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기가 얼마나 시골이냐 하면, 인터넷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신되는 방송은 고작 4개, 고대 황금시대에서나 볼법한 자급자족식의 부락이 몰려있는 것만 같은 동네다. 학교는 두 달 전 문을 닫은 초등학교가 전부,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전부 유학을 갔다. 도시로. 이곳에서의 유학은 도시로의 전학을 뜻한다. 20분을 걸어야 전설의 고향 산신령을 닮은 할배가 운영하는 ‘명월 수퍼’가 나온다. 그곳에서 유통기한이 적힌 물품은 찾아볼 수도 없다. 아마 할배가 유통 기한을 아세톤으로 지우지 않나 싶다. 이미 발효된 야쿠르트가 수차례 발효과학을 직접 이루어내주시어 이물질까지 창조해내신다.
일주일에 두어 번 꼴로 택배 트럭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데 도착하는 대부분의 택배물품 수령자가 나다. 택배 기사 아저씨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도 이력이 났다.
“한꺼번에 몰아서 시키면 안 돼요?”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는데…. 택배기사가 짜증이 다분한 표정으로 배달물품을 나무 바닥에 내려놨다. ‘콜롬비안 마일드’ 라고 문구가 적혀있는 커피 포대가 택배 물류 센터 안에서 며칠은 썩은 듯 넝마가 되어있었다. 전표를 내민 택배 기사에게 사인을 해주고 시원한 아이스티 한잔을 내밀었다. 여전히 고맙다는 인사 없이 마시는 시크한 도시 남자시다. 나 하나를 위해서 이 산간지역을 오가는 택배기사에겐 다소 미안한 감도 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상부상조 해야지. 아이스티를 비운 택배기사가 웬일로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내게 말을 건넸다.
“이런데서 장사하면 잘 되요?”
나도 이참에 일 때려치우고 시골에다 커피숍하나 차려봐? 라는 뉘앙스가 풀풀 풍겼다.
“하하, 잘되면 이러고 있겠어요?”
하루 매상은 3만원이 고작이다. 매상까지 말하기엔 내가 너무 안쓰러운 종자로 찍히니 그만두기로 하자. 택배 기사는 되도록이면 한 달 뒤에 봅시다 라면서 트럭에 올라탔다. 4주 후에 보자니.... 정정해야겠다. 택배기사는 차도남이 아닌 신구 선생이다. 커피 포대자루를 질질 끌어서 주방으로 가져왔다. 사실 주방이랄 것도 없다. 동네 사람들이 만들어준 손님용 긴 나무 탁자 뒤가 내가 일하는 장소다. 시골 사람이라고 커피를 싫어할 거라는 편견은 버려야한다. 전통차보다 잘 팔리는 것이 포대 자루 안에 담긴 원두커피다. 심지어 빈티지하다며 포대 자루를 탐내는 아주머니도 있다. -딸랑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첫손님인 장주노인이 들어왔다. 예순이 넘었다고 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겉으로 보기엔 카페 매상의 10프로는 차지하는 VIP손님이다.
“오셨어요. 할배.”
“그려, 왔어.”
할배는 시큰둥하게 말하고 동그란 그루터기를 닮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장주 노인이 앉은 원목 의자에는 노인만큼이나 나무의 나이테가 빼곡했다.
“커피 한잔 줘.”
“네네.”
“항상 드시던 대로요?”
“응.”
또한 시골 사람이라고 입맛이 단순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장주 노인은 커피 장인이 와도 가운데 손가락을 흔들어 보일 늙은이다. 직접 생두를 볶아서 원두로 만들어야만 만족하는 할배다. 생두를 원두로 만드는 로스팅은 다소 쉬워 보이지만 까다로운 일이었다. 생두를 적당히 가열해도, 태워서도 안 된다. 할배는 생두가 발열되며 티딕거리는 크랙 소리가 들린 후 또다시 2차로 티딕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꺼내 식힌 원두를 즐겨 마신다. 나 역시 로스터 기계를 살 때 적힌 설명서를 보고 흉내 내는 것뿐이지 이렇다 할 지식은 없다.
“가게는 언제 접을라꼬?”
“안접을 건데요.”
이동네 사람에게는 내가 언제 가게를 접을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처음 이 촌동네에 카페를 차렸을 때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했던 것이 이 할배다.
“에라, 미친놈. 젊은 놈이 뭐라꼬 이 촌구석에 처박혀 사노? 니 인제 잡히간다.”
웃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순간의 동요는 감추지 못했다.
“할배 할매랑 싸웠죠? 얼굴 보니 딱 그러네.”
“할튼 니는 까페가 아이라 돗자리를 깔어야 대긋어.”
할배가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었다. 그 바람에 할배의 머리를 타고 올라오는 작은 먼지를 손으로 탁 터뜨려 잡았다. 할배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아차차, 여 올라오믄서 보니까 저 아래 순사들이 왔다고 하더라꼬.”
“경찰들이요?”
“그랴, 집집마다 순찰을 한다던디.”
때마침 가게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동네 사람들이 가게를 찾아오는 한가로운 발걸음이 아니었다. 경찰제복을 입은 남자 두 명과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할배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장을 입은 남자의 왼쪽 눈이 슬쩍 찌푸려졌다. 타인이 미심쩍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손님은 아니실테구.”
내가 웃으며 반기자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경찰 신분증을 내보였다.
“조사차 나왔습니다.”
나는 미간을 모아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검은 정장이 드러나지 않게 내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다. 나 역시 정장을 보지 않는 척 하면서 그가 하는 행동을 곁눈질로 따라갔다.
“요 2~3일간 외부인이 침입하거나 수상한 사람을 본 적이 없으셨습니까?”
“흠. 외부인이요……. 없었는데요.”
할배는 경찰들에게 관심 없다는 듯 돌아서서 적당히 식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내게 말을 건넨 경찰은 뭐에 홀린 것만 같다는 표정을 했다. 그거야 그렇지. 고작해야 50가구가 안 되는 동네에다 심지어 슈퍼도 하나 밖에 없는 곳에 카페가 있다니 홀릴 만도 하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제복이 나를 불쾌하게 노려봤다. 경찰 제복을 입어도 두 놈에게서 구린내가 폴폴 풍겼다.
“죄송하지만 이 곳 토박이는 아니시죠?”
사투리를 쓰지 않는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만.”
“혹시 요 근래에 이 동네에 들어오신 것 아닙니까?”
이러니 애꿎게 누명쓰는 사람이 생기는 거다. 용의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화살이 내게로 향했다.
“아니.”
차분한 목소리였다. 검은 정장이 흥미를 잃은 눈으로 나를 봤다.
“적어도 일 년은 넘었을 거다. 시간 낭비 하지 마.”
검은 정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경찰 두 명이 합죽이가 된 것을 보니 저들보다는 윗대가리인 듯싶다. 검은 정장의 말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내가 이 동네에 온 것이 이제 일 년 반이다. 보아하니 무당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때려 맞췄다기엔 완벽해 보이는 남자의 이미지와도 맞지 않았다.
“네, 일 년 반 정도 됐죠. 무슨 일이 있습니까? 탈주범이라도 생겼나보죠?”
설거지를 마친 컵에 남아있는 물기를 깨끗한 행주로 닦아냈다. 내 행동을 하나하나 훑는 검은 정장의 시선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은평구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목격 했다는 제보가 이 근방에서 수차례 들어왔습니다.”
“은평구 살인사건이요?”
화들짝 놀라는 내 물음에 경찰 두 명이 저건 뭐냐? 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뉴스를 잘 안보니 그럴 수밖에. 너희들도 현대문명과 떨어진 곳에서 한 달만 지내봐라, 저 바깥세상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모른다.
“k대인가, 뭐시기 음대 교수 아들이 지 부모를 살해한 사건 말이여.”
장주 노인이 리필해 달라며 비어버린 커피 잔을 내밀었다. 이왕 따르는 김에 저 세 명의 남자들 것까지 준비해 앞으로 내밀었다. 차가운 도시의 남자들은 주는 건 마다하지 않나보다. 밖이 꽤나 추웠는지 커피 잔에 손들을 녹였다. 커피를 입에 슬쩍 댄 경찰이 향을 음미했다. 제복을 뚫고 나올 기세의 울룩불룩한 근육과는 대조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우아하게 들린 새끼 손가락을 고히 접어주고 싶었다. 검은 정장도 마다하지 않고 커피 잔을 들었다. 정장은 완벽한 자세로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대게 검은 정장을 입는 남자들의 어깨에는 하얀 이물질 몇 개 정도는 떨어져있기 마련인데 남자의 정장은 갓 세탁소에서 찾아온 것처럼 빳빳하고 깨끗했다. 왠지 저 남자와 같이 사는 여자는 피곤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맛있군요.”
칭찬에 인색할 것 같은 남자인데, 의외다. 나는 검은 정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해주었다.
“수상한 사람도 없었고, 타지 사람은 택배 기사를 제외하곤 그 쪽 분들이 처음입니다.”
택배 기사라는 말에 경찰 두 놈의 표정이 눈에 띠게 동요했다.
“협조 감사합니다. 혹시나 의심되는 사람을 목격하시면 관할 경찰서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아직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한 경찰 두 명이 마시고 갈까, 그냥 갈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검은 정장은 다 마시고 가기로 결정했는지 몇 안 되는 나이테가 진하게 그려진 원형 의자에 앉았다. 커피 값을 받아야할 품새다. 나 역시 안쪽 의자에 앉아 따라놓은 커피를 홀짝였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잔을 내려놨다. 흘끔 보니 처음과 양이 다르지 않았다. 고양이 혓바닥인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피식 웃자 정장과 눈이 마주쳤다. 차갑네. 몸서리 쳐질 만큼. 남자의 차가움이 전이되는 순간에 따뜻한 커피로 몸 안을 달궜다. 장주 할배도 나도 그리고 남은 인원들도 커피를 다 비울 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커피를 다 마신 정장이 일어섰다. 덩치가 뒤에 선 경찰 제복들보다 커다랗지는 않았지만 위압감이 느껴졌다.
“네, 그러세요.”
딸랑딸랑 거리는 방울 소리가 울리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장주 할배도 고새 다 마셨는지 빈 잔을 다시 내밀었다.
“할배, 커피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아요.”
“살아야 을매나 산다꼬, 좋아하는 거 실컷 먹꼬 죽으련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할배의 잔에 커피를 따라주었다. 할배의 입매에 짙은 주름이 졌다.
“순사 놈들이 뭐라꼬 이 촌동네를 찾노. 끌끌. 요로 용의자가 왔다는 소린 들어본 적도 없는디.”
“그러게나 말입니다.”
할배도 내 웃음을 이해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주방 안쪽에서 과일 몇 개를 가지고 나오자, 커피 값 3천원만 할배가 앉았던 탁자 위에 올려져 있고 할배는 온데간데없었다. 조금 전 문에 걸어둔 방울 소리가 울렸던 것도 같다. 긴 나무 테이블을 돌아 나왔다. 할배가 앉았던 원목 의자를 옆으로 밀어 밑바닥이 보이도록 들었다. 그 밑에 할배가 두고 간 3천원을 깔았다. 내일이 되면 저 3천원으로 다시 할배가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농사만 해서 먹고 사는 할배에게 거품이 심한 커피 값을 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루 종일 손님은 일곱 명이 전부였다. 밭에서 일하다 온 아주머니들이 커피 일곱 잔을 시켜놓고 네 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갔다. 산속에 위치한 이 마을은 도시보다 해가 더 빨리 진다. 5시니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주방 안쪽에 쪽문으로 연결된 방은 내가 잠을 자는 곳이었다. 밥을 차려서 반찬을 올려놓은 문턱 앞에 내려놓았다. 식사를 하기 전 문턱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담배를 펴고 나니 밥맛이 싹 사라져있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다. 먹다보니 또 꿀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후땡 겸 다시 담배를 물고 주방으로 향하는 찰나였다. 깜짝이야!!! 카페의 문 앞에 낮의 정장이 서 있었다.
“아뜨뜨!”
놀란 입에서 떨어진 담배가 손등을 지졌다. 쟁반을 서둘러 싱크대에 던져놓고 물을 틀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손에 물기를 닦지 않은 채 정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또 오셨네요.”
검은 정장이 내 인사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이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남자의 자존심이 콱 구겨지는구나. 너무 커도 징그러운 법인데 남자는 몸은 조화가 잘 이루어져 위화감이 없었다. 이런 8등신 같으니라고. 절대 등신에 힘을 주진 않았다.
“오늘 오지 말아야 할 물건이 오지 않았습니까?”
정장이 다짜고짜 용건을 꺼냈다. 물론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는 브라질리언 생두를 주문했는데 도착한 건 콜롬비아 마일드더라구요.”
택배 기사에게 물건을 받은 뒤 주방 안쪽으로 끌고 간 커피 포대자루는 열어보지도 않았다. 로스팅을 해야 했건만 그 안의 물건이 생두가 아닌 것은 저 정장이 나타나고서야 알았다. 불현듯 정장이 지갑을 열어 내게 수표 몇 장을 건넸다. 무려 공이 6개였다. 욕심이 생겼지만 꾹 참았다. 나는 남자의 지갑으로 손을 뻗어 오만 원권 2장만을 꺼낸 다음 수표는 다시 남자의 지갑으로 넣어두었다.
“제가 주문한 커피 값만 돌려받으면 돼서요.”
나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포대 두 자루를 낑낑대며 끌고 나왔다. 정장이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뭘 말입니까?”
“경찰이 아니라는 거.”
“그래요? 방금 말씀하시기 전까진 몰랐는데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정장이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차가운 인상도 웃음하나로 바뀔 수도 있구나.
“나는 눈썰미가 좋거든.”
“그러신 것 같네요.”
“너 저 안에 들은 게 뭔지 알고 있어?”
“아뇨. 전혀 모르겠는데요.”
고개를 힘껏 저었다. 정장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웃음이 깊어진 덕이다.
“현명하군.”
“제가 현명했으면 주신 수표를 다 받았겠죠.”
“그렇지 않아서 현명한 거다.”
공이 6개 붙은 수표에 욕심이 안 나는 인간이 어디 있나? 다만 내 목숨이 더 귀할 뿐이다. 내가 남자에게 돈을 받고나면 저 포대 자루 안에 들어있는 것이 굉장히 가치 있고 위험할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테고, 그럼 정장은 영원한 침묵을 위해 나를 죽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정장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제가 원하는 생두가 아니니 어서 가지고 나가세요.”
정장이 낮에 앉았던 나이테가 진한 원목 의자에 앉았다. 곤란한데. 이렇게나 돌려서 말해도 나를 어찌하려 할 심산인가? 정장이 앞에 놓인 메뉴판을 펼쳤다.
“배고프군. 제일 잘하는 걸로 줘.”
“영업 끝났는데요.”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지.”
“잘하는 건 별로 없고, 먹을 만 한 건 있습니다.”
재빨리 주방으로 향하자 남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비듬이나 떨어져라. 주방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된장찌개 뚝배기에 불을 켰다. 사실 카페에서 음료와 커피 외에는 팔지 않지만 정장이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에 얼른 식사를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장의 혀가 고양이기 때문에 적당히 데워서 마른 반찬 몇 개와 함께 상을 차려주었다. 정장이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를 후르륵 떠먹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차려줬으니 맛없어도 맛있다고 해라.
“너……. 왜 이런 곳에서 썩어 살지?”
“아직 싱싱한데요.”
정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네 앞에서 말장난하고 살아남은 인간이 내가 처음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만.
“눈썰미가 좋군.”
“그 쪽 만큼이야 하겠어요? 근데 제가 이 동네에 일 년 정도 있던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너도 혹시, 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내뱉은 말이다.
“저 뒤에 포대자루. 이 동네서 저만큼 커피를 팔려면 적어도 일 년은 있어야 하겠지.”
동네 아주머니에게 뺏기지 않고 모아둔 커피 포대자루가 남자에게 있어서 추리의 도구가 됐나보다.
“너. 내 밑에서 일 해볼래?”
이건 또 무슨 장주 할배가 덤블링 할 소리인지. 실은 내가 덤블링 할 기세로 뒤로 휙 물러났다.
“전 여기 카페가 일터인데요.”
“돈은 원하는 만큼 벌게 해줄게.”
“땡기지 않는 건 아닌데. 저는 어두운 계통은 취향이 아니라.”
세상에 밝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음지에서 생활 하냐. 이 말씀이다.
“그렇군.”
남자는 포기가 빠른 타입인지 재차 묻지 않았다. 반대로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날 수도 있다. 나는 한 번 내린 결정은 웬만해선 번복하지 않는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정장색 만큼이나 까맸다. 남자는 수저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 뒤탈 없도록 처리 해.”
단 두 마디를 꺼낸 남자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꽤나 입맛에 붙으시는지 비어버린 밥그릇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원하는 대로 밥을 한가득 얹어서 내밀었더니 남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남자는 콩을 젓가락으로 골라내서 밥뚜껑 위에 죽 늘어놓았다. 콩이 싫은가?
“깜빵 체질은 아니신가 봐요.”
히죽 웃자 정장이 저걸 진짜. 라는 표정으로 같이 웃어주었다. 개구리 반찬까지 내놨으면 카페의 한구석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을 만한 미소다. 남자가 식사를 마쳤을 때쯤 경찰복을 입은 남자 둘이 카페로 들어섰다. 정장의 옆에 서서 험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꼴이 곧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신호가 울렸다. 이런. 아무리 나라도 슬슬 무섬증이 생기는데…….
정장이 배가 부른 호랑이처럼 나른하게 나를 훑어봤다. 배가 부른 호랑이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경찰복을 입은 녀석 둘이 하나씩 사이좋게 포대 자루를 어깨에 멨다.
“여기 밥 값.”
정장이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다행히 돈의 액수로 봐선 나를 죽일 것 같지는 않다. 십 년 감수 했다는 듯이 휴휴 하고 숨을 뱉었다.
“너…. 정말 이상한 놈이다. 눈치가 빠른 건지, 운이 좋은 건지.”
“뭐 둘 다죠.”
만 원을 집어서 금고통에 넣었다.
“형님, 그냥 갑니까?”
“그래.”
경찰복을 입은 두 놈이 불안한 눈빛으로 연신 나를 돌아봤다. 정장이 문 앞에서 서있자 어깨에 포대자루를 맨 놈들이 문을 열었다. 정장이 고개를 올려 방울을 봤다. 나도 정장이 먹은 식탁을 치우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이래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상대하기 어렵다.
“추운데 문 닫고 가시죠.”
“이 방울 왜 울리지 않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 애매한 대답이 기분 나쁜지 다시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상한 가게다. 마치 신기루 같군.”
“그럴지도 모르구요.”
“언제고 또 찾아와도 되나?”
“글쎄요. 별로 반갑지는 않은데요.”
“왜?”
정장의 물음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했다. 나는 손을 올려 다가온 정장의 어깨를 툭툭 턴 다음 허리에 붙은 것도 떼어냈다. 흰 비듬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 보다 더 질이 나빴다. 남자는 물론 알 턱이 없겠지만 말이다.
“뭐 하는 거지?”
남자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손목에서부터 전달된 뜨거움이 전신으로 퍼졌다.
“당신이 주렁주렁 달고 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뭐 그 쪽이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저와는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남자는 대체 의미를 모르겠다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마법사 같군. 너를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
신선했다. 적어도 마법사라는 말은. 나는 이 남자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편히 오래 살고 싶으니까.
“가시죠. 이 가게는 신기루라 다음에 오실 때는 없을 겁니다.”
재방문을 거절하는 내 말에 정장이 쓴 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다시 찾아올 것 같다는 예감은 확실히 들었다.
“또 잘못 배달되는 커피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남자가 문을 나섰고, 종이 울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남자가 먹은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함께 들어온 것들이 바닥에 검은 먼지처럼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진달래꽃 즈려밟듯 사푼히 걸어서 그 흉한 것들을 해치웠다. 금전도 발생하지 않는 일을 대신 해주는 법은 없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내게 감사해야 한다, 암 그렇고 말고. 손해 보는 듯한 기분에 남자의 두둑한 지갑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먼저처럼 자욱하게 보였던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니 몇 개 남지 않은 것들이 형체를 드러냈다. 바닥에 남은 것은 다섯 글자였다. 질투, 죽음, 가시, 돈, 충동. 글자들이 한데 뒤섞여있었지만 알아차리긴 쉬웠다. 다섯 가지 글자를 조합해봤자 저들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는 단서라곤 없다. 오늘 가게를 찾은 아주머니들에게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글자들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읽기 쉽지만 여러 글자가 뭉쳐 엉겨있으면 꼭 먼지 덩어리와도 같았다. 나는 남은 글자들을 발로 밟아 없앴다. 먼지처럼 팍 흩어진 것들을 발로 쓱쓱 비는데 카페의 문이 열렸다. 가다가 돌아온 건지 처음부터 문 앞에 있었던 것인지 정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찮게 됐네. 난 호기심은 참지 못하는데.
“두고 간 거라도.”
향현문자 02
정장이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정장은 항변할 새도 없이 내 허리를 껴안아서 입술을 부딪쳤다. 아랫입술이 정장의 이에 긁히려 쓰라림을 더했다. 한 치도 예상 못했던 상황에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었다. 고양이 혀답지 않게 뜨거운 혓바닥이 입술 안 예민한 천장을 훑었다. 급작스러운 남자의 키스를 피하고자 허리를 뒤로 뺐지만 외려 남자가 키스하기 편한 자세를 잡아주는 꼴이 됐다. 정장 안에 숨겨진 단단한 팔뚝과 가슴이 고정된 문처럼 밀어내지지가 않았다.
“푸하. 이게 무슨!!!!”
혀를 깨물자 남자가 그제서야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남자가 혀에 손바닥을 대고 띠자 핏물이 베어 나왔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남자가 자초한 일이니 사과는 않기로 했다.
“나와 사귀자.”
개떡같은 말이 찰떡같이 날아왔다.
“뭐, 뭐라구요?”
“너를 죽이지 않고 가는 대신 나와 사귀자는 말이다.”
“하, 이거 참 기가 막혀서.”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섹스는 참기로 하지.”
그런 놈이 다짜고짜 키스를 퍼붓는단 말이지. 신뢰가 전혀 가지 않았다. 동성애에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 남자는 일단 나와 맞지 않는다.
“거부한다면요?”
“이성이 좋은가?”
“싫지는 않죠.”
“그럼 남자가 싫다는 소리도 아니군. 네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지.”
“충동적이시네요.”
“그렇지도 않다고 자부해왔는데 이상하군.”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다. 남자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참는다며.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안한다며. 아 그건 섹스에 관한 거였나? 남자의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다. 다시 강렬한 키스를 퍼붓는 탓에 허리가 뒤로 꺾였다. 남자가 내 가슴을 더듬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자 참았던 기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컥.”
기침의 끝에서 핏덩이가 확 뱉어졌다. 남자의 혀에서부터 전달된 것은 아니다. 남자가 깜짝 놀라며 내 양어깨를 잡았다.
“병이 있나?”
내 안색을 살피는 남자의 행동에 그만 실소가 나왔다.
“병은 아니고 독이 뱉어졌달까요.”
“네가 준 된장찌개는 독하지 않았는데?”
남자가 내 입술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닦아냈다. 된장찌개는 나도 무지하게 좋아한다. 남자의 입에서 차라리 된장찌개 냄새가 났으면 좋다고 달려들었을 정도로. 좀 전에 발로 밟은 글자들의 잔해 중 독한 놈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인정해야 한다.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갓난아이처럼 순진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남자의 주변에 아무 글자도 떠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갓난아이에게도 글자는 아니더라도 그림 형체가 떠다닌다. 남자는 말 그대로 무(無)였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백치도 저렇긴 힘들다. 남자는 그 말로만 듣던 무뇌아인가?!
“혹시 사는 게 힘들진 않아요?”
“아니, 재미있는데.”
삶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재미를 말하니 물은 내가 당황스러웠다. 골똘히 생각하는 내게로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남자를 떼어내고 근처 의자 아무데나 앉았다. 남자가 잠시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렸다.
“현금이 좋아? 선물이 좋아?”
뜬금없는 말에 양 관자놀이를 감쌌다. 아니, 갑자기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싶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뻔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제가 마음에 드세요?”
단지 죽이지 않기 위해 사귀자는 말을 할 남자 같지는 않다. 그 정도로 동정심이 넘치고 유해보이는 남자는 아니었다.
“네게 관심이 생긴다. 이런 곳에서 카페 운영하는 것도 그렇고. 혹시 다른 파에서 일하고 있나? 이곳이 약이 통하는 루트는 아니겠지?”
“그건 아니에요. 제가 원체 사람 많은 데를 싫어해서요.”
남자가 내 눈을 들여다봤다.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나가다가 떠오른 건데, 낮에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 물건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어. 그런데 다시 내가 찾았을 때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이 그 포대자루였다는 것을 아는 듯 행동하더군.”
아아, 이래서 감이 좋은 남자는 안 된다. 심지어 이 남자는 읽히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 포대자루 안에 뭐가 담겨있는지는 안다. 카페를 찾았던 경찰복들의 주변으로 돈, 마약, 밀매, 매춘. 수없이 더러운 글자들이 떠다녔었다.
“제가 감이 좋은편이라서요.”
“그렇겠지?”
정장이 묘하게 웃었다. 혹시 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정장에게 글자가 떠다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능력을 가졌기에 글자가 보이진 않는 건가 하고. 섣부른 판단임에도 나는 넌지시 정장에게 물었다.
“사이코메트리 같은 현상 믿어요?”
남자가 무슨 소리 하냐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엉뚱하군. 지금 네가 사이코메트리를 한다는 소린가?”
“그럴지도 모르구요.”
“차라리 용한 무당이라고 하지?”
남자가 내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이리저리 살폈다. 피를 토하는 사이코메트러라. 비극적이었다. 남자는 적어도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대체 뭐지?
“뜯어보니 안에 약이 터져있더군. 흐른 것이 아닌가 의심돼.”
마약은 그램수를 1그램도 오차가 없도록 정확히 따진 다는 것을 대강 알고는 있다. 이거 참. 복잡하게 꼬이려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네. 나는 약쟁이가 아닐 뿐더러 그 흰가루에는 관심조차 없다.
이봐요, 정장씨. 저는 사람들이 강하게 생각하는 것이 글자로 형상화 되서 떠다니는 게 보여요. 그래서 포대 자루 안에 있던 것이 보지 않아도 마약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전 브라질리언 원두를 시켰는데 딴 게 왔다구요. 수상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건 그쪽들인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들 의심했겠죠.”
남자가 나불나불대는 내 입술을 깨물었다.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 앞으론 말로 해. 일찍 닥쳐줄테니. 앞치마 주머니로 남자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내 중요한 부위에 남자의 손이 근접해 있어서 온몸이 굳었다. 남자는 내 사타구니에는 관심이 없는 듯 휴대폰만을 꺼내가선 번호를 꾹꾹 눌렀다. 자신의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름.”
“네?”
“저장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하잖아. 알려줘 이름.”
제설차처럼 팍팍 밀어붙이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했다.
“빨리.”
“.... 주인이요.”
“카페 주인인 건 알아. 이름 알려주기 싫어?”
“이름이 주인이에요.”
남자가 민망한지 콧등을 긁었다.
“성은?”
“이씨요.”
“이주인. 이름 거짓말 아니지?”
“네.”
남자는 내 휴대폰을 여전히 잡은 채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저장해주었다. 휴대폰을 내 앞으로 휙 내밀자 남자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보였다. 묵야. 꼭 중국 이름 같았지만 별명이겠거니 생각했다.
“내 이름이야. 기억해.”
아무리 남자를 유심히 봐도 떠오르는 글자는 없었다. 강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도 없지는 않을 텐데. 분명 내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지금까지 남자에게서 발견된 글자는 다른 이들에게서 옮겨 붙은 것 뿐이었다. 물론 그 글자들은 아까 먼지를 털어내는 행동을 하며 손으로 쳐내주었다.
“문단속 잘해. 간다.”
정장은 휴대폰을 다시 내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주고 휭 사라졌다. 사람과 만나면 무조건적으로 생기는 글자의 난 속에서 타인과의 대화가 이렇게 신선하고 편할 줄이야. 아무튼 그 남자는 적어도 내게 있어 이름 만큼이나 특이한 존재였다.
남자가 나간 뒤 내부에서 가게 셔터를 닫고 문을 단속했다. 가게 불을 다 끄고 주방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익숙해진 길이라 가는데 무리는 없었다. 쪽방의 문을 열고 손을 뻗어 스위치를 누르자 여러번 깜빡깜빡 거리며 불이 들어왔다. 그 다음 텔레비전을 켜서 공중파 방송 중 제일 잘 나오는 채널을 찾았다. 텔레비전은 내가 직접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기에 방송을 하는 자들에게서 무슨 글자가 생성되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퇴근 후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사실 가장 즐거운 시간 중에 하나였다.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것이 눈가를 왔다 갔다 했다. 저런 예쁜 글자들은 놔두는 것이 좋았다. 밤만 되면 내가 남겨놓은 글자들이 폴폴 올라와 반짝거리는 빛을 뿌리는 반딧불처럼 돌아다녔다. 덕분에 불을 꺼도 환한 게 문제였지만.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를 때까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데 위이잉 하면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연락 올 사람이 누가 있더라?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했다.
[자니?]
보낸 이는 묵야였다. 자니? 라니……. 구남친 새벽전용 문자언어 중 하나가 아니던가. 꼭 야심한 새벽에 술 마시고 헤어진 연인에게 안부를 묻는 뉘앙스 같았다. 게다가 자니?에 ‘니’ 자라는 말은 정말 그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고 있나? 자고 있는 건가? 이런 말투가 더 정장다웠다. 사뿐히 씹을까 하다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것 없기에 친절히 답장을 해주었다.
[자지 않아요.] 라고.
답장은 십분 뒤에 왔다.
[꽤 야한 말을 쓸 줄 아는구나.]
나는 순간 내가 그 전에 뭐라고 보냈는지 조차 헷갈렸다. 이봐, 벌써 새벽 3시라고. 나는 남자가 헛소리를 못하도록 답문을 보냈다.
[저 잡니다. 빠이.]
정말로 그리고 나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진동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깼다. 내가 보내고 나서 정확히 또 5분 뒤에 온 답장이었다.
[잘 자렴.]
느낌이 팍 왔다. 이 남자 문자를 제대로 보내본 적도 없구나. 하여간 정말 특이한 남자였다. 무뚝뚝한 것 같은데 문자만 놓고 보자면 느끼할 정도로 다정스러웠다. 닭살이 돋은 팔뚝을 긁으며 폴랑거리는 문자 하나를 잡아서 손 안에 가뒀다. ′재회′ 라는 글자였다. 누구의 재회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라색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봐선 그리움이 묻어났다. 글자에는 감정에 따라 색이 존재한다. 타인에게서 나온 글자가 의도치 않게 또다른이에게 붙는 경우도 있었다. 짝사랑 하는 자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글자가 짝사랑 상대자에게 달라붙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손 안에 가둔 ′재회′를 풀어주자 다른 빛과 한데 어우러져 춤을 췄다.
진동이 누워있는 바닥을 울렸다. 계속 울리는 것을 봐선 문자는 아니었다. 상대방을 확인하곤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자요.”
“자는 것 치고 목소리가 멀쩡하군.”
혹시 문자는 다른 사람이 찍어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투가 사뭇달랐다.
“커피 주문했으니 내일 찾아갈게.”
“아~ 그러실 필요 없는데.”
“내가 보기 싫으면 밑에 놈들을 보내지.”
“아뇨, 그건 아니구요.”
무식하고 더러운 글자를 생성해 내는 자들보단 정장쪽이 조금 낫긴 했다.
“일 바쁘시지 않아요?”
“전혀.”
“아~ 그러세요. 그럼 오셔도 되구요. 저는 잡니다.”
“그래.”
문자처럼 잘자렴. 이러면 어쩌나 했는데 기우였다. 남자는 내가 끊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이런 배려 해줄 필요 없는데. 나는 아직도 전화시간 초가 가고 있는 것을 종료 버튼을 눌러껐다. 알람을 10시에 맞춰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예쁘긴 해도 반짝거리는 것들을 보고는 숙면을 취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