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8)

#5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래처럼 흩어져 바람을 타고 사막 한 가운데로 이동되면 좋을 텐데. 아무도 없는 사막에 누워 말라죽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몰랐다.

“먹어라.”

아버지가 물 컵과 약 몇 알을 내밀었다. 이주율이 정신병원에 갇히고 나서 나도 마냥 무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신병원에 가지 않는 대신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 했다. 정신과의는 나와의 지속적인 상담 끝에 내 병명을 망상형 환시 장애로 판명 내렸다. 정신과의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은 전적이 있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아들이 헛것을 자주 본다며 나의 대변인이 된 아버지가 내 상태를 설명했다. 정신과의는 나와 상담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말을 더 신뢰했다.  

어떤 헛것을 보냐는 정신과의의 물음에 무성의한 태도로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답했더니, 반사회적 성향이 도드라진다는 병명이 나왔다. 그래서 문자가 보인다 사실대로 말했더니 망상형 환시 장애 판명이 났다. 마녀사냥이었다. 발목에 쇠고랑을 묶어 물에 빠뜨린 다음 그대로 가라앉으면 사람, 떠오르면 마녀인 비합리적인 재판제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버지가 내민 약을 물과 함께 넘겨 먹었다. 그는 내가 먹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늘 입을 벌리게끔 했다. 

약을 먹고 나면 지나칠 정도의 구토증세가 찾아왔다. 진정성 항정신병 약물은 식욕저하와 구토, 어지러움 증을 유발하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충분히 정상이었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독한 약이었다. 약간의 흔들림에도 멀미가 시작된 건 그 약을 복용하고 나서부터였다. 약을 끊은 뒤로도 여전히 부작용은 뒤따랐다. 정신병이라는 병명아래 군면제 특혜를 받을 수 있게 됐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점에 대해 감사하거나 기뻐한 적이 없었다. 

당신은 나를 평범한 자식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걸까? 내가 보는 문자가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용없는 약을 먹인 이유는 뭘까. 죽은 당신은 내게 온갖 물음만을 던져놓고 떠났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이제 당신을 떠나보낼 준비가 됐다. 과거에 묶여 신음하는 시간은 이미 지났어야했다. 환영 속에서 나를 때리던 당신의 매질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됐을 때부터 나는 당신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 같다. 

부모라는 당신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야 말로 진정 어른이 되는 길이었다. 언제나 충분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묵야의 말대로 나는 어리광을 부릴 줄 모르는 애늙은이였을 뿐이었다. 언제나 쉽게 흥분하지 말아야 했으며, 형으로서 이주율을 지켜야 했었다. 나는 작은 알약 속에 갇혀있었다. 알약을 감싼 막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나약함이었다. 뜨거움이 닿으면 사라질 막은 차가운 한 겨울 길바닥에 놔 뒹군 채 단단해지기만 했다. 그 누구도 손톱만한 내 알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나를 주워 따뜻한 두 손으로 녹여준 사람을 기다렸다.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손은 인고의 끝에 찾아왔고 꽁꽁 얼어붙었던 막은 녹기 시작함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사라져갔다. 그 안에서 나신을 드러낸 채로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끌어안은 건 묵야였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런 말들은 필요치 않았다. 단지 그의 존재만으로도 내 외로움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이 그 어떤 말보다도 확실했다.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묵야이길 바랐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여전히 손발은 자유롭지 못했다.

“일어났어?”

쉰 목소리가 나를 소파에 눕혀두고 자신은 바닥에 앉아 내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아, 네. 정신을 잠깐 놨었나보네요. 근데 이것 좀 풀어주시면 안될까요?”

팔을 밑으로 내렸다. 쉰 목소리는 생각 외로 순순히 내 팔목을 결박한 밧줄을 풀어주었다. 지끈한 골을 들었다. 냉장고를 보니 그 앞에 세 명의 몸이 밧줄로 한데 포박되어 있었다. 다들 병원으로 실려 가야 할 상태라 저렇게 밧줄로 묶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수작 부리지 마.”

다리는 여전히 묶여있으니 수작을 부리려야 부릴 수도 없었다. 

“너 진짜 사람 생각 읽는 거 맞아?”

속고만 살았나보다. 의심병이 심각했다.

“진짠데요.”

“그럼 방금 기절했던 것도 그 능력 때문에 그런 거야?”

아뇨, 마약 부작용입니다. 플래쉬백이라고 하죠. 입을 꾹 다물었다. 쉰 목소리가 내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가죽이 뜯겨져 나갈 듯한 힘이 뒤따랐다.

“도박하다가 그 따위로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응?”

“잠시 쉬면 괜찮아 집니다.”

“내가 너처럼 남들 생각은 못 읽어도 사람은 잘 보거든. 넌 도박할 새끼가 아니야. 하마터면 니년 수작에 넘어갈 뻔했지 뭐야.”

‘아르바이트’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쉰 목소리에게선 몇몇의 문자들이 생성되어있었다. 그 중 저 아르바이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박장을 휩쓸고 다니는 타짜가 아르바이트 따위는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생각보다 더 현명한 녀석이었다. 자유로워진 주먹으로 회심을 일격을 가하고 뜀뛰기로 쏜살같이 도망갈까 구상을 해보았다. 내가 이길 확률은 0.1프로 쉰 목소리가 이길 확률이 99.9프로였다. 저기 널브러진 채 포박되어 있는 녀석들이 내 무리한 생각을 종식시켰다. 

“그 쪽도 이런 짓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플래쉬백 현상을 일으켰을 때 내 등을 쓰다듬던 손은 환각이 아니었다. 저 쉰 목소리의 행동이 맞았다.

“너랑 얘기하면 지긋지긋해. 난 이런 건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그냥 널 넘기기로 했지.”

제길. 내 납치를 사주한 사람이 궁금하긴 했으나 죽는 순간에 알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쉰 목소리는 마음을 확고히 굳혀 고쳐먹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드디어 오셨나본데. 기절해 있는 동안 좋은 꿈이나 꿨으면 좋았을 걸. 그렇지?”

컨테이너박스의 철문이 휙 열어젖혀졌다. 안에서 보는 밖은 컴컴했다. 문 앞에 선 사람이 그림자처럼 까만 형체만 드러냈다. 나는 들어오는 남자를 확인하곤 절망에 가까운 좌절을 맛봤다. 차갑게 변한 저 사람은 나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태형 형…….”

태형 형의 멜빵을 타고 겨드랑이에 걸린 어깨권총집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죽음, 인멸.’ 뚜벅뚜벅 걸어온 태형 형에게서 검고 독한 문자들이 뱉어졌다. 문자가 향한 방향은 쉰 목소리였다. 서둘러 그 두 글자를 잡아 손안에서 뭉개버렸다. 형은 진심으로 쉰 목소리를 죽이려 했는지 글자가 여간 독한 게 아니었다. 이를 악 물었다. 눈알이 시큰해지며 목구멍으로 꿀럭거리며 무언가가 넘어오려 했다. 

“너, 내 뒤로 서.”

깽깽이 발을 하고 쉰 목소리의 앞에 섰다. 쉰 목소리가 나를 밀치고 태형 형에게로 다가갔다.

“돈부터 확인하겠습니다.”

태형 형이 어깨 위로 두 손을 들어보였다. 형이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드는 순간 나는 쉰 목소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대로 녀석의 몸을 밀쳐 엎어뜨렸다. 형이 발사한 총구가 불을 뿜었다. 컨테이너 쇠벽에 부딪힌 총알이 핑핑 거리며 이리저리 튕겨 다녔다. 몸을 바닥에 대고 잔뜩 낮췄다. 튕겨지는 총알이 우리를 비껴나가길 바랐다. 탕탕 거리던 총알은 어딘가에 둔탁하게 박히는 소리로 끝을 맺었다. 총알이 박힌 방향은 까무잡잡이 묶여있는 곳이었다. 까무잡잡의 뱃가죽에서부터 흐른 피가 티셔츠의 면적을 넓히며 물들었다.

“형!!”

총구를 바닥에 내린 태형 형을 보고 형을 불렀다. 

“이주인,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좋았잖아. 왜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어.”

“왜 그래요, 형. 대체 왜 이래요!”

내 밑에 깔려있던 쉰 목소리가 나를 밀쳐내며 일어섰다. 바닥에 떨어진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쉰 목소리에게 형의 총구가 향했다.   

“하지 마세요!”

내 고함과 함께 발포소리가 터졌다. 쉰 목소리의 머리가 뒤로 훅 젖혀졌다. 그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굴렀다. 쉰 목소리의 머리가 터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태형 형이 내게 다가왔다. 

“주인아, 그러게 내가 하라는 대로 했으면 좋았잖아.”

“왜 그래요, 형. 대체 이유가 뭐예요!!”

휘청이며 일어나 형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형이 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환멸, 속임수, 계략, 거짓, 정의.’ 태형 형의 머리 위에서부터 낙하하는 꽃잎처럼 글자들이 내려왔다. 나는 그 중 정의를 손에 쥐었다. 그 글자는 잔뜩 비틀려있었다.

“세상에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는 왜 그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방치하지? 아, 네 애인이 악당이기 때문에 너도 악당이 된 건가?”

“형…….”

“나는 말이야, 제희 선배를 매우 좋아했어. 그는 내 이상이기도 했지. 늘 냉정했던 제희 선배는 범죄자에게 사정을 두지 않았어. 나는 너도 그런 줄로만 알았지 뭐야.”

태형 형은 아버지에게 향했던 이상을 어느덧 내게 바라고 있던 것이다. 나는 형의 만족을 채워주지 못했다. 

“조금 편법을 쓰면 어때? 어차피 나쁜 놈들이야. 그 놈들 잡아넣으면 나도 좋고, 세상도 좋아지고 일석이조잖아. 근데 네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어. 주인아.”

“형, 언제부터에요.”

언제부터 저를 죽일 생각을 했어요……. 괴로운 눈으로 형을 올려봤다. 형에게 있어 나는 이제 아끼는 동생 이주인이 아니었다. 

“네가 그 놈과 호모짓을 한 걸 알고부터지. 사비가 꽤나 들었어. 저놈들을 네게 붙여놓는 게 의외로 비쌌거든.”

“이러지 않았잖아요, 형 이럴 사람 아니잖아요.”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나와 같이 정의를 찾았어야지. 넌 왜 변절자가 됐지?”

빗나간 정의심과 욕심. 지금의 형을 구성하는 전부였다. 이성일의 말이 맞았다. 나는 태형 형의 거짓말 탐지기였다. 그 기계를 맹신한 태형 형은 그것이 고장 나자마자 혼돈 속에 빠져버렸다. 내가 태형 형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형이 이렇게 변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유진이, K3를 한국에 들여온 판매자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내가 형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듯 태형 형도 마찬가지였다. ‘Rj’ 나는 그 단어 하나만으로 형이 유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걸 확신했다. 

“유진이 사파에 K3를 팔았고, 사파에선 사망자가 속출하자 K3의 판매를 멈췄죠. 형도 알고 있었어요, 그렇죠? 묵야를 잡기 위해 목격자도 거짓으로 꾸며냈었구요. 그건 형이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불의잖아요.”

형이 내게 총구를 들이댔다. ‘전성그룹, K3.’ 형이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계략’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와 ‘전성그룹’과 한데 뒤엉켰다. 

“설마, 전성그룹 후계자 살인사건도 형이 연관되어 있던 거예요?”

태형 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사건을 크게 키워야 건드리기가 쉬워지니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전에 묵야의 부하인 남자를 취조할 때 형에게서 피어올랐던 것과 지금의 저 문자는 모양이 흡사했다. 그 때는 단지 형이 묵야의 부하를 의심하는 단어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처럼 형과 연관되어 있는 것일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생겨난 문자를 토대로 생각을 유추한다. 그것이 틀리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럼… 제 카페로 마약 포대가 배달 온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겠네요.”

“K3를 안전하게 배달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해 준 건 내가 맞아. 운이 좋으면 네가 내 일을 도와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너와 같이 지내는 동안 나는 눈뜬 봉사가 아니었어. 너는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했지만 속내를 전부 알지는 못했지. 한 달째 들어서니 확신을 가졌어. 거짓을 교묘히 둘러 포장하면 거짓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네 능력은 완벽하지 않아. 늘 한계가 따랐지.”

태형 형이 나와 살았던 이유가 단순히 내 능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이 형에게 저런 생각을 심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형에게 내 능력에 대해 발설 했으면 안됐다. 이성일의 염려는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충고였다. 당시엔 그런 충고를 전해줄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이 잘못된 선택인지도 알 턱이 없었다.

그 때 컨테이너박스에 새로운 인물이 들어섰다. 백열전구에 비치는 남자는 처음 보는 자였다. 그 역시 나를 구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나다가 들린 행인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는 묵야처럼 구김하나 없는 정장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남자의 등 뒤를 주시 했지만 남자 외에는 더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컨테이너 문은 밀봉상태처럼 꽉 잠겼다. 

“꼭 내가 왔어야 했어?”

정장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거드름을 피웠다. ‘묵야.’ 새끼손가락을 떼었을 때 손끝에 문자가 달라붙어 나왔다. 기름유출 사건으로 태안 일대를 오염으로 찌들게 했던 원유의 거무튀튀한 색과 닮아있었다. 게다가 기름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질척함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저 문자를 익히 알았다. 묵야의 정장에 얼기설기 묻어있던 문자덩어리들이 딱 저랬다. 남자가 팔짱을 끼고 자신의 턱에 손을 올려 나를 품평하는 자세로 섰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어제의 아군이 내일이 적이 된다는 게, 어제의 적은 오늘은 아군이고 말이야.”

태형 형과 남자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서로에게 재갈을 물려야죠, 안 그렇습니까?”

묵야의 정장에 덩어리째 문자가 붙으려면 남자와 묵야는 굉장히 가까운 사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태형 형과 남자와 상생하기 힘든 동업관계였다. 나는 남자의 정체가 사파에 관련된 사람일 거라는 데 확신이 기울었다. 

“저 녀석이 사람이 생각을 읽는다지?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니 제가 곁에 두었죠.”

태형 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동생 녀석의 생각은 읽지 못하다면서? 그럼 쓸모가 없잖아.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군….”

“거짓말을 한 겁니다. 저 녀석이 묵야와 그런… 관계이니까요.”

태형 형이 이를 갈며 혐오감을 비췄다. 총구는 발사되지 않았는데 지금의 머리는 총알이 관통한 순간과 다름이 없었다. 저 남자와 묵야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묵야의 형이었다. 

“왜…….”

벌어진 입에서 바람 빠진 풍선 소리가 새어나왔다.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고리는 이유도 모르는 채 중간에 끊어져버렸다. 

“생각을 읽는다며, 왜 저리 멍청한 표정이야.”

“능력이 좀 한정되어 있거든요.”

태형 형이 내 대신 내 능력의 한계성에 대해 설명했다. 묵야의 형에게서 나오는 문자는 하나같이 전부 독이었다. 연약한 갈매기 떼 정도는 저 끈적한 독기에 날개가 썩어버리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차안에서도 참아냈던 토악질이건만 저 남자 하나로 인해 악문 입에서 핏덩이가 뱉어졌다. 쿨럭하고 쏟아내자 남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뭐야, 결핵이야?”

자유로운 손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속이 한결 나아졌지만 미식거림은 가시지 않았다. 

“살다 살다 당신처럼 더러운 문자를 뱉어내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묵야씨에게 달라붙어 있던 문자는 전부 당신에게서 나온 거였군요.”

“묵야를 만난다는 게 정말인가보군.”

‘희야, 시건방, 아버지, 장례, 위임.’ 대체 어떤 성정을 가지면 저렇게도 더러운 색의 글자들이 튀어나올까 싶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혐오스런 문자였다. 너는 세종대왕님이 살아계셨으면 한글을 더럽힌 반역죄로 주리를 틀었을 것이다. 희야라는 글자는 남자가 묵야를 떠올렸던 때만큼이나 증오감이 깊었다. 저자가 희야의 남편을 죽이라 지시한 묵야의 형과 동일인물 인 것 같았다.

“매부를 죽여 놓고도 그렇게 뻔뻔한 것을 보니 당신이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남자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홑꺼풀만 제외하고 묵야와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점까지 묵야가 네게 말했나? 아니, 네가 생각을 읽는다했으니 혼자 알아냈을 수도 있었겠군.”

나는 저 남자가 본능적으로 싫었다. 세상을 떠도는 악한 문자는 전부 저 남자에게서 생성되는 것만 같았다.

“사실은 네게 손댈 생각은 전혀 없었었어. 나는 그 녀석만 실각시키면 됐으니까. K3와 관련해 네가 일을 꼬아놓으니 없앨 수밖에. 미로도 네가 발견했다지? 그걸 묵야에게 이야기 해준 건가?”

호텔에서 묵야의 정장에 붙어있던 검은 덩어리 중 소멸되지 않고 남았던 ‘실각, 실추’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제게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너 따위는 묵야보다 한참 발밑이라는 속내를 내보여줬다. 

“녀석에게 너 같은 든든한 아군이 더해진다면 나 역시도 두고 볼 수는 없더군.”

“그가 무섭습니까? 하긴 두려우니 당신의 부하들도 데려올 수 없었겠죠.”

내 말에 남자가 웃었지만 분노를 참는 것이 빤히 보였다. 묵야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을 남자가 하수인을 끌고 다니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면서도 남자가 혼자 왔다는 행동은 돌려 말해 남자는 자신의 부하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믿을 만한 부하가 있었다면 이런 일에 더 적합한 조폭들을 쓰지 돈을 들여가며 뒤탈 없는 저 어린 녀석들을 고용했을 리가 없었다. 

“뭐, 어때. 서로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김경위가 나를 부른 거고, 난 봐주기만 하면 되니까. 어이, 김경위 그만 뜸들이지?”   

태형 형을 올려봤다. 언제부터 저 남자와 손을 잡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들은 K3와 관련된 사건들을 묵야에게 덮어씌울 심산이었던 듯 싶었다. 끊어진 연결고리가 다시 이어졌다. 태형 형이 그렇게나 묵야를 잡고 늘어졌던 일련의 행동들이 이해됐다. 태형 형은 내가 무조건 형의 편에 서서 자신을 도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묵야와 깊은 관계까지 가졌으니 내가 얼마나 귀찮은 걸림돌로 느껴졌을지 그저 씁쓸했다. 

토막 살인사건 피해자와 전성그룹 사건의 용의자. 그 둘은 묵야의 부하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묵야라는 문자를 내뱉는 건 당연했다. 나는 왜 몰랐을까? 그저 모든 살인사건에 묵야가 연관되어 있다고만 확신했을 뿐이었다. 묵야는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의심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형, 왜 그랬어요? 언제부터 저를 속였어요?”

나는 태형 형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주길 바랐다. 이미 너무 많은 강을 건너온 형이 이제라도 되돌아가기 바랐다. 내가 조금만 일찍 알아차렸다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태형 형의 주변을 맴돌던 문자들을 의심하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형도 후회하죠? 사실은 이러고 싶지 않은 것 알아요. 형 그날 국과수에서 나올 때 형도 스스로에게 자괴감 느꼈잖아요.”

자살이라는 단어가 형에게 붙어있던 것을 말했다. 형도 이성과 어긋난 정의감의 흔들림 속에서 괴로워했을 터였다.  

“지금 와서 그런 건 상관없잖아. 주인아, 나는 네게 기회를 줬어. 그런데도 넌 묵야를 선택했지.”

묵야라는 이름조차 내뱉기 싫은 듯 이를 갈며 형이 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겼다. 공이치기가 뒤로 젖혀진 채 격발 직전 상태로 들어섰다. 

“이 사람아! 여기서 쏘면 다 죽자는 거야!”

이미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총알이 내 몸에 박히지 않는다면 컨테이너 박스를 팅팅 거리며 총알이 날아다닐 상황이 재연될 것이었다. 혹시나 총알이 자신에게 튕겨올까 걱정이 된 남자는 서둘러 컨테이너박스를 나갔다. 이제는 형이 나를 죽이려는 의도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죽음이 내 머리위로 내렸다.

“넌 더러운 호모새끼였어. 난 감쪽같이 속았지 뭐야, 그러니 네가 있으면 일이 방해가 돼. 네가 묵야에게 도움을 주면 더더욱 곤란하고. 우리 아이도 곧 태어날 텐데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어? 넌 제희 형에게 부끄러운 자식이야. 알아?!”

‘이주인, 죽음, 격발.’ 그 중 ‘죽음, 격발’을 잡아서 없애버렸다. 형이 잠시 주저하는 틈이 생겼다. 어깨로 형을 밀쳐 엎어뜨렸다. 총을 놓친 형이 손을 뻗었고, 나는 그보다 더 빠르게 총을 쳐냈다. 엎치락뒤치락 하는 과정 속에 총은 천장을 보고 쓰러진 쉰 목소리의 옆구리에 툭 부딪혔다. 태형 형이 내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총으로 향하는 형의 바짓단을 붙들었다. 잠시 시선을 내려 내 다리를 결박한 밧줄을 풀려고 했지만 칼이 아니면 끊어낼 수가 없는 묶음이었다. 형이 내 손등을 짓밟았다. 나를 귀찮은 벌레쯤으로 생각하는 듯 혐오스러운 문자들이 솟아났다. 태형 형은 쉰 목소리의 옆구리에 자리를 잡은 총을 주워들었다. 내게로 곧장 총구가 향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 순간 쾅! 하는 굉음이 터졌다. 총구가 발사된 줄로만 알고 고개도 들지 못했다. 너무 아프면 감각이 없구나 싶을 정도로 고통은 없었다. 혹시 이미 죽은 건가? 고통 없는 즉사? 별의별 생각이 머리를 떠다녔다. 곧이어 태형 형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설마 오발작동으로 총이 터진 걸까? 머리를 막은 손을 떼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총을 들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 태형 형의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잭나이프가 꽂혀있었다. 나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내가 보는 저 남자가 환상이 아니길 바랐다. 다시 시작된 플래쉬백 현상은 아닐까 뺨을 꼬집어봐야 했다. 묵야의 손에 끌려온 그의 형을 올려보고 환상이 아님을 알았다. 

“사묵야, 나를 이렇게 취급하고 무사할 것 같아!”

남자의 머리칼을 쥔 묵야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건드셨습니다. 이주인, 눈감아.”

묵야의 말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흡사 사람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지는 소리가 났다. 묵야는 컨테이너박스 구석에 기절한 상태인 그의 형을 던져 넣고 내게 다가왔다. 쓰레기처럼 나뒹군 남자의 뒷머리칼이 질척한 피들과 한데 뒤엉겨있었다. 동시에 묵야의 뒤로 수십의 남자들이 컨테이너박스로 들어왔다. 그 중 맥가이버 칼을 돌리고 있는 덩치가 태형 형의 손에 박힌 잭나이프를 뽑아냈다. 피가 분수처럼 터지고 태형 형이 몸부림 쳤다. 묵야는 아연실색해 앉아있는 내게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마치 아직도 환상속의 일부분 같아 믿기지 않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을 뻗어 묵야를 끌어안았다. 언제나 그렇듯 정장 안에 숨겨진 그의 몸은 따뜻했다. 묵야가 나를 들어 일으켜 등을 토닥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묵야의 어깨에 축축한 눈물이 적셔들었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또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무사히 살아남아 서로가 서로를 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묵야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끌어안기만 했다. 

옆의 덩치에게서 잭나이프를 받아든 묵야는 내 다리를 결박한 밧줄을 끊어냈다. 막혔던 피가 통하며 발목부터 전기가 일었다. 

“네 이마, 누가 이랬지?”

묵야가 내 턱을 잡아 올려 피가 굳어있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엉망일 게 분명한 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까지도 닦아주었다. 태형 형을 꼼짝도 움직일 수 없게 포박한 남자들이 형의 등을 내리찍었다. 형이 몸부림을 치며 악을 질렀다. 분해하는 형이 미웠다. 믿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나를 기만한 것이 슬펐다. 하지만 거기엔 내 책임도 있었다. 태형 형에게 향하는 내 팔을 묵야가 붙잡았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슴 안에 불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불은 이미 진화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형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내 다짐과도 같은 말이었다.    

“형… 저는요. 이 사람이 조폭이라서, 어두운 일을 해서 싫어질 거였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형이 형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저도 이 사람을 사랑해요. 미안해요, 형. 그리고 용서할게요. 그러니 형도 저를 용서해주세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 위해 숨을 여러 번에 나눠서 삼켰다. 울리는 목울대를 타고 눈물은 끊임없이 흘렀다. 나는 형을 의심하지 않았다. 일말의 의심이라도 있었다면 형에게 물었을 것이다. 형이 이 사건들과 연관이 있었느냐고. 그랬으면 나는 형의 진심을 읽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묻지 않아서 형이 생각하는 모든 문자들을 하나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결국 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완벽히 읽어낼 수는 없었다. 내가 던지는 질문만이 그들에게서 진실을 끌어내는 점화장치였다. 그렇다면 나는 장님뿐만이 아닌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것일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장님도 아니고, 벙어리도 아니었다. 다만…….

“형이 했던 말이 늘 감사했어요. 난 남들보다 눈과 귀가 조금 더 밝은 거라구요.”

태형 형이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형은 후회하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혐오하기만 했다. 묵야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난장판이 된 컨테이너 안을 검은 정장들이 빼곡히 채웠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이곳이 폐품을 철거하는 고물상인 것을 알았다. 여기저기 쌓아놓은 철거된 기계들과 폐전선, 파지들이 운동장에 넓게 쌓여있었다. 광명고물상. 한쪽으로 치우쳐진 간판이 컨테이너 상단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나를 납치한 네 명은 운영되지 않는 고물상을 그들의 아지트로 삼을 심산이었던 듯 했다. 

“형은, 형은 어떻게 되요?”

“경찰이 알아서 하겠지.”

경찰과 가장 친하지 않은 남자가 경찰에게 맡긴다는 말을 했다. 

“묵야씨 형은요?”

“그건 우리 쪽에서 처리해야겠지. 그리고 저 놈을 원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희야를 말했다. 그녀는 아마 언제고 자신의 남편을 죽인 남자가 실각되길 바라왔을 것이다.

“미안하다. 네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 K3는 사이남이 들여온 마약이라 그 미친 외국인이 판매책인 걸 알지 못했다.”

사이남? 설마, 묵야의 형 이름인가? 그럼 첫째는 사일남 일수도 있었다.

“첫째 형은 사일남이에요? 혹시, 묵야씨 바로 밑의 동생은 사사남이구요?”

“어떻게 알았지? 내 동생은 외자다. 사남이지.”

묵야는 진정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리 네이밍 센스가 제로여도 사사남은 아니다 싶었는지 넷째는 외자로 줄여주는 자비를 베풀었다. 사신후는 의외로 관대한 남자였다. 남자 형제 중 셋째인 묵야가 사삼남이 아니란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인 건 따로 있었다.

“무사히 살아서, 묵야씨를 볼 수 있게 돼 다행이에요.”  

“너는 꼭 천사같다.”

묵야가 내 머리 위로 입술을 내렸다. 심각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내뱉는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물론 닭살이 좀 돋긴 했다.

“악마일지도 몰라요.”

“침대에서는 그런 것 같다.”

그 때 바이크 한 대가 문짝도 없는 고물상의 입구로 들어섰다. 바이크는 먼 길을 달려봤는지 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금장 휠이 찬란한 바이크였다. 유진이 훔쳐갔었던…. 헬멧을 쓰고 바이크를 운전하던 남자가 급히 달려왔다. 벗겨진 헬멧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얼굴을 드러낸 이주율이 나를 끌어안았다. 묵야는 담배를 물고 인상을 팍 구겼다. 저렇게 태가 난 표정은 또 처음이었다. 나는 손을 떨고 있는 이주율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상처에 신음하는 어린 녀석을 달래줬던 때처럼 내 손길에 녀석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괜찮아? 네 이마는 누가 이렇게 깨놨어! 어떤 씨발 새끼야!!”

“목소리 좀 낮춰. 머리 울린다. 근데 둘 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이주율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호텔에 갔더니 이사… 님만 달랑 있잖아, 너는 오지도 않았다고 하고, 그래서 바로 집으로 돌아갔지. 대문은 열려있는데 너는 온데간데없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애새끼들 풀어서 너 찾으라고 휴대폰을 드는 순간에 미친 양키 새끼한테 전화가 왔어.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말해주더라고.”

“유진? 유진은 어디 있어?”

“몰라, 대문 앞에 바이크만 달랑 놓여 있더라고. 씨발 내가 구하러 온 건데 저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묵야가 담배를 흙바닥에 버렸다. 불을 완벽히 진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밑의 녀석들은 네 소유가 아니다. 내 소유지.”

묵야는 이주율에게 착각하지 말라는 듯 충고했다. 이주율이 나를 구하러 조직의 일원들을 부른 것 같은데 그게 묵야의 귀에까지 들어갔나 보다. 컨테이너박스에서 정장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이주율을 알아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십쌔끼들.”

이주율이 인사도 받지 않고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나를 납치 했던 네 명이 그들의 손에 끌려나왔다. 죽은 줄 알았던 쉰 목소리는 잭나이프를 흔들었던 남자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총알이 머리를 빗겨나갔는지 머리가 터진 끔찍한 참상은 아니었다. 대신 살이 쓸려나간 이마에서 아직도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배에 총알이 박혔던 까무잡잡도 와이셔츠 하나가 복부에 동여매 있어 응급처지가 된 상태였다.

“병원으로 데려가야죠.”

“아니, 곧 경찰이 올 거다. 가자.”

얼굴을 내밀고 보니 고물상의 밖으로 검은 세단이 우르르 서있었다.

“이주율, 넌 자가용 타고 와.”

“뭐? 싫어!”

“내가 바이크 타고 갈게.”

“대가리가 그렇게 깨져서 무슨 헛소리야!”

이주율이 발광이 났다. 묵야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바이크는 아직 시동이 걸려 있었다. 떨어진 헬멧을 주워서 흙을 털고 머리에 썼다. 스모크 실드를 열어 묵야에게 말을 건넸다.

“호텔로 돌아가 계세요. 그럼 그곳으로 갈게요.”

“네가 또 안 오면, 그럼 어떡하지?”

그럴 일은 없어요. 내가 갈 곳은 이제 당신이 있는 곳뿐이니까. 조용히 웃자 묵야가 잡은 내 손목을 풀어주었다. 이주율이 불만 가득한 상태로 눈을 벌겋게 빛냈다.

“너도 집으로 가 있어. 집 먼저 갈 거야.”

이주율의 표정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하여간 알기 쉬운 녀석이었다. 아쉬움을 뚝뚝 흘리는 그 둘을 뒤로 하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바이크로 광명에서 서울까지 올라가려면 한참이었다. 스모크 실드를 내리고 고물상을 질러나갔다. 나를 지켜보고 있을 두 남자를 향해 뒤돌아보진 않았다. 바이크는 주인인 나를 알아보고 그릉그릉 거리는 짐승의 신음소리를 참지 않았다. 속도를 올릴수록 우렁찬 포효소리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실컷 속력을 내고 달리다 광명교를 건너 지하차도 옆길에 잠시 바이크를 세웠다. 바이크에 달라붙어있던 문자 하나가 내 스모크 실드에 붙어 시야를 가린 탓이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홀로 바이크를 타고 나온 것이었다. ‘labyrinth’ 실드에 붙어있던 글자를 떼었다. 라비린스, 즉 미로였다. 유진이 내게 남긴 문자를 없앴다. 미로가 있는 논현동까지는 족히 삼십분은 걸리겠지. 클러치를 쥔 손을 놓고 다시 속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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