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999
묵범이 보낸 메시지가 쌓인 숫자.
999개까지만 표시가 되는지라 아마도 천 개 이상은 쌓였을 것이다.
남은 이틀은 푹 쉬려고 했는데. 묵범의 메시지 때문에 벌써 하루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 버렸다.
‘어쩐지 휴대폰 배터리가 순식간에 바닥나더라니.’
묵범 때문에 휴가를 와서도 쉴 수가 없다고 투덜대는 도화였지만, 메시지를 확인하는 손은 분주했다.
안 보면 될 텐데. 도화는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
밀린 묵범의 메시지를 읽고 있으니 묵범 홀로 나간 임무에 자신도 함께 나간 기분이 들었다. 아주 사소한 일까지 보고하듯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묵범
동정귀 한 마리를 처리했더니 다음 날 세 마리가 더 튀어나오더군요. 갔던 곳을 또 가야 했던 제 마음을 홍도화 씨는 모르겠지요.
“모르긴 왜 몰라. 얼마나 짜증 나는데.”
이제 도화는 묵범의 메시지를 읽으며 혼잣말을 하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묵범
홍도화 씨가 없으니 입맛이 사라졌습니다. 차사국 카페에도 발길을 끊었더니 카페 점원이 제가 퇴사한 줄 알았답니다. 어디 아픈 거 아니냐며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차사국 카페 점원이… 여자였었나?’
음료는 항상 묵범이 사러 들어가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왜 걱정을 해? 무슨 사이인데?’
카페 점원의 성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란 부분에서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마치 점원이 묵범에게 마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의 도화라면 묵범이 자길 떠보려는 수작질인 것을 바로 파악했겠지만, 지금은 묵범의 메시지에 푹 빠져 읽느라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다음에는 내가 직접 카페로 들어가야겠군.’
자신이 왜 기분이 나빠졌는지 원인을 찾을 생각도 못 한 채 도화는 자신이 없는 사이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나머지 메시지도 확인했다.
그렇게 밀린 메시지를 다 확인하고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메시지에 손이 멈칫했다.
묵범
보고 싶으니까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그 자식답네.”
도화는 묵범의 메시지를 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999 표시가 될 때까지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는데도 묵범은 꾸준하게 보냈다. 그게 너무 묵범다웠다.
도화가 대꾸를 하지 않아도 묵범은 도화에게 말을 걸었다.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리는 게 빤히 보여도 그는 도화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다.
보고 싶다, 외롭다란 내용이 대부분인 메시지였지만, 읽다 보니 도화도 괜히 옆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허전…? 고작 몇 달 같이 일한 것뿐인데 빈자리가 느껴진다고?’
혹시 허기짐을 허전하다고 잘못 느낀 게 아닐까 싶었지만, 허전이 확실했다. 도화는 뒤늦게 현천이라도 데리고 올 걸, 후회했다. 정신 사납게 조잘대는 현천마저 곁에 없으니 허전함이 배로 느껴질 수밖에.
‘아니야. 현천을 데려왔다간 현무별저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야.’
빠르게 후회를 철회한 도화는 메시지 창을 닫아 버렸다. 이대로 계속 보고 있다가는 묵범에게 답장을 보낼 것 같았다.
‘절대 그럴 순 없지.’
대신 도화는 담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가겠다는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담마
조심히 오세요!
짧은 내용이었지만, 허전함이 어느 정도 가시는 것 같다.
“내일은 몇 시에 출발하면 좋으려나.”
휴대폰으로 내일 날씨를 확인한 도화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날이 저물긴 했지만, 저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다.
영귀가 식사를 가져오기 전에 정원에 들러 볼 생각이었다. 어제부터 현무별저 전체에 흐르는 진향 꽃향기의 근원이 만첩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현무도 만날 수 있겠지.’
현무에게 내일 오전에 돌아갈 것이라고 알리고 싶었으나 도통 현무를 만날 수가 없었다. 방은 텅 비어 있으니 정원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귀찮은 것은 질색이라는 사람이 뭐가 그리 바쁜지 모르겠다며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
도화는 정원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접근금지 표지판이 정원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공사라도 하나?’
하지만, 공사를 한다 해도 정원과 한참이나 떨어진 곳부터 접근을 금지하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는 건가.’
사실 접근금지 표지판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 때문에 세웠구나.’였다. 이 별장의 주인인 현무와 현무의 사령인 영귀를 접근 금지시킬 린 없을 테니까.
현재 현무별저에서 유일한 이방인은 본인뿐이란 것을 알기에 든 생각이었다.
무엇 때문에 못 들어가게 하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만첩에게 어머니를 죽인 범인의 몽타주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물어봐야 했다.
만약 몽타주가 아침까지 완성되지 않았다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걸 물어볼 만첩을 만날 수가 없으니 그게 문제였다. 현무라도 만나면 무슨 일인지 물어볼 텐데.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 버려?’
표지판 앞에서 팔짱을 끼고 한참을 고민하던 도화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얌전히 있는 게 낫겠지.’
일부러 보란 듯이 접근금지 표지판을 세워 놨는데 무시하고 들어갔다간 주둥이뿐 아니라 온몸이 만년빙萬年氷에 영원히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 과장 같지만, 일주일간 지켜본 현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까.’
현무는 못 만나도 영귀는 만날 수 있다. 좀 답답하더라도 방으로 돌아가 영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30분 뒤.
도화의 방에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온 사람은 영귀가 아닌 현무였다.
“영귀는요?”
당황한 도화가 영귀를 찾자 현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왜. 날 찾는 거 아니었나?”
“아닙니다. 현무님은 식사하셨습니까?”
“난 이미 먹고 왔다.”
현무는 저녁 식사가 담긴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쟁반에는 시리얼과 우유, 고추장이 담긴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국수가… 아니네요?”
도화의 질문에 현무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소파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나도 영귀도 바빴거든. 국수보다는 준비하기 쉬운 시리얼로 가져왔다. 불만인가?”
“아닙니다. 고추장만 사양하겠습니다.”
“음? 영귀가 고추장은 꼭 가져가라던데.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그럴 리가요…….”
도화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추장 접시는 옆으로 밀어 놨다.
“왜 정원을 막아 놨는지 궁금했지?”
“네.”
“표지판을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안 넘어가더군.”
“…지켜보고 계셨었습니까?”
“궁금했거든.”
바쁜 일이 있어서 내내 방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근처에서 자신을 구경하고 있었다니.
‘만나는 사람마다 왜 다 이런 성격일까.’
내내 현천과 단둘이서만 살아왔던 도화는 저승차사가 된 뒤로 알게 된 인물들 대부분의 성격이 매우 개차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에 만난 현무와 영귀 또한 그 개차반 속에 포함되었다.
‘그래도 만첩은 정상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만첩마저 개차반에 포함되었다면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현무와 영귀는 한 명씩이지만, 만첩은 군락이니까.
“어제오늘 만첩홍도 향기가 진동을 했지?”
“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접근금지까지 할 정도면…….”
“별 건 아니고. 만첩이 열매를 맺고 동면에 들어갔거든.”
“그렇군요.”
도화는 열매를 맺는 것과 사방천지에 꽃향기가 진동을 한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연결점을 찾지 못했지만, 현무가 그렇다고 하니 우선 머리를 끄덕였다.
다행히 현무는 도화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해 주었다.
“원래는 50년 정도는 더 지나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시기를 당겨 맺느라 향기가 진동을 한 것이야.”
“50년이나 남은 시기를 왜 당긴 것인지요.”
“너 때문이다.”
“…저 때문이라고요?”
뜬금없이 너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도화는 억울해서 반문했다. 열매의 ㅇ도 꺼내지 않았는데 왜 나 때문이지?
“혹시나 자신들의 기운이 농축된 열매를 네가 먹으면 잃어버린 옛 기억이 돌아오지 않겠냐는데, 할 말이 없더군.”
“저 때문이군요.”
현천의 설명에 도화의 마음속에도 억울함이 사라지고 미안함이 자리 잡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기억을 지운 범인을 향한 분노도 스멀스멀 피어났다.
“내일 언제 여기서 떠날 생각이지?”
“시간은 상관없이 만첩을 만나고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만첩은 못 만나.”
“벌써 동면에 들어간 겁니까?”
질문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을 구하고 보호하고 이름까지 지어 준 고마운 존재였다.
“지금 동면하면 언제 깨어납니까? 내년 봄이면 만날 수 있습니까?”
“내년?”
현무가 피식 웃었다. 그게 말이 되냐는 빈정거림이 섞인 웃음이었다.
“열매 한 번 맺는 데 100년이 걸리는 녀석인데 동면을 한 계절 만에 끝내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을까?”
“그러면 언제쯤…?”
“이것 때문에 그러지?”
언제쯤 동면에서 깨어나는지 궁금해하는 도화에게 현무가 봉투 한 장과 작은 자개함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만첩홍도가 네게 주라고 한 거다. 열매를 맺고 바로 동면에 들어가서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전해 달라 하더군.”
무얼 먼저 확인해 볼까 고민하던 도화는 자개함을 선택했다. 자개함은 가로로 길쭉한 쌍합이었다. 하얀 바탕에 자개로 만첩을 닮은 꽃과 꽃에 앉은 나비 모양을 만들어 무척 아름다웠다.
쌍합 가운데에 달린 나비 고리 잠금을 해제하니 길쭉했던 함의 가운데가 벌어지며 숨겨진 네 개의 서랍이 나왔다.
서랍을 잡아당겨 열자 안에 파란 천 위에 새빨간 열매 한 알이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만첩의 열매군요.”
“그래. 그 많은 개체에서 맺히는 열매는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어. 이번에는 4개다.”
4개란 말에 도화는 나머지 세 개의 서랍도 열어 보았다. 신기하게도 첫 번째로 열어 본 서랍 속 열매만 붉고 나머지 세 개의 열매는 연한 분홍빛이었다.
“4개를 다 제게 준 겁니까?”
“주고 싶다는데 내가 막을 순 없지. 네가 먹어야 할 것은 제일 처음에 열었던 서랍의 붉은 열매다.”
도화는 붉은 열매가 든 서랍을 다시 열었다. 이걸 먹으면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다는 건가.
도화가 가라앉은 눈으로 붉은 열매를 쳐다보자 현무가 쯧쯧, 혀를 차며 도화에게 충고했다.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은 아니야. 그리고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그 기억은 만첩홍도의 기억이다. 네 기억은 네가 직접 찾아야 해.”
“아… 그렇겠군요. 이 열매는 만첩이 맺은 것이니까.”
기억을 찾을지도 모른단 말에 당연한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래도 아예 기억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