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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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정신을 일깨웠을 때 묵야가 내 입안으로 물을 흘려주고 있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과는 다르게 입안에 든 물은 지나치게 찼다. 숨이 부족해 묵야의 얼굴을 밀어내자 주륵하고 물이 흘러내렸다. 아래는 단단한 무언가에 틀어박혀있는 기분이었다. 뻐근함과 욱신거림이 단번에 찾아오자 몸을 굽히고 배를 감쌌다. 음모 바로 위의 아랫배가 타들어가는 듯 꼬였다. 묵야가 허리를 움직이자 쿨쩍쿨쩍하는 음란한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들어?”

편도가 부은 것처럼 목구멍도 꽉 막혀있었다. 

“어깨에 팔을 둘러봐.”

묵야의 말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쌌다. 그 순간 묵야가 나를 번쩍 안은 채로 일어섰다. 주륵하며 중간쯤 빠진 기둥을 타고 정액이 흘러내렸다. 

“K3는 약효가 길어봐야 두세 시간이다.”

묵야는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고는 내 안에 성기를 넣은 채로 성큼성큼 걸었다. 묵야가 걸을 때의 반동으로 인해 성기가 깊이 들어왔다 나가는 바람에 안쪽이 아렸다. 욕실로 들어온 묵야는 물을 가득 채운 탕 안에, 나를 안은 채로 몸을 담갔다. 욕실까지 오는 동안 조금 맑아진 정신에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증기가 따끔한 목구멍을 달랬다.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힘을 빼자 묵야가 내 허리를 잡아 아래로 내리눌렀다.

“흐아아!!!”

고개가 꺾이며 쇠꼬챙이로 안을 찌르는 듯한 기분에 비명이 샜다. 묵야가 허리를 잡은 손을 아래위로 놀렸다. 그의 어깨위에 손을 올리고 내려 보자 묵야는 무언가에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사납게 올라간 눈매 때문이었다. 성기가 안으로 들어오며 물까지 안으로 침범했다. 배가 빵빵하게 불어오는 것만 같다. 

“이주인, 시간(屍奸)하고 싶지 않으니 더 이상 정신 놓지 마.”

묵야가 늘어진 시체를 보고 흥분하는 네크로필리아는 아닌 것이 당연했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지 창피함으로 온몸이 물들었다. 약에 취해서 덤벼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첫 번째 사정이후로는 아예 기억의 줄이 끊겨버렸다. 

“아흣…!”

참방참방 대는 물이 얼굴까지 튀었다. 묵야의 행동이 거세지고 허리뼈가 부서질 것 같이 쥐어졌다. 묵야가 힘을 주어 내 허리를 밑으로 처박았다. 번개라도 맞은 것 마냥 파르르 떨렸다. 연신 그의 복근에 부벼지고 있던 내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물에 흩어지는 정액이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넘실거렸다. 묵야도 내 안쪽에 정액을 쏟아 부었다. 다섯 번이 넘게 걸친 사정이 끝나고 묵야가 성기를 쑥 빼냈다. 물속이라 그런지 안에서부터 정액이 나가는 느낌이 둔했다. 묵야가 지쳐있는 내 몸을 잡아들어 일으켰다. 엉덩이가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안쪽에서부터 주륵주륵 쉴 새 없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엉덩이에 힘을 줘 구멍을 닫으려 했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반신은 이미 내 제어를 벗어났다. 묵야가 선 채로 나를 안아서 손을 뒤로 뻗었다. 엉덩이 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꽂아서 양쪽으로 쭉 벌리자 물과 섞인 뭉클한 정액들이 빠르게 흘러내렸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힘주지 마. 어차피 다 빼내야 하니까.”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전에 없던 차가움이 서려있었다. 묵야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곧 묵야가 내 재킷 안에서 K3를 발견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장면은 분명 환각이 아니었다. 안에 남은 정액들을 긁어서 빼낸 다음, 묵야가 다시 탕 안으로 나를 앉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특히 정신이 맑아질수록 창피함을 넘어선 쪽팔림에 입술만 물었다. 인중까지 물에 잠겨 묵야를 쳐다봤다. 묵야가 탕 밖으로 나가더니 변기 위쪽에 놓아뒀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투명한 비닐 팩에 담긴 캡슐을 손에 덜어서 순식간에 변기통으로 빠뜨렸다.  

“아앗!”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묵야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허리는 이미 빠져버려서 탕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좋지 않아…….”

묵야가 위압적인 자세로 내게 다가왔다. 미칠 것 같은 쪽팔림과 오해 덕분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자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 문자들이 잡혔다. 그걸 빼내서 보자 정말 죽어야지. 라는 생각만 들었다. ‘더, 원해, 깊숙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 지나간 내 추태를 돌이켜보라고 하는 듯 고스란히 남겨져있었다. 서둘러 그 문자들을 터뜨려 없앴다. 짝짝거리는 손동작에 의해 묵야의 얼굴로 물이 튀었다. 묵야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틀었다.

“아직도 약기운이 남아있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탕 안으로 들어온 묵야가 뒤에서부터 나를 껴안았다. 

“가끔 멍할 때가 있던 것 같던데, 약은 언제부터 했지?”

도박꾼에 이어 마약쟁이까지. 묵야라는 남자한테 내 이미지가 어떻게 비칠지 당혹스러웠다. 도박 건은 묵야가 내게 점수를 따려 농담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그저 자신이 한심했다. 

“저 마약 안 해요.”

아니 이미 한 번은 하게 됐으니 틀린 말이 되려나.

“그럼?”

묵야가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며 내 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뒤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묵야의 숨결에 몸이 축 늘어졌다.

“K3 공급지를 알게 돼서 찾아갔는데…. 그게, 일단 증거물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구입했다?”

“네.”

묵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럼 증거물이 어떤 효과가 나는지 궁금해서 먹어본 건가?”

“그럴 리가요. 물건을 사서 나오는데 공급책 녀석이 서비스라며 먹어보라고 해서요. 마약을 사러간 사람이 공짜로 주는 마약을 마다하면 쓰겠어요?”

“그렇지.”

“그래서 먹게 됐죠. 토를 해도 소용이 없더라구요… 집에 가려 했는데 정신이 계속 혼미해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는 말하지 않았다. 묵야가 가슴을 울렸다. 소리는 안 나지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참 특이해.”

“그러게요.”

“K3를 누가, 어디서 팔았지?”

탕 안은 뜨거웠음에도 묵야의 한기서린 목소리 때문에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건 노코멘트요.”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뒤에서 K3를 다시 판매한다고는 들었지만, 네가 덥썩 먹을 줄은 몰랐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제 말 다 믿긴 해요?”

내 물음에 묵야가 내 몸을 돌려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내가 정말 마약중독자라서 거짓말을 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인데 묵야는 싱거울 정도로 내 말을 믿었다. 너무도 쉽게 수긍하는 게 혹시 내 말을 믿는 척 하는 건가라는 의심이 들게끔 했다. 

“거짓말이었어?”

“아뇨, 진실이에요.”

“그럼 됐다. 믿어.”

묵야는 내게 공급책을 어디서 알게 됐고, 마약을 어떻게 구입했냐고 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깊이 물었다면 묵야에게 내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을 것이다. 자랑스레 얘기할 필요도 없는 능력이었지만, 반대로 숨기는데 급급할 능력도 아니었다. 특히 내가 읽을 수 없는 묵야에게는 말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생겨도 먹지 마.”

“그래야죠.”

“섹시해서 좋았던 점은 있긴 하지만.”

내 모습이 어땠기에 저렇게 웃고 있는지. 자괴감에 빠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약 때문에 그런 거라면 사양이다.”

저 원래도 섹시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기억이 반쯤 날아간 것이 다행이었다. 세세하게 다 기억하고 있었으면 이 탕 속에서 쪽팔림의 재가 됐을 것이다. 

“저 좀 자도 될까요?”

“얼마든지.”

다시 몸을 돌려 묵야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고 미약하게 출렁이는 물결에 몸을 맡겼다. 온몸이 삐걱이며 욱신댔지만 일단 피곤함을 버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고 느꼈을 때 촤아악하며 물속에서 끌어올려졌다. 물론 잠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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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이 돼서야 깊게 감겨있던 눈을 떴다. 시야가 평소보다 좁아진 걸 보면 눈이 팅팅 부어있는 거겠지. 이미 잠에서 깬 묵야가 침대 옆 테이블에, 룸서비스로 가져온 아침식사를 정돈하고 있었다. 매콤한 김치찌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어제 성대하게 토를 해놨던 터라 비어버린 위가 어서 밥을 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일어났어?”

“네.”

번쩍 몸을 일으키려다 허리 아래부터 종아리까지 울리는 통증이 대단해 주저앉고 말았다. 묵야가 부축해주려고 하기에 손을 휘젓고 스스로 일어섰다. 두 다리를 벌려서 거북이 저리가라 할 속도로 걸어갔다. 쿠션이 가미된 의자에 앉자, 서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파?”

“네.”

내 무덤 내가 팠으니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래도 사정 봐주고 한 건데.”

대체 사정 봐주지 않고 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 거지? 새삼 묵야와의 섹스가 두려워졌다. 

수저를 들고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의 국물을 떴다. 후후 물어서 입에 넣자 칼칼한 맛이 일품이었다. 공기 밥에 김치찌개의 국물과 두부 버섯 등을 건져 쓱쓱 비볐다. 그 뜨거운 것을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퍼먹었다. 이상하게도 묵야의 공기 밥에선 김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거 찬밥이에요?”

“아니, 미지근한 밥.”

풉. 하고 밥알이 나가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했다. 묵야는 김치찌개 국물을 떠먹지 않고 안의 건더기들만 밥 위에 얹어먹었다. 오징어볶음, 숙주나물무침, 햄야채볶음, 노릇노릇하게 익혀진 김까지 뜨거운 반찬이라곤 오로지 김치찌개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왜인지 모르게 나를 위해 준비한 것만 같았다. 찌개에 숟가락을 잘 가져가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공기밥 하나를 다 비워갈 때쯤 되자 묵야가 하나 더 놓여있던 공기를 내 위에 툭 올려주었다.

“두 그릇은 다 못 먹으니 반반 나눠먹어요.”

“그러지.”

티슈로 수저를 닦아서 공기밥을 딱 반으로 나누었다. 한 그릇 반을 다 비우자 포만감에 찬 위가 만족해했다. 수정과로 입가심을 했다. 묵야는 수정과가 싫은지 맹물만 들이켰다. 

“몇 시에요?”

“8시 12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도 아니고, 딱 잘라 몇 분까지 말해주는 묵야의 답에 그가 출근할 시간이 가까워진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근데 조폭한테도 출근시간이 있을까? 

“일 하러 가야하죠?”

“그렇지. 아직 30분 정도 여유 있어.”

조폭한테도 출근시간은 있었다. 새로운 사실에 눈을 크게 떴다. 

“아~ K3 증거물로 제출하려 했는데 말짱 도루묵 됐네요.”

무덤은 분명 내가 팠지만.

“구해줄까?”

“아뇨! 됐어요.”

말하기가 무섭게 파고드는 묵야의 친절을 거부했다. 일단 마약이 판매되는 장소는 알고 있으니 나머진 태형 형에게만 맡기면 됐다. 그러니 인정하긴 싫지만 어제의 난 그냥 삽질했다고 보면 됐다. 토막살인 사건도 K3와 깊숙이 연관된 것 같으니 미로에서 어떤 단서라도 나올지 몰랐다. 토막 사체에는 묵야라는 글자도 있었다. 이 남자의 다정함 때문에 몇 번씩 그 점을 간과하곤 했다.      

“묵야씨는 무슨 일 해요?”

묵야를 취조하고자하는 심보는 아니었다. 그에 대해 단순한 궁금증이 실현됐을 뿐이다. 묵야는 자신의 몫인 수정과를 내 앞으로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일이 터지면 수습하는 역할도 있고,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일도 하고. 사파에 관련한 일들은 거의 다라고 보면 돼.”

“수완이 좋으시나보네요.”

“그렇지도 않아.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도 많으니까. 그러는 너는?”

묵야는 내 물음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눈초리가 어제 욕실에서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부드러웠다.

“음, 저는요. 뭐 특별하게 이렇다 할 건 없어요.”

“경찰 일을 돕는다면서. 경찰이 아닌데 일을 돕는다는 건, 반대로 말해 네가 유용한 인재라는 소리겠지.”

묵야의 앞에서 겸손을 떨 생각은 없었다.

“유용하다라… 사실은 은혜 갚으려는 게 가장 큰 이유긴 해요.”

“은혜?”

“사람이 도움을 받았으면 그에 상당한, 아니 그 이상의 보답은 해야죠. 그게 은혜니까요.”

“경찰 측에 네가 은혜를 갚을 만한 사람이 있나보지?”

“그런 셈이에요.”

“항상 대답이 애매하군.”

“세상에 확실한 건 없으니까요.”

“그래, 옳은 말이긴 하다.”

아무리 독한 문자만 뿜어내는 사람이라 한들 그 사람의 성정이 사악하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은 얼마든지 생각이라는 틀 안에서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온갖 것들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그 악한 마음을 눌러서 사는 것이야 말로 준법정신에 해당하는 사례였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마냥 착한 사람들의 생각도 파헤쳐보면 얼마든지 악한 생각들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사람도 생각도 확실한 절대악, 절대선으로 갈라지는 것은 없다. 이마저도 몇 년 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경찰이 네 몸까지 바쳐 일을 도와달라고 한 건 아닐 테고.”

“그렇죠.”

“그럼 너부터 챙겨. 어제 같은 불상사는 앞으로 없도록.”

“그러게요, 설마 그 공급책이라는 녀석이 공짜로 줄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그것도 한 알에 몇 십만 원이나 하는걸…. 그 비싼 돈 주고 왜 사먹나 모르겠어요.”

“비싸다는 개념이 없는 거겠지.”

가격대비 만족이라는 소린가? 내 경우로 따지자면 K3는 불만제로에 나와야 할 만큼 불만족스러웠다. 나를 빤히 보던 묵야가 빈 의자에 눕혀놨던 옷걸이를 들었다. 반으로 접혀있던 짙은 밤색의 옷커버가 길게 펼쳐졌다.  

“네 옷은 엉망이라 세탁 맡겼다.”

커버를 벗겨내자 새 것임이 분명한 검은색 정장이 드러났다. 아이보리색의 드레스셔츠와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수트는 내가 입기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래도 입고갈 옷이 없으니 저 정장을 입어야 했다.

“돌려드릴게요.”

“맞춤은 아니지만, 네 사이즈로 산거니 선물이라 생각해.”

“너무 과한데요.”

“싸구려야.”

가격이 착한 옷을 파는 가게는 알지도 못할 것이 분명한데 남자가 과연 싸구려를 구입했을까 싶었다. 묵야가 침대 위에 그 정장을 올려주었다. 눈가를 간질이는 앞머리를 옆으로 밀어냈다. 머리카락이 보들보들했다. 그 점이 이상해서 머리를 뒤적뒤적 만지자, 묵야는 표백제에 이틀은 담갔던 것 같은 하얀 드레스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넌 잘 때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다. 조심해.”

“네?”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겨주는데도 잘만 자더군.”

허. 기가 찼다. 그런 것도 모르고 욕실에서 쿨쿨 잠이나 잤다는 소리다. 묵야가 귀찮도록 내 몸을 만졌던 기억은 있는데 그게 씻겨주는 것인지는 몰랐다. 

“다음엔 제가 씻겨드릴게요. 보답 해야죠.”

“그거, 기대되는데?”

묵야가 씩 웃으면서 완벽히 정장을 갖춰 입었다. 묵야의 몸에 딱 피트 되는 옷감도 고급스러웠지만 그 정장의 수준을 몇 배나 더 올려주는 것이 저 남자였다. 저대로 묵야가 정장 모델을 하면 어디 상표든 불티나게 팔릴 것 같았다. 

침실에 딸려있는 세면대에서 양치질을 마치고 나 역시 묵야가 준비해준 정장을 입었다. 휴대폰과 열쇠가 창문틀 옆 대리석바닥에 놓여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 32통과 문자가 8개가 도착해있었다. 그와중에 배터리가 닳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생소한 번호로 온 22통은 분명 이주율에게서 온 전화일 테고, 1통은 태형 형, 나머지는 유진이었다. 문자의 발신자는 전부 생소한 번호였다. 휴대폰을 뒤적이다가 이주율의 휴대폰 번호를 외울 지경이었다. 처음엔 어디야? 라고 시작된 문자가 뒤로 갈수록 협박조에 가까워졌다. 마지막 문자는 [죽여 버리기 전에 연락해.] 였다. 

움직임에 몸이 익숙해지니 둔한 통증만 가끔씩 찾아올 뿐 살만했다. 신발장 앞의 전면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조금 낯설다 뿐이지 정장을 입은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묵야가 내 옆으로 와 구두를 신었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꼭 정장 착용의 바른 예와 바르지 않은 예를 견주는 것 같았다. 바른 예는 물론 묵야였다.

“고등학교 땐 정장이 잘 어울리는 어른이 되고 싶었거든요.”

“잘 어울려.”

“묵야씨만 하겠어요.”

묵야는 답 없이 문을 열었다. 검은 정장에 컨버스 운동화를 신자니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디 들릴 것도 아니고 바이크 타고 바로 집으로 갈거니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묵야와 같이 올라탄 엘리베이터 안에선 호텔 특유의 샤워코롱 냄새가 났다. 고개를 올려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구경했다.

“후유증은 없지?”

K3를 말했다.

“네, 전혀 없네요.”

“플래쉬백 되는 현상이 있을 지도 몰라.”

“플래쉬백이요?”

“마약 사용을 중단 한 뒤, 이전에 복용했던 환각상태의 경험이 재연되는 걸 말해. 한두 번 복용한 걸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진 않지만 드물게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어.”

어제와 같은 경험이 재연되는 것은 결단코 사양이었다. 내가 드물게 경험하는 사람 중에 재수 없는 한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재수 없는 걸로 따지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게 바로 나다. 슬슬 걱정이 되긴 했다.   

“혹시나 플래쉬백을 경험하면 놀라지 말고 나한테 바로 연락해.”

“그런 일은 없길 바라야죠.”

“그렇지.”

묵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묵야가 짓궂게 말했다.

“약쟁이 애인은 두고 싶지 않거든.”

순간 발끈 했지만 전적이 있기에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어기적거리며 로비를 나가는 나를 카드키를 건네주었던 중년직원이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허리를 바짝 펴서 당당하게 걸으려 했지만 무리가 따랐다. 중년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기에 나도 화답해주었다. 호텔 밖으로 나온 묵야가 걱정스런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이주인,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바이크 타고 가면 되요.”

“그래,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네, 그럴게요.”

손을 흔들며 바이크를 찾았다. 호텔 건물 정중앙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떡하니 내 바이크가 주차되어 있었다. 민망함이 배가 됐다. 얼마나 급했으면 저기다 주차를 했을까… 헬멧을 걸어둘 여유도 없었는지 바이크의 시트위에 헬멧이 굴러다녔다. 그걸 잡아 머리에 뒤집어쓰고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로 흘끔 보니 묵야는 내가 호텔을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바이크의 진동이 오늘따라 고통으로 다가왔다. 잠시 쉬고 갈까 했지만 매도 몰아서 맞는 게 낫다고 꾹 참고 집까지 빠른 속력으로 달렸다. 집근처 골목으로 들어와서야 바이크의 속력을 낮췄다. 이른 아침이라 출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문 앞을 보니 반짝반짝하는 커다란 생물체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바이크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든 유진이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유진이 내 헬멧을 벗겼다. 흰 피부 때문인지 빨개진 코가 더 도드라졌다.

“어디 갔다 와!”

“남이사.”

“응? 누구 이사 도와주고 오는 거야?”

아무리 유진이 한국말을 잘한다고 해도 모르는 말이 꽤 많나보다. 유진이 코를 훌쩍거렸다.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야?”

바이크에서 내리는 순간 지끈한 허리 때문에 숨을 한번 삼켜야 했다. 

“어제 새벽부터.”

정말인 듯 목소리가 맹맹했다. 열쇠를 뺏었으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냥 기다린 녀석이 안쓰러웠다.

“호텔방 놔두고 왜 또 왔는데?”

“호텔방은 너무 쓸쓸해.”

대문을 열고 좁은 마당을 걸었다. 아무래도 유진에게 마당에 집 한 채 마련해줘야 할 듯싶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유진이 투덜댔다.

“이집 미친놈이 안 들여 보내주잖아. 얼마나 추웠다구.”

“이주율 말이야?”

“응. 형 동생. 사이코.”

영어 테이프에서나 들을 법한 미국인 억양이 툭 튀어나왔다. 사이코라는 말은 따라 발음해야할 정도로 본토스러웠다. ‘fucking brother’ 속으로 얼마나 이주율을 욕하는지 생성된 문자만 봐도 알겠다. 

“그 녀석 아직 집에 있어?”

“몰라. 쭈그리고 앉아서 좀 잤어.”

왜 자꾸 이 녀석이 안쓰러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청승을 떨래? 쯧쯧거리며 속으로 유진을 나무랐다. 

현관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팔짱을 낀 이주율이 고압적인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저기에 도깨비 방망이 하나 들려주면 쉽게 살인이라도 저지르겠지 싶다. 도깨비 방망이 하니까 순간 묵야의 아래가 생각났다. 이 와중에 별 생각을 다한다.

“비켜.”

문턱에 선 이주율을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유진이 졸졸 따라 들어왔다. 춥다, 춥다 하면서 보일러가 돌아가는 방바닥에 손을 녹였다. 이주율이 내 손목을 거칠게 쥐어 잡았다. 으드득하며 뼈가 갈리는 힘이 가해졌다.

“어디서 자고 오는 건데?”

“친구네 집.”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주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게서 생겨나는 문자를 읽으려 했다. 마음만 먹으면 녀석에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 교묘히 진실만 피해가는 사실만을 말하거나 또는 이주율이 묻는 물음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너한테 친구가 어디 있어?”

“실례야. 친구 정도는 있어.”

“네 친구는 내가 다 치워버렸는데 있을 리가 없잖아?”

이주율이 광적이게 비웃었다. 저 녀석 때문에 친했던 녀석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둘씩 나를 멀리했었나? 

“피곤해. 이거 놔.”

“자고 왔다며 왜 피곤한데?”

“이사도와주고 왔다잖아. 동생이 완전 퍽군이야.”

폭군이겠지…. 유진이 저렇게 쓸모도 있었구나. 남이사를 집을 옮기는 이사로 들은 유진이 다소 기특해졌다.

“진짜야?”

이주율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래.”

“전화는 왜 안 받았는데?”

“온지 몰랐어.”

“씨발!”

이주율이 발로 소파를 걷어찼다. 쾅하는 굉음이 집안을 뒤흔들었다.

“유진, 너 안방에 들어가 있어.”

“아니, 나가. 양키 새끼 내 집에 들이지마.”

유진이 재빠르게 안방으로 이동했다. 방문을 닫고 잠그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주율이 기가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친절하면서 왜 나한테는 이렇게 못되게 굴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친절하게 굴 수 있는 상대는 너 뿐이야.”

이주율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파를 계속 발로 내리쳤다. 꽉 쥐어진 주먹이 내게로 향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흐트러진 이주율이 내려온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주율 왜 이래. 날 떠난 건 너였잖아. 그동안 연락한번 없다가 이러는 건 무슨 심보야?”  

“…네가 나를 찾아왔잖아.”

“그럼 찾지 말았어야 했어?”

내 손목을 쥔 이주율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목을 빼냈다. 이주율이 다시 거칠게 잡으려고 하자 녀석을 노려봐주었다.

“이주율. 너 이렇게 폭력적으로 굴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말하지 마.”

“아버지 폭력이 지긋지긋하다 했지? 근데 너도 비슷해져 가는 걸 모르겠어?”

“그 인간이랑 나랑 비교하지 마.”

“이주율, 주율아.”

분노에 떨고 있는 녀석을 토닥여주었다. 녀석은 얌전히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너는 내 동생이고 내 하나뿐인 가족이야. 너도 알잖아, 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집착이지.”

“그럼 너도 나한테 집착해.”

“이주율, 제발 이러지 마.”

힘이 드는 듯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녀석의 몸이, 갑자기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굳었다. 뒤로 내 몸이 나뒹군 것은 불과 3초도 안돼서였다. 나는 무슨 상황이 생긴 건지도 모른 채 눈만 깜빡였다. 입안과 코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코에서부터 주르륵 피가 쏟아졌다. 터진 입안을 벌리자 침과 섞인 핏물이 쏟아졌다. 

“어떤 새끼야?”

코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피를 막았다. 그제야 녀석이 주먹으로 나를 팼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보다 다부져진 주먹은, 녀석이 활동하는 바닥에서 얼마나 거칠게 굴러먹었는지 알 법했다. 전에는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나를 올라타서 뺨을 때리는 녀석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다. 이주율이 왜 갑자기 주먹질을 시작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내게서 생성된 문자는 없었다. ‘향기, 섹스’ 이주율의 주변으로 문자들이 튀어나왔다.

“이런 지독한 냄새를 풍기면서 그냥 친구네 집에서 자고 왔다고? 어떤 친구 새끼인데 이런 달콤한 샤워향기를 풍겨? 말 해!”

이주율이 혀를 내밀어 내 목덜미를 핥았다.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행동에 소름이 끼쳤다. 코피가 옆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 순간 굉음소리에 방에서 나온 유진이 이주율을 걷어찼다. 덩치로는 유진이 더 크기에 이주율이 옆으로 밀려났다. 

“What the hell is that?!”

유진이 인상을 쓰며 이주율을 손가락질 했다. 이주율이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유진은 이주율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녀석의 팔을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주율이 엎어진 채로 유진의 다리를 걷어찼다. 유진이 fuck!하는 짧은 욕설과 함께 나자빠졌다. 이주율과 유진은 번갈아가며 서로의 몸에 올라타서 주먹질을 해댔다.

“둘 다 그만해!”

주먹질이 난무하는 가운데에 끼어들었다. 씩씩대는 두 녀석이 화를 삼키지 못하고 서로를 노려봤다. 불현 듯 내게로 넘어온 이주율의 시선이 경악에 물들었다. 

“피가, 피가 나잖아….”

이주율은 흥분이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이제 알았냐? 피는 너한테 맞았을 때부터 났다. 이주율이 황급히 소파 테이블에 놓여있는 티슈를 뽑아 내 코를 틀어막았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몸이 성할 날이 없구나. 아예 단념한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유진은 이도저도 못하는 기색으로 왔다갔다 거렸다. 

“정신없어. 둘 다 앉아.”

이주율이 시선을 피하며 내 앞에 앉았다. 유진은 티슈상자를 통째로 가져와 내 얼굴에 내밀었다. 흐르는 피가 서서히 멎어갔다. 찢어진 입안이 화끈거려 입안에 고인 쇠맛나는 피를 티슈에 뱉어냈다. 

“이주율. 너 제정신이야?”

혀로 안쪽의 터진 살을 쓸었다. 여린 살이 이빨에 찢겨나가 움푹 패여 있었다.

“너 이럴 때마다 무서워죽겠어. 네가 나를 때리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가 아버지처럼 변해갈까봐 무서운 거야. 아버지의 폭력도 처음에는 가벼운 체벌 수준에 불과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의 강도는 점점 거세졌다. 방치되는 폭력은 더한 폭력을 낳는 법이란 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이주율이 아버지처럼 변해가게 둘 수 없었다. 차라리 복싱이라도 배워 녀석을 제압할 힘을 기를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유진, 미안하지만 잠깐만 다시 방에 들어가 있어.”

내게 충고를 들을 이주율을 생각해서였다. 유진이 입을 삐죽였다. 녀석의 금색 머리를 쓰다듬자 이주율의 눈빛이 또다시 날카롭게 빛났다. 

“고마워.”

입모양으로만 유진에게 말을 건넸다. 유진이 할 수 없다는 듯 비척비척 안방으로 들어갔다. 유진이 방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주율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주율아.”

내 부름에 녀석의 어깨가 움찔했다. 주율아, 라고 다정하게 불러본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어제는 꿈을 꿨어.”

엄밀히 말해, 꿈이 아닌 환각이었다.

“아버지한테 맞고 있는 너를 껴안는 꿈. 다친 너를 껴안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이주율은 답이 없었다.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형이고 너는 하나뿐인 내 동생이고. 그러니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결국 끝까지 지켜주진 못했지만……. 네가 나를 원한다고 해서 우리 둘이 섹스하고 그리고 둘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면? 너도 나도 절대 행복하지 못했을 거야.”

“…도망쳤잖아.”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다. 그래, 한 때는 이주율의 마음에서 도망쳤었다. 그래서 녀석이 정신병원에 갇히는 그 날도 녀석을 돌아보지 못했다. 

“이제 도망치지 않아. 대신 네가 원하는 행동은 하지 못해.”

“왜?……. 내가 너를 때려서? 아프게 해서?”

“그런 문제야 아니야. 난 너를 한 번도 이성의 대상으로 본 적이 없어. 그건 너도 알고 있잖아.”

이주율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녀석이 속으로 울고 있었다. ‘아파, 아프다.’ 녀석의 단어가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이주율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 멍청아,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해서, 왜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너랑 형제라는 사실이 끔찍해.”

이번엔 녀석이 내 심장을 찢었다. 

“너는 내 동생이야. 그건 변하지 않아.”

쐐기를 박는 내 말에 녀석의 눈시울이 붉게 타올랐다. 이주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도 않고 쿵쿵대는 걸음으로 현관을 향했다.

“이주인, 난 포기 안 해.”

이주율이 뒤돌아 선 채로 이를 갈며 말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답해 줄 수 없었다. 차라리 내 마음 따윈 죽이고 네 말대로만 따랐다면 다른 결과가 생겼을까? 아니, 절대 아니라고 확신한다. 내 부모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보며 우리를 학대했던 아버지. 

이주율, 만일 내가 너의 마음을 받아들여 함께했다면 넌 더 망가져 갔을 거야. 우리는 속마음을 숨기고 평생을 살아갈 수 없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너는 거짓으로 뒤범벅된 내 마음을 읽고 점점 폭력으로 점철돼가겠지. 그럼 결국 우리는 상생할 수 없는 길을 갔을 거야. 파국을 맞은 부모와 우리처럼. 그런 끝보다는 차라리 나는 네가 가슴아파한들 네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쪽을 택하겠어. 어떤 선택을 하던 고통이 따른다면 우리가 계속 함께할 수 있는 길이 최선이니까. 주율아, 그게 내 욕심일까? 녀석이 사라져버린 현관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되물었다.

“형, 괜찮아?”

망연자실하게 현관을 쳐다보는 나를 유진이 불러일으켰다. 

“괜찮아.”

지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골에서 조용히 살걸. 유진이 내 팔을 잡아 부축했다. 욕실로 가서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힘도 없었다. 내 방 침대에 덜렁 누워버렸다. 저 밖으로 사라진 유진이 수건에 물을 묻혀 가져왔다. 뻣뻣하게 굳은 핏물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고맙다.”

유진에게서 수건을 건네받아 스스로 얼굴을 문질렀다. 수건에서는 쉰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 세탁바구니에 집어넣었던 수건의 색과도 같았다. 쉰 냄새도 똑같았고.

“검은 바구니에 들어있던 수건이지?”

“응, 새 수건이 없어서.”

“그래.”

얼굴 전체에서 쉰내가 진동했다. 뭐가 이렇게 우습냐. 힘겨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대 밑에 앉았다. 

“너도 가서 쉬어. 밤새 밖에 있었다며.”

“형 쉬는 거 보구.”

“잘 거야.”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지만 엉망인 몸을 추슬러줄 것은 숙면뿐이었다.  

“형이 맞는 게 싫어.”

“그래.”

유진의 말에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학대했던 것도 녀석은 사이코메트리로 얼마든지 읽어냈을 테니까. 어쩌면 유진이 내 주변을 계속 맴도는 이유가 단지 나를 동정해서 아닐까라는 생각에 확신마저 들었다. 나는 동정 받을 만큼 약한 놈이 아니었다. 그리고 늘 그렇게 살아왔다. 세탁소에 맡기지 못했던 묵야의 코트가 책상 의자에 걸려있었다. 문득 묵야 생각이 났다. 나는 이주율에게 내게 바라는 감정을 묵야를 통해 깨우치고 있었다. 그것은 쓰기도 하며 달기도한 이상함 감각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묵야에게 연락하기로 했지만 손 하나 까닥하기가 싫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유진이 뒹굴 거렸다.

“자려면 이불 가져와서 자.”

“그래도 돼?”

“그래.”

유진이 커다란 몸을 일으켜서 안방으로 달려갔다. 쿵쿵쿵하며 집안 전체가 울렸다. 초등학교 5학년 되던 해 재건축했던 집은 이미 한참이나 낡아있었다. 유진은 부모님이 사용하던 황금색의 오리털이불을 질질 끌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이불의 반은 바닥을 까는데 사용하고 나머지 반은 유진이 제 몸을 덮었다. 유진의 머리칼은 이불의 색보다 더 밝고 연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아침이라 행동이 둔한 문자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집한 문자들은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밍기적거리며 내 방을 돌아다녔다. 

“뭐가?”

“사이코메트러라며. 남이 사용하던 물건을 쓰는 게 불편하진 않아?”

“전혀. 무턱대고 읽히는 건 아니야. 내가 읽으려 노력해야만 사이코메트리를 할 수 있어.”

편리한 능력이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내 능력보다는 나았다. 과거엔 문자를 읽는 능력에도 사이코메트리 같은 명명이 있을까하고 인터넷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문자를 읽는 사람, 사람의 생각을 문자로 읽는 능력] 등등의 검색어를 쳐봤지만 이주율이나 나와 같은 현상을 겪는 사례들은 없었다. 로뎅이 제작한 -생각하는 사람-만 연관된 검색어로 뜰 뿐이었다. 고뇌에 빠져 턱을 괴고 앉아있는 청동상이 꼭 그 때의 내 꼴 같았었다.

“아프지 않아?”

“몸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넌 만약 태형 형이 네가 좋다고 하면 어쩔 거야?”

나와 이주율의 상황을 전부 알고 있는 유진이기에 꺼릴 것이 없었다. 과연 내가 처신을 잘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걱정도 들었고.

“sexual love? or brotherly?”

사랑이냐? 그저 단순한 형제애냐? 유진이 자세히 물었다.

“러브.”

“Oh~no!!!”

유진이 미국인 특유의 과한 억양과 우렁찬 육성으로 거부의 말을 내뱉었다. 

“태형 형이, 그 사이코처럼 굴면 난 아마 한국에 절대 들어오지 않았을 거야. 아니면 생각을 바꾸도록 지독하게 때려주거나.”

그래도 피가 섞이지 않은 태형 형과 너는 우리보다 사정이 낫지 않냐. 태형 형과 유진이 절대 그럴 관계일 리가 없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태형 형은 내 아버지의 의붓아들일 뿐이야. 나름대로 나와 형제이긴 해도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에뜨탕? 같은 건 없어.”

“애틋함이겠지”

“whatever.”

그래, 네 말대로 어쨌거나, 미국인인 네가 한국말을 이정도로만 구사해도 훌륭하다. 내가 알기론 태형 형은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보통 국제결혼을 한 부부의 경우, 자식은 두 나라의 모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하던데……. 핏줄 상으론 태형 형은 토종 한국인이니 영어를 쌀라쌀라 구사하는 것도 어울리진 않겠다. 

“주인, 자?”

“…….”

“주인형, 자?”

“잘 거야.”

유진은 학습효과는 있는 녀석이라 답하는 않는 나를 향해 금세 형이라 불렀다. 

“태형 형도…….”

유진이 말꼬리를 늘였다.

“태형 형도 나름 불쌍한 사람이야.”

불쌍하다고 이야기하는 유진에게선 동정심의 어떤 안타까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무감각하게 지나가는 개를 보고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과도 흡사했다. 내가 아는 태형 형은 늘 밝고 앞뒤가 똑같은 남자였다. 물론 태형 형에게서도 악한 문자를 발견한 적은 수없이 많았다. 살인마를 보며 혐오스러워하고, 성폭행을 일삼은 자들을 생각 속에서 잔인하게 찢어발기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노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부모의 사랑 속에서 바르고 올바르게만 자랐을 것이 분명한 태형 형을 왜 불쌍하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불가능했다. 

‘hidden’ 숨겨진 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볼 수 있도록 위로 솟았다. 그것은 겉이 투명해 내부의 골격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몸을 가진, 열대어종 유리메기처럼 팔랑거렸다. 불투명한 창을 통해 비추는 햇빛만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투명했다.   

“미국에 살면서도 형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사이코메트러들은 생각보다 많지만.”

“그래?”

점점 부풀어 오르는 뺨 때문에 말하기가 불편해졌다. 

“식스센스가 뛰어난 사람들은 대게 사이코메트러의 일정 수준에는 들어섰다고 보면 돼. 주인형 능력은 유전이야?”

“글쎄다.”

“주인형 동생도 같은 능력을 가졌잖아. 그리고 형 아버지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잔뜩 가시가 선 말을 내뱉었다.

“주인형 만큼은 아니지만 그 사이코도 멍할 때가 많은 것 같아. 허공에 떠다니는 무언가를 유심히 보고 있지. 이 집에 살며 사이코메트리를 통해서 본 주인형 아버지도 그랬어.”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은 더 객관적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멍해있던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내 기억 속에 그는 골프채를 들고 형형한 눈빛 빛내며 우리를 때리던 추억이 전부다. 

“궁금하지 않아.”

“미안.”

유진이 금방 풀이 죽어서 끼잉거렸다.

“네가 미안할 건 없지.”

“그래도….”

“유진아, 나 말하기 힘들다. 그만 말할게.”

“알았어. 미안해.”

사과를 입에 단 유진이 이불 속에서 바스락댔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몸의 구석구석을 번갈아가며 괴롭혔다. 저도 모르게 약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유진은 머리만 대면 잠에 드는 체질인지 가볍게 코를 골았다. 뺨에 무언가가 와서 달라붙었다. 평소엔 깃털이 부딪히는 감각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은 바위가 날아온 마냥 고통스러웠다. 

뺨으로 손을 올렸다. 만두 한 개가 입 안에 물려있었다. 열까지 오른 뺨에 달라붙은 글자를 떼어냈다. ‘후시딘’ 입안에 만두를 문 웃음이 흩어졌다. 내가 수집한 것들 중 이런 문자가 있는 지도 몰랐다. 그래…. 생각났다. 시골로 내려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카페를 찾은 장주 할배가 산에서 엎어졌다며 무릎을 다쳤던 때가 있었다. 뼈가 약한 노인이기에 생채기만 난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었고. 까진 무릎에 후시딘을 발라주자 장주 할배는 역시 상처엔 이게 최고여 하면서 생성한 문자였다. 그 때 주황빛에 말랑말랑한 느낌을 띤 문자가 귀여워서 방에다 가둔 기억이 떠올랐다. 

내 상처에 달라붙은 ‘후시딘’을 보고 문자에게도 자아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문자는 단지 자신과 상성이 맞는 장소를 찾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후시딘’ 이 녀석도 다친 장주 할배가 상처를 치료해주는 뜻을 담아 만들어낸 것이기에 내 상처에 와서 달라붙은 것이고. 그래도 퍽 기특했다. 뺨으로 다시 올라오려는 녀석을 풀어주었다. 깃털이 닿아도 아픈 뺨을 보호하려 머리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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