식으로 당신을 몰아붙인 것 때문이에요. 그렇게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게, 미안해요.>
그리고 옷을 마저 배낭에 집어넣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것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입을 톡톡 두드리고는 ‘no'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얼른 입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아힘이 고개를 돌린 채 피식 웃었다. 아아, 이쪽을 보고 웃어주지.
<하지만, 후회는 안 해요. 결국 그런 식으로 확인하고 말았지만, 어쨌든 당신한테 계속 관심이 갔던 건 사실이니까. 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당신이 괜찮다고 한다면 이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하아- 하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적지에서 빠져나온 군사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살았다’하고 중얼거렸다. 코가 찡했다. 그리고 코를 한번 훌쩍였다. 그러자 아힘이 다시 뒤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감기 걸렸어요?>
<아니, 괜찮……>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입이 딱 다물어졌다. 아힘은 큰 손바닥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그게 시원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열이 조금 있긴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또 한 번 코를 훌쩍였다.
<많이 헤매고 다녔어요?>
다정스레 물어오는 말투에 이번에는 정말, 다른 의미로 코가 찡해졌다.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매일 밤늦도록 헤매고 다녔어요.>
앞에 서 있던 아힘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졌다. 아직 축축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다시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자 이번에는 눈가를 쓰다듬었다. 속눈썹을 건드리는 손끝에 눈을 가늘게 뜨고 깜박이자 그의 입가가 조금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팔을 내 무릎 위에 기댄 채 아힘은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말해 봐요.>
<뭘요?>
<난 이럴 계획이 전혀 없었어요. 이번 여행은… 그저 혼자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정리할 생각이었죠. 누군가를 또 만나고 이렇게 또 마음이 뒤엉키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죠. 당신은 무슨 계획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짜고짜 나한테 대쉬하고 따라다니고 찾아다녔겠죠. 난 이제 당신한테 넘어갔어요.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이 먹이에게 어떤 선고를 내릴 거죠? 일본까지 데리고 갈 건가요? 아니면, 독일에 내버려 둘 건가요? 또는…….>
아힘은 빙긋 웃으면서도 뭔가 속에 뼈가 있는 말을 차분하게 풀어냈다. 어깨가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저 그에게 어떤 대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하다고,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욕심이었다. 이기주의적인 욕심이었다. 그에게서 새로운 사랑을 구하고자 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설마, 아무런 생각도 없이 여기까지 온 건 아니죠? 그렇게 온몸으로 날 꼬셨으면 차후 대책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설마가 맞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무릎 위에 얹어져 있던 그의 팔이 풀려났다. 무릎이 서늘해졌다. 감기에 걸린 게 맞는지, 절로 코를 훌쩍였다.
<계획이 없다면…… 원하는 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거라도 말해 봐요.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원래대로라면 당신은 일본으로 돌아갈 테고, 난 독일로 돌아갈 테죠. 설마 원거리 연애를 생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요. 난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 건 믿지 않으니까.>
그가 등을 돌린 채 빠르게 말했다. 창가 너머로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그의 등 너머를 힐끗거렸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등을 돌려 나는 또다시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저기… 원거리 연애가 그리 믿지 못할 것만은 아닐 거예요. 서로서로 육 개월에 한번 정도 휴가를 내서 독일과 … 내 나라에 왕복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힘, 저 실은… 난 일본인이 아->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군요. 고개 들고 날 좀 볼래요? 이것 봐요, 난 지금 두 손을 들었어요. 항복이라구요. 당신 같은 사람 처음이라서,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건 처음이라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요. 그러니까 똑바로 대답해요.>
<네에…….>
또다시 큰 보폭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바짝 앞에 와 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잔뜩 화난 얼굴을 보곤 또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러자 그가 내 턱을 손끝 하나로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눈을 옆으로 돌리면 다시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마지막 기회니까, 확실하게 대답해요. 날 가지고 시험한 겁니까? 이성애자를 한번 꼬셔보고 싶었고, 대답을 듣고 나면 그저 끝이라고 생각했던 겁니까?>
<아, 아니에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끔찍한 소리였다. 두 손을 흔들며 강하게 부정하게 그가 다시 아프게 턱을 쥐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깝게 맞대었다. 얼굴에 와 닿는 그의 입김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내 계획을 들어봐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아프게 고정시킨 내 턱을 억지로 움직여 끄덕이게 했다. 턱끝이 얼얼해지는 기분에 조금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는 모른 척 했다.
<난 일본으로 갈 겁니다. 곤니치와. 내가 아는 일본어는 이 한마디뿐이죠. 그리고 이건 5년 전에 호프브로이에서 일했던 일본인 유학생이 가르쳐 준 말이에요. 그 일본인은 2년 전부터 일본에서 독일의 호프브로이 기술을 그대로 이용한 분점을 준비 중이에요. 우리 가게 직원 중 누군가 직접 일본으로 가서 함께 경영하기로 했죠. 미나모토, 나는 내 아버지, 그러니까 호프브로이의 사장에게 내가 일본으로 가겠다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일본어는 당신한테 배울 거예요. 내 계획에 반대할 의사 있습니까?>
그리고 그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시 내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가로젓게 움직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놀라웠고 기뻤지만, 이제 어떻게 진실을 말해야할지 까마득해졌기 때문이었다. 내 호흡이 가팔라진 것을 알았는지 아힘은 다시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시선을 낮춰주었다. 조금은 자상해진 행동에 잡힌 턱을 빼려고 했지만 그는 그것까지는 풀어주지 않았다.
<육 개월에 한번 씩 만나는 사이라니, 난 이미 그런 관계가 어떻게 끝나는지 경험했어요. 그것도 아주 최근이었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요. ……. 미나모토. 난 아주 나쁜 남자는 아니지만 아주 좋은 남자도 아니에요.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변하겠죠. 한번 해봐요. 날 움직여 보라구요. 하지만 한 가지, 대신 당신은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야 해요.>
그의 짙은 눈빛에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입술을 물었지만, 그의 손끝이 입술 사이로 밀치고 들어와 잘근댈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손끝을 살짝 물어주었다. 그는 곧 마른 수건과 드라이어기를 가지고 와서 내 머리를 말려주었다. 따뜻한 바람에 물기가 바삭바삭하게 말라갔다. 행복했고, 두려웠다.
아힘은 스위스까지 여행한 후 다시 독일로 돌아가 일본행 준비를 할 것이라고 했다. 나 역시 스위스가 루트로 잡혀있었던 터라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의 로마 체류기간이 생각보다 너무 길어져서-그 역시 나를 찾고 있었으므로- 하루 빨리 스위스로 출발해야 했다. 나는 하루만 더 로마에서 쉬자고 했지만, 그는 ‘무조건 오늘’을 주장했다. 할 수 없이 호텔 입구에서 그가 체크아웃을 하고 나오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아힘, 오늘 스위스 행 티켓이 있을까요?>
<지금이라면 오늘 저녁 야간기차는 자리가 있을 겁니다. 당신은 먼저 호텔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해요. 그동안 난 먼저 역에서 예약을 하고 있을 게요. 떼르넬시 호텔이라고 했죠? 예약한 후에 바로 갈게요.>
<괜찮아요. 그냥 역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만나서 함께 움직여요.>
<지금 피하고 겁니까? 미나모토, 혹시 나 몰래 다른 남자를 호텔에 숨겨두고 있는 건 아니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레 웃으며 하는 말에 나도 역시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그 다른 남자는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보아하니 당신만으로도 충분히 벅찰 것 같으니, 얼른 가서 뻥 차버려야겠어요.>
<잘 생각했어요.>
아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순간, 그가 나보다 어리다는 생각에 머리를 치워버렸다. 손을 멈칫한 아힘은 피식 웃고는 집요하게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곁눈질로 엄하게 노려보았더니 ‘머릿결이 좋네요’하고 말을 돌렸다. 택시가 잡힐 때까지 머리를 얌전히 대주고 있어야 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머리만 쓰다듬고 있는 아힘을 곁에 두고, 나는 잠시 엘씨오를 생각했다. 작별인사는 하고 가야하는데. 시간이 될까. 아힘과 함께 그의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엔 불편할 테니까. 그렇다면, 전화밖에 없었다. 어차피 엘씨오가 나머지 학기를 위해 한국으로 오면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우선은 전화로 알려야겠다.
<무슨 생각해요?>
여전히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문득 아힘이 물었다. 나는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다른 남자 생각이요.>
택시에서 먼저 내려 호텔로 들어갔다. 열쇠를 되찾고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인기척을 냈다. 뒤돌아보니,
<뭐야, 이제 들어오는 거야?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얼굴 가득 불만을 표하는 안드레아였다.
<여긴 어떻게…….>
<엘시오를 닦달했어.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으니까.>
닦달해서 알아낸 주제에 비밀이 없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시하고 그냥 갈길 가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할 말이 있다는 얘기였다. 별로 얼굴 마주하고 싶지 않은 타입인데. 후, 한숨을 내쉬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또 무언가 쏘아붙일 것 같아 얼른 방으로 올라가자고 끌었다. 뭔가 구시렁거리는 것 같았지만 순순히 따라오긴 했다.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요. 지금 바로 체크아웃하고 나가야 해요. 바쁘니까 짐 챙기는 동안 말해요. 괜히 상대해주지 않는다고 화내지 말고.>
<지금 로마를 떠나는 거야? 엘씨오는 그런 말 없던데, 그럼 그는 몰라?>
마음대로 침대에 앉더니 내 말을 듣고는 펄쩍 뛰어 일어서며 기쁜 듯 외쳤다. 사라져준다니 그렇게 좋은가. 조금 배알이 뒤틀렸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갈까 했->
<보지 마! 만나지 마!>
<…뭐라구요? 이봐요, 그것까지 당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저 인사만 하고->
<만나지 마.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더 이상 엘씨오와 만나지 마. 그 얘길 하러 온 거야.>
안드레아는 가픈 숨을 내쉬듯 재빨리 말하곤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의 긴 니트 끝이 그의 손에 의해 구겨져 있었다. 나는 배낭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의자에 앉았다. 안드레아도 다시 침대 끝에 앉아 발개진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런 말, 안 해도 되잖아요. 엘씨오는 다시 당신한테 돌아갔는데 대체 뭐가 불안한 거죠?>
<그는, 엘씨오는… 당신을 좋아해.>
꽤 거리가 있는데도 그의 눈썹 끝에 눈물이 방울져 맺힌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참 예쁜 눈이다. 성질만 죽이면 엘씨오의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수긍할 텐데. 엘씨오는 얼굴을 먼저 보는 타입인 걸까? 하긴, 사람들은 모두 첫인상을 보고 한눈에 반하거나 그저 스쳐지나가거나 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안드레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뚝, 하고 그의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붙였다 하는데 스스로 티슈를 뽑아들고 눈가를 꾹꾹 눌렀다.
<보면 알아. 이때까지 다른 남자들을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그냥 지나가는 정도였어. 당신은 달라. 엘씨오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끔찍하잖아. 당신 깜빡 속았지? 그거 다 내숭이야. 엘씨오 성격은 절대 그렇게 다정다감하지 않아. 오히려 아주 괴팍하고 멋없어. 당신한테만 그러는 거야, 당신한테만….>
흑, 하는 소리와 함께 또 눈물이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안드레아는 이번에는 아예 손등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눈가가 발개졌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대체 내가 왜 이런 이야길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이런 꼴이라니. 남편의 정을 못 받은 본처가 애첩에게 찾아와 ‘그를 떠나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은 90년대 이후에는 드라마에서도 본 적이 없다. 한숨이 절로 푹푹 나왔다
<안드레아. 엘씨오가 나한테 진심이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지난 얘기잖아요. 우린, 가능하다면 그저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당신 말대로 억지로 만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어색하게 서로를 인식하는 방법이에요. 그가 한국에서 나머지 학기를 모두 채우고 다시 로마로 돌아오면,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르면 나와 엘씨오는 전화통화도 잘 하지 않는 사이가 될 수도 있어요. 아니, 아마 그렇게 될 거에요. 하지만 벌써 그렇게 애써 외면하는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아요.>
속옷과 티셔츠를 뭉쳐 배낭 깊숙이 넣으며 천천히 말했다. 안드레아가 시간과 사람과 관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코를 훌쩍이며 한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를 흘낏 쳐다보자 우는 얼굴을 보여주긴 싫은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게 안절부절 할 것 없어요.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아주 끈끈하게 묶여있는 것 같으니까.>
<그게 문제야. 엘씨오는 바로 그걸 혐오한단 말이야.>
이상한 대답에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안드레아는 또 울음이 터져 나오는지 이를 악문 채로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첫 번째 트라우마를 가장 먼저 알아챈 건 그의 부모가 아니라 바로 나야. 나이가 같은 사촌끼리 얼마나 많은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지 알아? 같이 놀다가 지쳐 함께 잠드는 건 또 얼마나 많았겠어. ……그를 원망하진 않아. 게이가 된 게 그의 탓만은 아니야. 하지만 그에게 꼼짝 못하는 건, 그건 엘씨오 때문에 생긴 병이야. 그는 두 번째 트라우마가 나 때문에 생겼다고 하지만, 나는 훨씬 이전부터 그 첫 번째 트라우마를 혼자 알고 혼자 겪고 혼자 감당했어. 내가 왜 학교 측에 그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고발했는지, 그는 아무 것도 몰라. 알려고 하지도 않아. 그저 나를 원망하기만 하지.>
<잠깐. 나도 이해가 되질 않아요. 그의 트라우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왜 굳이 학교에 고발한 거죠? 그것만 아니었다면, 엘씨오는 첫 번째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훨씬 쉽게 치료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거야… 그 꼴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일 거라 생각하니 끔찍해졌어. 혹시 내가 없을 때 다른 룸메이트를 안으면 어쩌나 하고…….>
쯧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안드레아가 또 표독스런 눈으로 쏘아보았다.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맺혀서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단순한 질투 때문이었다는 건데, 그렇다면 좀 더 우회적이고 현명한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쯧쯧, 혀를 차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고작 10대 초반의 아이가 초조와 불안에 휩싸여 어떻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먼저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그런 식의 열에 들뜬 초조와 불안은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질투라면……
<처음부터 그를 좋아했어요? 당신이 먼저?>
안드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는 얼른 눈물을 닦았지만, 소용없었다. 앙다문 입가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 자존심에 행여나 그걸 허락하겠다 싶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럼 말하면 되잖아요. 지금처럼 차분하게 얘길 하면->
<그가 몽유증상을 보이면 나는 자연스레 그의 침실로 향해. 그리고 그는 또 자연스레 나를 안아. 이건 누구 한 명의 트라우마가 아니야.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병이야. 본능 같은 거지. 섹스 후에 엘씨오가 나를 보는 눈빛은 마치 더럽고 끔찍한 걸 보는 것 같아. 그러면서도 다음에, 그 다음에, 또, 또, 반복돼. 이런 거, 나도 싫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속사포처럼 말하고는 안드레아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엉망이 된 얼굴을 씻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나와선 다시 침대에 힘없이 털썩 앉았다.
<부탁이야. 그를 만나지 마. 그는 흔들릴 거야. 그리고 날 더… 혐오할 거야.>
<어떻게 할 거죠? 내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럼 당신은 이제 엘씨오와 어떻게 할 건가요? 문제는 내가 아니에요.>
<…우린, 어쩔 수 없어. 아슬아슬하게 이런 관계를 계속 이어가겠지.>
어리석긴. 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고 미련하고 반쯤은 미쳐있는 걸까. 언젠가 사랑이 빛을 바래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좀 더 현명해지고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고, 제정신이 돌아올 때 즈음이면 사랑이 다르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사랑이 변하면 현명해지고 선명해지고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일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기이한 특권과도 같다. 그 슬프고 깊고 어두운 터널을 눈뜬 봉사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저벅저벅 걸어갈 수밖에 없는 마음이라니. 나는 문득, 사랑이 지긋지긋해졌다. 그러다 또 문득, 시계를 보며 ‘아힘은 예약을 했을까, 어디 앉을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어쩔 수 없다’의 정체다.
안드레아는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성질 고약한 고집불통을 저렇게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뭘까. 문득, 침대 위에 하나로 뒤엉켜 있던 그와 엘씨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내가 왜 그들을 하나의 ‘본능’으로 인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처럼 그들은 병에 걸린 거다. 엘씨오의 트라우마가 안드레아의 트라우마를 만들어냈고, 그리고 또 그것이 엘씨오의 두 번째 트라우마를 만들어냈다. 누구 한 명의 트라우마를 치료한다고 해도 쉽사리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은 평생 그렇게 하나로 뒤엉킨 채 괴로워하며, 그러나 어쩔 수 없어하며 지낼 것이다.
<미련하긴.>
한숨을 쉬며 말하자 안드레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그의 조금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안드레아는 어깨를 조금 흠칫거렸지만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런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 부탁 들어줄 거야?>
<아니.>
대답하자마자, 그가 불쑥 일어나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 * *
-지희야, 넌 민하한테 요리 강습 좀 받아야겠다.
-그렇게 별로야? 민하씨, 정말 맛없어요?
-아니요, 맛있어요. 저 놈이 괜히 그러는 거예요.
-강민하, 친구 애인 앞이라고 그렇게 내숭 떨 필요 없어. 네가 언제부터 맘에도 없는 말을 했다고. 서지희, 넌 주말마다 어딜 돌아다니지 말고 민하한테 강습료 주고 교육 좀 받아. 하긴, 교육 받아도 안 되려나. 우리 민하 요리솜씨는 손맛이 포인트거든.
-안 되겠어요. 민하씨, 정말 나한테 요리 전수 좀 해 줄래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정말 맛있어요.
D, 네가 후회할 것 세 번째. 넌 평생 주말마다 나오는 손맛이 일품인 코스요리를 놓쳤어. 그런 말이 있지. 평생의 반려자는 미모가 1년 몸매가 2년 성격이 3년, 그리고 요리 솜씨가 평생을 간다고.
미안하지만, 지희씨는 참한 여자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네가 말한 것처럼 요리의 포인트는 손맛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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